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인공노할 야수적만행 (평양 6월 15일발 조선중앙통신)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05회 작성일 22-06-15 12:49

본문

 

 

천인공노할 야수적만행

 

(평양 6월 15일발 조선중앙통신)

15일부 《민주조선》에 실린 개인필명의 글 《천인공노할 야수적만행》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일제가 조선인민의 6.10만세시위투쟁을 야수적으로 탄압한 때로부터 9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거의 한세기가 흘렀으나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는 오늘도 《조선독립 만세!》,《일본군대는 물러가라!》고 웨치는 조선인민을 총칼로 무자비하게 탄압하던 일제군경들의 야수적만행이 그대로 새겨져있다.

1920년대로 말하면 일제가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조선사람들의 언론,출판,결사 등의 《자유》와 《조선민족의 정치참여》에 대하여 요란스레 떠들던 때였다.

그러나 이것은 3.1인민봉기를 통하여 총칼의 위협만으로는 조선인민의 반일기세를 억누를수 없다는것을 알게 된 일제가 꾸며낸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 《문화통치》의 간판밑에서 일제는 조선인민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더욱 강화하였다.이것은 조선인민의 분노를 증대시켰다.

이런 속에서 1926년 6월 10일 경성에서는 조선봉건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시위투쟁이 힘차게 벌어졌다.이날 아침 청년학생들이 격문을 뿌리며 시위투쟁을 벌렸고 수많은 군중들은 이에 호응하여 《조선독립 만세!》,《일본군대는 물러가라!》,《조선독립운동자들은 단결하라!》는 구호를 웨치면서 대중적인 시위를 벌렸다.

순종황제의 사망을 계기로 조선인민의 새로운 반일투쟁이 폭발할것을 우려하여 미리 본토에서까지 무력을 끌어들이며 발광하던 일제는 시위투쟁이 시작되자 피를 본 야수마냥 미쳐날뛰며 총칼을 휘둘렀다.

장례행렬이 창덕궁을 떠나 관수교를 지날 때 이곳에 모여있던 청년학생 수십명이 격문을 뿌리며 격렬한 시위투쟁을 벌리자 일제경찰과 기마경찰대들은 그들을 마구 체포해갔다.종로거리에서도 사람들이 시위에 나서자 수십명을 체포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의 폭압만행은 조선사람들의 의기를 꺾은것이 아니라 분노만을 활화산처럼 폭발시켰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떨쳐나서자 일제는 시위대렬을 강제로 해산시키려고 발악하였으며 사람들에게 야수적인 폭행을 가하였다.이 과정에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악랄한 일제는 체포한 사람들을 짐승도 낯을 붉힐 방법으로 악착하게 고문하다가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이렇듯 6.10만세시위투쟁에 대한 악랄한 탄압책동으로 일제는 언론,출판,집회,시위의 《자유》를 떠들며 요란스럽게 표방하던 《문화통치》의 내막을 스스로 폭로하였다.결국 일제가 비단보자기를 씌워놓고 선전하던 《문화통치》는 조선인민의 초보적인 정치적권리도 인정하지 않는 야만적인 파쑈통치체제라는것이 더욱 적라라하게 드러났다.

악랄한 일제는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문화통치》의 허울마저 집어던지고 조선민족탄압에 광분하였다.

그 나날 일제의 총칼에 피흘리며 쓰러진 조선사람은 그 얼마였던가.

정녕 대를 이어가며 속죄해도 그 죄를 다 면할수 없으련만 일본반동들은 사죄와 배상은커녕 저들의 과거죄악을 전면부정하면서 오히려 력사외곡에 미쳐날뛰고있다.

미화분식한다고 달라지고 외곡한다고 가리워지는것이 력사가 아니다.

일본반동들은 명심해야 한다.

오늘의 조선민족은 침략자들의 총칼앞에 맨주먹으로 맞서던 어제날의 약소민족이 아니다.

저들의 과거죄악을 가리워보려고 력사외곡에 매여달릴수록 죄악은 더욱 커질것이며 조선인민의 철추는 더욱 무자비해질것이다.(끝)

www.kcna.kp (주체111.6.15.) 

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2016-2017 KCNCC(Korean Canada National Coordinating Council). All rights reserved

E-mail : kcncc1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