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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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605회 작성일 16-09-28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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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5(2016)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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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4)

《고난의 행군》1- 농촌아낙네가 되다

- 남조선인터네트신문 《자주시보》 9월 24일부에 실린 글 -

 

딸이 3살잡히던 해인 1997년 남편이 군부대 군의로 임명받아 우리 가족은 지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였다. 내 나이가 29살이라고는 하지만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부모님의 보살핌속에서 한시도 떨어져 살아본적 없고 더우기 지방에 전혀 가본적 없는 나로서는 참 당황스럽고 두려웠다. 부모형제를 떠나 멀리 지방에서 그것도 군인가족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무것도 할줄 모르는 연약한 내가 꽤 감당해낼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섰다. 안해로서 남편이 가는 길을 따라야 하니 나는 마음을 다잡고 가족들과 재미있게 생활하던 직장동무들의 바래움을 받으며 기차를 타고 나서자란 정든 고향인 평양을 떠났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사방 산들로 둘러막히고 자그마한 마을이 점점이 자리잡고있는 한적한 시골마을이였는데 처음으로 접하는 시골풍경이라 다소 신비스럽기도 하였다. 그 마을곁에 우리 군부대가 있었다. 한번 시내로 나가려면 1시간정도 차를 타고 가야 했다. 평양의 온수난방아빠트에서만 살다가 지방의 석탄을 때는 단층집에서 살아야 하는 나의 모든 생활은 많이 낯설었다. 

지방에 내려와 그곳 산골사람들의 생활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고난의 행군을 직접 체험하게 되였다. 1990년대 후반기는 우리 공화국에서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였다. 극심한 자연재해, 홍수와 가물로 식량생산이 크게 줄어들었고 계속되는 경제난으로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게 되였다. 게다가 미국과 제국주의련합세력의 경제봉쇄책동은 날이 갈수록 더욱 악랄해졌다. 식량이 부족하여 인민들에게 식량공급을 할수 없었으며 전기가 없어 저녁이면 캄캄한 방안에서 등잔불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등 일상생활의 모든것이 부족하고 어려웠다. 

흉년엔 뱀이 조이삭을 먹는다는 말도 있다. 사람도 먹을것이 없는데 집에서 기르는 개들도 먹을게 없으니 강냉이밭에 들어가 풋강냉이를 익기전부터 먹어버리군 하였다. 그래도 얼마나 여위였는지 배가 등뒤에 가붙어 마치 굶주린 늑대를 보는것 같았다. 강에는 물고기가 자취를 감추었고 산에는 산짐승이 말라버렸다.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 소나무의 껍질을 벗겨 송기떡을 해먹기도 하였다. 소나무껍질을 삶고 또 삶아 부드럽게 한 후 거기에 강냉이가루를 뿌려 범벅을 하면 송기떡이 된다.

인민들은 고난의 행군시기 너무 어려워 나물죽으로 끼니를 에우는 때도 있었지만 누구도 국가에 대해 불만을 가져본적은 없었다. 모두가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어렵고 힘들더라도 우리 후대들에게는 행복한 래일, 외세의 침략이 없고 자주적이며 평화적인 통일조국을 물려주어야 한다며 나라의 주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였고 그 길에서 자신의 청춘과 생명까지도 서슴없이 바쳤다.

누구나 다 《지금의 고난은 일시적이다. 당과 수령만 믿고 따르면 앞으로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가득찬 혁명적락관주의속에 하루하루를 내 나라의 부강발전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하였다. 

나는 고난의 행군시기의 전 기간을 지방에서 보냈다. 부대주변의 농장마을집에 가보면 하얀 쌀은 눈에 보이지 않고 노란 강냉이쌀이 드문드문 있고 대부분 산나물이나 감자를 썰어넣어 만든 잡곡나물밥이였다. 어떤 집은 감자 2알로 끼니를 에우기도 하였는데 그런 집에 가는 손님은 일부러 식사시간을 피해 방문하군 하였다.

우리 부대에서는 군인들에게 3끼밥이 다 차례졌지만 아침, 점심식사를 하고 저녁때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군인들이 자신들에게 차례진 밥을 줴기밥으로 만들어 부대주변마을 어린이가 있는 집들에 가져다주군 하였다. 그러면 그집 아주머니들이 다시 부대로 찾아와 제발 그러지 말라고, 우리보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먹어야 한다며 항의하군 하였다. 하지만 군인들은 그치지 않고 다음번에는 그집 문앞에 몰래 놓고 도망가군 하였다. 우리 어른들은 얼마든지 참고 견딜수 있지만 우리의 미래인 어린이들만은 절대로 굶어서는 안된다는것이였다.

우리 군인가족들의 생활도 넉넉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군인가족들은 자신들의 가정살림보다 군인들의 식생활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했다. 우리는 군인들에게 고기를 충분히 먹이기 위해 한해에 고기생산을 80㎏ 수행했다. 군인가족들이 집에서 돼지나 염소, 토끼, 오리, 게사니, 개 등을 길렀는데 사료를 대주지 못해 한 가족당 200평의 밭을 나누어주어 그 밭에서 농사를 짓고 집짐승을 길러 부대군인들이 먹을 고기를 보장하였다.

군관인 남편과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혼자서 하면서 200평의 밭을 가꾸고 농사를 지어야 했으며 집짐승을 길러야 하였다. 부대군인들을 위해 명절날이면 집에서 갖가지 음식들을 만들어 부대에 나가 군인들의 식탁도 차려주었는데 비록 힘에 부치였지만 마음은 기뻤다.

우리 부대 군인가족들이 다 해서 30여호 정도였는데 모든 가족들이 하루종일 밭에 나가 농사를 짓고 집에 있는 돼지에게 끼니를 끓여주어야 했으며 짬이 나는대로 토끼풀을 한바구니씩 뜯어야 했지만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고 거기서 자기의 삶의 보람을 찾았다.

평양에서 부모님의 보살핌속에 고이 자란 나로서는 너무나 벅차고 힘겨웠으며 한번도 해보지 못한 생소하고 어려운 농사일이였지만 국가에서 우리 군인가족들을 믿고 군인들의 생활을 맡겨주었는데 남들에게 질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야심차게 농사일을 배워갔고 짐승도 길렀다.

하지만 처음부터 결코 쉬운것은 아니였다. 손에 호미자루 한번 쥐여보지 못한 나에게 200평의 밭은 까마득해 보였고 남들이 몇고랑의 김을 맬 때 겨우 한고랑도 채 못나가는 정도였다. 손에는 물집이 생겨 쓰렸고 저녁에 잠자리에 누우면 허리가 쑤시고 다리가 퉁퉁 부었으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고 부모님이 그리웠다.

우리 부대 군인가족들은 평양에서 온 내가 손에 익지 않은 농사일로 힘들어하는것을 알고 자신들의 밭일을 다 끝내고는 모두 내 밭에 모여와 함께 웃고 떠들며 흥겹게 일손을 도와주었으며 어려운 일이 있을세라 친언니심정으로 나를 위로해주었다. 정말 군인가족들이야말로 군인들을 위한 일이라면 네 일 내 일이 따로 없는 큰 한가족이였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뙤약볕에 지칠 정도로 힘들었지만 가을에 가서 한해 농작물을 수확할 때는 참으로 흐뭇했다. 강냉이, 완두콩, 팥, 감자, 고구마, 등 제법 농사군이 다 된것 같았다. 하지만 해보지 않던 육체적부담을 이겨내지 못해 나는 평양에서부터 앓고있던 간경화로 그만 쓰러져 군의소에 입원하게 되였다. 입원해있는 기간 부대가족들이 번갈아가며 우리 집의 짐승들과 밭일을 도맡아 해주었고 우리 딸도 자신들의 집에 데려다 잘 돌봐주었다.

이렇게 서로를 위하고 남의 아픔을 항상 자신의 아픔으로 감수하며 한사람이라도 뒤떨어질세라 손잡아 이끌어주는 친혈육같은 가족들이 곁에 있기에 나는 그 어떤 어려움이나 이보다 더한 고난이 온다 해도 두렵지 않았고 이러한 가족들과 우리 군인들을 위해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다른 가족들은 한해에 돼지를 두마리씩 길러내는 집도 있었는데 우리 집 돼지는 야속하리만큼 무게가 나가지 않았다. 한해에 돼지 한마리 50㎏, 개 한마리 10㎏, 토끼 10마리 30㎏ 정도밖에 더는 능력이 안되는것 같았다. 어떤 가족은 한해에 1t의 고기생산을 하여 부대군인들의 식생활에 큰 기여를 해서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거기에 비하면 너무 부끄럽지만 내가 군인들의 친누이가 되여 진정으로 그들에게 무엇인가 도움이 되였다는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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