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제 43회 제2권 6장 시련의 해 - 5. 단합의 리념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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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08회 작성일 22-08-13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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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9.18사변후 이 일대의 혁명조직들은 적의 백색테로에 의해 혹심하게 파괴되였다... 첫번째 문제점은 9.18사변과 함께 급속히 만연되기 시작한 패배주의적경향이였다.​  (중략) 나는 테로에 테로로 대답하는것이 왜 온당치 못한 처사로 되며 혁명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망동으로 되는가 하는데 대하여 장시간 설명하지 않을수 없었다...  《국민부와의 충돌은 어떤 형태의것이든지 백해무익하다. 반일을 지향하는 동족사이에 류혈은 있을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된다. 왕청문에서 6명의 동지를 억울하게 잃고도 피눈물을 머금고 참아온 우리가 아닌가. 매사에 심중하며 경거망동하지 말것이다..​..  독립군의 상층은 아직 우리와의 통합을 달가와하지 않았지만 하층병사들은 대결이 아니라 합작을 하고 힘을 합쳐 같이 싸워야 한다는것을 피부로 느끼고 기꺼이 우리와 손을 잡게 되였다. 이것은 독립군과의 통합의 첫 시작이였다. (편집료약 / 재카나다조선인동포전국련합회)

 

5. 단합의 리념아래

 

부대는 류하를 향해 행군을 다그치였다. 류하는 남만일대에서 흥경, 통화, 화전, 반석과 더불어 조선독립운동의 중요한 책원지의 하나로 널리 알려진 고장이다. 이 지방에는 구세대의 독립운동자들과 함께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새 세대의 투사들도 많았다. 우리 나라 독립운동력사에서 첫 무관학교로 널리 소개되였던 신흥강습소도 남만의 류하현에 속한 하니하라는 곳에서 설립되였다.

우리가 류하를 행군로정의 하나의 목표로 정한것은 이 일대에서 반일인민유격대의 군중적지반을 넓히기 위한 정치공작을 본격적으로 벌리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류하뿐아니라 삼원포, 고산자, 해룡, 몽강 등 안도까지의 귀환로정에 있는 지방들에서 군중을 혁명화하기 위한 작업과 함께 유격대의 대오를 확대하기 위한 활동을 맹렬하게 벌리려고 결심하였다. 남만으로 원정의 길을 택할 때 우리가 설정했던 전략의 한 측면도 여기에 있었다.

원정부대는 먼저 삼원포, 고산자, 류하, 해룡 등지에 머물러 혁명조직들과의 사업을 하였다.

9.18사변후 이 일대의 혁명조직들은 적의 백색테로에 의해 혹심하게 파괴되였다.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이 여러해동안 피와 땀을 바쳐 꾸려놓은 조직들이 대부분 파괴되거나 해체되였다. 성원전원이 잡혀가거나 학살되여 도저히 재생할수 없는 조직들도 있었다.

9.18사변의 여파가 제일 심하게 미친곳은 해룡지방이였다. 해룡에는 일본령사관이 있어 적들의 마수가 다른 고장보다 더 깊숙이 뻗어있었다. 조직선을 찾으려고 안타깝게 모대기는 사람들이 어느 고장에나 다 있었다.

나는 우리가 체류하는 모든곳에서 첫 당조직을 모체로 확대된 기층당조직성원들과 공청, 반제청년동맹의 핵심들, 농민동맹, 반일부녀회, 소년탐험대의 책임자들을 만나 매개 조직들의 활동정형을 료해하고 당면한 혁명임무와 투쟁과업을 토의하였다. 그 과정에 이 지방 혁명조직성원들의 동향과 사고방식에서 스쳐지나서는 안될 몇가지 문제점들이 있다는것을 포착하게 되였다.

첫번째 문제점은 9.18사변과 함께 급속히 만연되기 시작한 패배주의적경향이였다.

그런 경향은 우선 일본이 만주까지 먹었으니 이제는 만사가 다되였다고 생각하는데서 표현되였다. 일본은 세계에서 땅덩어리가 제일 큰 로씨야도 타승하고 청나라도 격파하였다, 지금은 만주에 이어 중국본토까지 먹어보겠다고 혀를 날름거리고있다, 미국군대와 영국군대가 얼마나 강한지는 알수 없지만 아마 일본군대한테는 견디지 못할것이다, 자칫하면 일본이 세계를 정복할수도 있겠는데 이런 판국에서 조선독립을 기다리는것은 부지하세월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청일, 로일 두 전쟁을 통해 생겨 난 일본군에 대한 환상은 이무렵에 와서 더 더 크게 조장되고 전파되였다.

조선민족자체의 힘으로 일제를 타승할수 있다고 말하는것은 지상공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이런 견해가 발전하면 싸워서 이기지도 못할바에야 혁명은 해서 무엇하겠느냐 하는 투항주의로까지 굴러떨어질수 있었다.

패배주의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인민을 묶어세울수도 없었고 광범한 애국력량을 혁명에 동원시킬수도 없었다.

우리는 부대내에서 정치실무적으로 준비된 대원들과 지휘관들을 선발하여 9.18사변과 조선혁명의 전도라는 주제를 가지고 군중들속에 들어가서 강연도 하고 해설담화도 하게 하였다.

대중이 제일 큰 관심을 가지고 청취하는것은 항일무장투쟁에 관한 소식이였다. 그들은 항일유격대의 규모와 전략전술적원칙에 대하여 특별한 호기심을 품고있었다. 류가분방인민들앞에서 하던 나의 연설이 또다시 재현되고 박수갈채가 터져올랐다.

우리의 강연이나 담화가운데서 가장 인기가 있는 화제거리는 안도ㅡ무송현경 전투담이였다. 광대한 만주대륙을 일거에 집어삼키고 《만주국》까지 조작해낸 일본의 전승결과에 비한다면 1개 중대의 적을 소멸한 전과는 사실 대비조차 할수 없는 미미한것이였다. 그런데 군중은 이 전투담을 제일 흥미있게 경청하였다. 일본이 만주의 통치자로 군림할 때에 방금 첫발을 뗀 청소한 반일인민유격대가 백주에 로상에서 왜군 1개 중대를 섬멸하였다는 소식은 사람들을 그렇게까지 경탄시켰던것이다.

사람들은 전투과정의 매 세부, 지어는 아군의 돌격앞에서 저항을 포기하고 달아나던 순간의 적군의 구체적인 패주상까지도 죄다 알고싶어하였으며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끝없는 질문을 들이대였다. 우리는 한장소에서 꼭같은 전투세부를 두번, 세번 되풀이해서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안되였다.

나는 안도ㅡ무송현경전투결과에 대한 사람들의 반향을 종합하면서 대중에게 우리 민족자체의 힘으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수 있는 신심을 주자면 말보다도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하며 실전을 통하여 유격대의 위력을 보여주는것이 중요하다는것을 다시한번 확신할수 있게 되였다.

군중의 동향에서 제기되는 다른 하나의 문제점은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을 배경으로 하여 적지 않은 청년들속에서 무장투쟁을 절대시하고 지하혁명활동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것이였다. 그들은 적이 땅크와 대포와 비행기를 가지고 막 짓뭉개대는 때에 밤낮 모여앉아서 회의나 하고 말공부나 하고 삐라나 뿌리면 뭘하는가, 총을 들고 일어나 왜놈들을 한놈이라도 잡아서 제껴야 소득이 있지 지하활동 같은것이나 해가지고서는 어림도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면서 조직생활을 경시하고있었다.

그들은 무장투쟁도 조직생활을 통해 육성된 핵심들에 의해 수행되며 조직이라는 거대한 저수지가 없이는 무장대오도 조직할수 없고 더우기는 그 대렬을 늘여나가는것도 불가능하다는것을 모르고있었다. 이것도 역시 9.18사변이 만들어놓은 좌익소아병적인 후유증이라고 할수 있었다.

항일유격대의 저수지가 조직이고 조직을 떠난 혁명투쟁이란 론할수도 없고 성립될수도 없으며 조직들이 활동하지 않으면 혁명이라는 거대한 유기체의 생명이 끝장난다는 리치를 대중에게 인식시키는것은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였다. 우리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만주각지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하고 무력에 의한 항전을 개시할수 있은것은 전적으로 지난 기간 혁명군중이 조직활동을 잘해온 덕택이라는것을 설득력있게 해설해주었다.

남만지방인민들의 동향에서 제기되는 또 다른 하나의 문제점은 국민부의 테로에 테로로써 대답하려는 경향이였다. 그 당시 국민부반동들은 남만지방에서 공산주의자들과 방향전환을 시도하는 혁신파민족주의자들에 대한 테로를 강화하고있었다.

류하지방의 공청원들과 반제청년동맹원들은 테로를 밥먹듯 하는 국민부우파들과 결사적으로 대결해야겠다고 주장하였다. 국민부의 테로에 테로로 대답하는것이 왜 유해로운가 하는 우리의 론거를 그들은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테로를 힘으로 제압하지 않고 수수방관하면 그것은 테로를 조장하는 결과만 가져온다는것이였다.

나는 테로에 테로로 대답하는것이 왜 온당치 못한 처사로 되며 혁명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망동으로 되는가 하는데 대하여 장시간 설명하지 않을수 없었다.

국민부가 애국자들을 학살한것은 물론 천추를 두고도 씻을수 없는 대죄이며 동족의 손에 훌륭한 애국자들을 잃는것은 그 어디에도 하소연할곳 없는 우리모두의 비극이다. 국민부는 이 죄악으로 하여 우리 민족과 후손들로부터 두고두고 저주를 받을것이다. 국민부를 살인백정의 집단으로 락인하고 복수를 다짐해나선 동무들의 심정은 물론 나도 리해할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복수의 칼을 벼리기전에 이런 불상사가 어떻게 되여 일어나는가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국민부가 민족주의우파의 소굴로 전락되였다고 하여 거기에 망라된 성원들을 다 나쁜놈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문제는 일제가 국민부를 반동화할 목적밑에 앞잡이들을 파견하여 부단한 와해작전을 벌리는데 있다. 그들은 국민부내의 신흥세력인 혁신파에 주목을 돌리면서 그 내부의 분렬대립을 교묘하게 조장시켜왔다. 우리가 테로로써 국민부를 타도한다면 좋아할것은 일제놈들뿐이며 리득을 볼것도 일제놈들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민부의 반동화된 상층을 고립시키면서 거기에 잠입한 일제의 앞잡이들을 색출해내고 적들의 음모를 폭로해야 한다. 민족재생의 담보가 단합에 있다는것을 모두가 잊지 말자.

내가 이런 내용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자 청년들은 알만하다고 하면서 고개들을 끄덕거리였다.

우리는 이런 경향들을 바로잡아주면서 남만의 동무들에게 파괴된 혁명조직들을 시급히 복구정비하고 그 두리에 대중들을 더 많이 묶어세울데 대한 과업, 핵심들을 육성하여 무장대오에 보내줄데 대한 과업, 실천투쟁속에서 검증된 로동자, 농민출신의 청년공산주의자들로 당조직을 확대해나갈데 대한 과업, 중국인반일부대들과의 사업을 강화할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우리가 삼원포, 고산자, 류하, 해룡일대에 머무르고있을 때 많은 청년들이 자원하여 우리부대에 입대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남만지방에서 벌린 적극적인 정치활동의 총화라고 할수 있었다.

류하지방의 혁명운동을 앙양시키는데서 걸린 고리들을 풀자면 최창걸을 비롯하여 이 일대에 파견되여 활동하는 첫 당조직성원들과 공청핵심들의 역할을 높여야 하였다. 우리가 한해전부터 련계가 두절된 최창걸의 행방을 찾으려고 그처럼 애쓴 리유도 거기에 있었다. 최창걸을 만나면 일제의 만주강점이 현실로 되고 무장투쟁이 개시된 새로운 환경에 맞게 남만지방에서 혁명을 어떻게 심화발전시키겠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심각한 론의를 할수 있으며 그에게 구체적인 사업방향을 제시해줄수 있었다. 최창걸은 남만지방에 파견된 우리의 대표나 다름없었다.

류하는 《ㅌ.ㄷ》의 결정에 따라 그가 활동한 구역이였고 그와 여러가지로 깊은 인연을 맺고있던 고장이였다. 최창걸은 독립군생활도 거기서 시작하였고 화성의숙에 입학할 때에도 거기서 량세봉의 추천을 받았다.

화성의숙이 페교된후 최창걸은 출신중대에 돌아가 독립군참사로 복무하면서 류하지방을 중심으로 남부만주의 광활한 지역에 《ㅌ.ㄷ》의 판도를 넓히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 바치였다. 그는 류하에서 활동할 때 금천현성에 있는 일본령사관 분관을 습격하는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류하와 흥경을 비롯한 남부만주일대에서 《ㅌ.ㄷ》의 대오가 빠른 속도로 확대될수 있었던것은 김혁, 차광수의 적극적인 노력과 함께 이 지구의 주인이라고 할수 있는 최창걸의 눈부신 투쟁과 능숙하고 세련된 사업전개능력에도 기인된다. 그는 새 사조의 출입금지구역이라고 말할수 있는 독립군들속에 들어가 생활하면서도 자기가 공산주의자라는것을 숨기지 않았을뿐아니라 오히려 진보적인 독립군대원들속에서 의식화작업을 주동적으로 하여 그들중 적지 않은 사람들을 공산주의신봉자로 개조하였다. 최창걸이 사람들과의 사업을 얼마나 통이 크고 대담하게 하였던지 그를 통솔하던 지휘관은 심지어 그가 주둔구역으로부터 10리나 떨어진곳에 가서 몇달씩 정치공작을 하여도 상급에 보고하지 않고 눈을 감아주었다.

류하는 종파분자들과 반공모략에 이골이 난 민족주의보수파분자들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고있던곳이였다. 엠엘파분자들은 반석현에서 주민회라는 단체를 만들어내여 남만의 민족주의단체들과 대결하였고 혁신파와 보수파의 대립으로 분렬직전에 있던 독립군내에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일부 좌파인물들은 화요파, 서상파와 손을 잡고 민족단일전선조직을 서두르고있었다.

현묵관, 고이허를 위시한 보수파인물들은 공산주의사조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반동공세를 벌리였다.

이런 복잡한 분위기속에서 촤창걸은 류하지구에 반제청년동맹을 조직하고 그 대렬을 급속도로 늘여나갔다.

종파분자들은 주중청총이 중국에 있는 조선청년들의 유일한 조직인데 류하반제청년동맹이라는것은 또 무슨 단체인가고 하면서 트집을 걸었다. 엠엘계의 종파분자들은 류하반제청년동맹내부를 와해시킬 목적으로 이색분자들도 잠입시키였다. 그들은 반석지방으로부터 수십명의 청년들을 끌어들여 다니거우에 집결시키고 몽치단이라는 테로단을 무은 다음 삼원포에서 독립군이 반란을 꾸미고있다는 거짓정보를 제공하고는 경찰과 련합하여 반제청년동맹간부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망동까지 부리였다.

그때 최창걸은 그들의 추태를 저지시키고 동맹의 핵심들을 폭행속에서 구원해주었다.

최창걸은 종파분자들의 도발에 군사적방법으로 보복하지 않았다. 그는 원래 사람들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는데서 대범한 성미를 지니고있었다. 후에 카륜에서 나를 만난 최창걸은 종파쟁이들의 곤장에 살을 찢기고 피를 토하는 반제청년동맹원들을 보면서도 자기가 총탄을 발사하지 않고 리성을 발휘할수 있은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류하로 갈 때 제일 기뻐한것은 차광수였다. 그는 최창걸과의 상봉을 눈앞에 그리면서 어린애들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최창걸과 마찬가지로 차광수도 류하와는 범상치 않은 인연을 맺고있었다. 최창걸이 량세봉의 수하에서 륙혈포를 차고 돌아다닐 때 차광수는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였다. 그때 그들은 서로 뜻이 맞아 동지로 되였다.

《이 최창걸이가 눈은 높은 사람이지만 첫눈에 차광수한테 반했드랬소. 겉보기는 덜렁광창인데 속은 온통 노다지더란 말이요. 저 친구 머리속에는 칼, 맑스가 여라문명 올방자를 틀고 앉아있소.》

언제인가 최창걸은 차광수와의 첫 교우를 회상하면서 이런 롱을 하였다.

《최창걸이가 만일 아가씨라면 저 덜렁광창을 제일 선참 랑군님으로 삼겠소. 그런데 길림의 아가씨들은 모두 소경들이 된 모양이거든.》

차광수는 그 롱을 들으면서 씨물씨물 웃기만 하였다.

길림시절의 차광수는 그때까지만 해도 총각이였다. 그래서 최창걸은 늘 차광수의 중매는 자기가 선다고 하였으며 덜렁광창이 말을 타고 새각시네 집으로 가는 날에는 견마잡이도 자기가 한다고 희떠운 소리를 하였다.

마주서기만 하면 나는 형님이고 너는 동생이니 형님대접을 잘하라는 식으로 허물없는 롱질과 입씨름에 열을 올리군하는 두 사람이였지만 그들의 우정은 참으로 만사람이 부러워하고 시샘을 느끼리만치 친밀하고 열정적인것이였다.

그 우정은 류하와 흥경, 철령일대를 중심으로 공청과 반제청년동맹대렬을 확대해나가던 나날들에 더 깊어졌다고 말할수 있다. 최창걸은 차광수와 함께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고산자지부도 결성하였으며 왕청문을 중심으로 흥경현, 류하현, 반석현을 비롯한 남만의 여러 현들에 사회과학연구회라는 명칭을 가진 계몽단체들도 조직하였다.

사회과학연구회는 맑스ㅡ레닌주의와 조선혁명의 지도리론을 연구보급하는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삼고있었다. 그 운영방법은 지금의 통신대학체계와 비슷하였다. 1년에 보름가량은 농한기를 택하여 청년들을 불러다가 강의를 해주었으며 나머지 시간에는 몇달에 한번씩 이동강의도 해주고 필요한 학습교재들을 보내주는 방법으로 회원들을 계몽시키였다.

사회과학연구회 성원들은 참고서를 놓고 강의에서 받은 내용을 자체로 학습한 다음 한주일에 한번 정도 모여앉아 토론회를 가지였으며 리해하기 힘든 문제들이 있으면 서면질의응답의 방법으로 배운 지식을 완전히 소화하였다.

남만청총대회가 소집되던 그해 가을에 류하에서 사회과학연구회의 활동에 대한 차광수의 설명을 들은 나는 그 운영방법의 독창성과 참신성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으며 이 연구회를 이끌어나가는 세 전우(최창걸, 차광수, 김혁)를 통이 크고 창조성이 높은 사람들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들이 실천속에서 창조해낸 운영방법은 어려운 지하투쟁의 조건에서도 머리를 잘 쓰면 청년들을 시대의 선각자, 력사의 개척자로 훌륭히 교양해낼수 있다는것을 보여주었다.

미구에 있게 될 최창걸과의 상봉을 눈앞에 그리며 삼원포방향으로 행군대오를 인솔해가는 내 가슴도 차광수 못지 않게 울렁거리였다.

카륜에서 첫 당조직을 뭇고 그와 헤여진것도 만 2년이 되여오고있었다. 그동안 최창걸은 류하, 흥경, 해룡, 청원, 반석을 비롯한 남만의 광대한 지역들에서 당조직들을 내오고 각종 대중단체들을 확대하며 조선혁명군의 한개 대를 지휘하면서 상비적인 혁명무력건설에 필요한 인적, 물적준비를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1931년 봄에는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를 동방혁명군으로 개칭하고 그 지휘관이 되였다. 나에게 이 소식을 전해준 최창걸의 련락원은 그가 국민부반동파와의 알륵때문에 고심한다고 말하였다.

그후로는 류하와의 련락도 두절되였다. 나는 이것이 은근히 불안스러웠다. 내가 불안해하는것은 그가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아무데나 텀벙텀벙 내대는 타고난 모험가이고 락천가라는 거기에만 있지 않았다. 그는 테로를 만능의 수단으로 삼기 시작한 국민부의 테두리안에서 그 반동파들의 주시를 받으며 활동하는 공산주의자였다. 국민부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요시찰대상에 속한 인물이라고 할수 있었다.

왕청문사건이 있었던 그해말에 국민부반동들은 최창걸, 최득형을 비롯한 6명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하여 대우구라는곳에서 처형하려고 하였다. 이 사건은 력사에 류하사변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였다.

새 사상을 지향하는 국민부내부의 혁신세력은 이 사건을 계기로 반동파에 대한 비난의 도수를 높이였다. 피해자인 최창걸자신은 파시스트화된 국민부상층에 대한 복수를 한다고 하면서 이를 갈았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류하지방에 박근원을 보내여 아래와 같은 내용의 서신을 전달하게 하였다.

《국민부와의 충돌은 어떤 형태의것이든지 백해무익하다.

반일을 지향하는 동족사이에 류혈은 있을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된다. 왕청문에서 6명의 동지를 억울하게 잃고도 피눈물을 머금고 참아온 우리가 아닌가. 매사에 심중하며 경거망동하지 말것이다.》

류하사변이 있은 후 국민부는 1930년 8월에 있은 조선혁명당 집행위원회와 대표회의를 계기로 두개의 진영으로 분렬되였다. 현묵관, 량세봉, 고이허, 김문거, 량하산 등이 기존방침의 고수를 완고하게 주장하고 그 실현을 강요해나선데 대항하여 고원암, 김석하, 리진탁, 리웅, 현하죽, 리관린 등의 소장파인물들은 조선혁명당을 인민의 의사와 배치되는 파시스트적인 정당으로 락인하고 그를 해체하여 무산자들을 대표하는 계급혁명의 전위로 되게 하는 동시에 재만조선농민들을 계급적으로 령도해야 한다는 혁신적이고 방향전환적인 주장을 하였다.

이와 같은 리념상의 알륵으로부터 두 파는 서로 상대방을 타도하고 매장하기 위한 피투성이싸움을 벌리였다.

국민부파는 봉천성정부의 량해밑에 중국관헌들과 군경들까지 매수리용하여 반국민부파를 숙청하는 테로전에 달라붙었다. 그 과정에 그들은 리진탁을 비롯한 5명의 상대편 인물들을 암살하였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반국민부파도 국민부본부를 습격하여 4중대장인 김문거를 총살하였다. 그후 반국민부파는 탈퇴성명을 내고 국민부타도를 목적으로 하는 반국민부위원회라는 단체까지 만들어내였다.

최창걸의 신변에 대한 나의 걱정은 이런 정치적배경에 바탕을 둔것이다. 삼원포로부터 한마장쯤 떨어진곳에서 나는 행군대오에 속보로 걸으라는 구령을 내리였다. 최창걸을 한시바삐 만나보고싶은 조바심이 우리의 발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러나 삼원포에 도착하여 최창걸의 소식을 들은 우리는 아연실색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고장 조직원들이 그가 희생되였다는 비보를 우리에게 전해주었던것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최창걸은 고산자공청지부의 사업을 지도하다가 국민부 우파놈들에게 체포되여 종적을 감추었다는것이였다. 반일인민유격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를 찾아온 삼원포공청지부의 박가성을 가진 청년도 그와 비슷한 소리를 하였다. 그는 국민부테로분자들이 최창걸을 금천현 강가점에 유인해다가 학살하고는 공산당밀정이기때문에 처단했다는 여론을 퍼뜨렸다고 하였다. 어떤 청년들은 최창걸이 해룡ㅡ청원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활동하다가 피살되였다고도 하였다.

이렇든저렇든 최창걸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것만은 틀림없는것 같았다.

나는 너무나 분해서 말도 할수 없었고 눈물도 흘릴수 없었다.

언제나 한모습으로 변함없이 열에 끓고 정에 넘치던 《ㅌ.ㄷ》의 건아가 어쩌면 그렇게도 속절없이 우리곁을 떠날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안도ㅡ무송현경의 이름없는 한 릉선에서 맛본 슬픔에 뒤이어 우리의 마음속으로 무자비하게 기습해온 또 하나의 커다란 슬픔이였다.

무장투쟁이 력사무대에 군복을 입은 반일인민유격대의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그 총성이 만주의 광막한 대륙에 새로운 시대의 서곡으로 높이 울리고있던 격동적인 나날에 최창걸과 같이 충실한 전우가 희생된것은 우리 혁명을 위해서 정녕 가슴아픈 손실이 아닐수 없었다.

차광수도 내옆에 앉아 폭양속에 시들어가는 풀밭을 눈물로 적시고있었다.

나는 최창걸의 유가족들을 만나고싶어 부대를 데리고 고산자로 향하였다. 최창걸의 부인은 걸음마도 떼지 못하는 사내아이와 시동생과 함께 우리를 맞이하였다. 그 부인이 참으로 강의한 녀자였다. 그 녀자는 우리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에게 남편의 소원이 총을 잡고 왜놈들과 싸우는것이였는데 그 남편을 대신하여 자기가 싸울수 있도록 유격대에 받아달라고 청원하였다.

우리는 예정을 바꾸어 유가족들의 곁에서 하루밤을 묵었다.

다음날 아침 부대가 고산자마을을 떠날 때 최창걸의 미망인은 멀리까지 우리를 따라나와  바래주었다.

나는 무슨 말로 녀인을 위로했으면 좋을지 몰라 아이를 안아들고 그 애의 볼을 다독여주었다. 이가 두개밖에 나오지 않은 사내애는 신통히도 아버지를 닮았다. 아이는 나의 얼굴을 만지면서 《아빠》,《아빠》하였다. 그 광경을 보고 애어머니가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였다. 나도 눈굽이 저려올라 아이의 볼에 볼을 대고 한참동안 고산자마을쪽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아주머니, 이 애를 잘 키워 아버지의 뒤를 잇게 합시다!》

나는 목이 메여 그보다 더 긴 말을 할수가 없었다.

부대가 고산자를 떠나서 5리쯤 왔을 때 우리가 너무도 침통해하는것을 보고 김일룡은 최창걸을 추모하여 조총을 울리자고 제기하였다. 조총이라도 울리면 우리의 기분이 좀 전환되지 않겠는가 하는 타산을 한 모양이였다. 역시 풍상고초를 많이 겪어본 김일룡의 속마음이 웅심깊은데가 있었다.

《소문만 듣고서는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고싶지 않습니다. 시신도 보지 못하고 어떻게 조총부터 울리겠습니까.》

몽강을 거쳐 량강구에 도착한 우리는 거기서 놀라운 정보를 입수하였다. 무송지방에 은거하고있던 20명가량의 독립군이 70~80명으로 구성된 중국인무장부대와 합세하여 우리 부대를 습격하고 무장을 해제할 음모를 꾸미고있다는것이였다. 이 음모의 기안자가 바로 국민부산하의 독립군이였다. 그들은 몽강에서부터 량강구방향으로 이동하는 반일인민유격대의 행군로정을 내탐한 다음 중국인반일부대에 우리 부대가 공산군주력부대라는것을 련락하였다. 독립군은 중국인반일부대와 함께 반일인민유격대가 통과하게 될 마을을 미리 차지하고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

우리에게 이 정보를 제공한것은 량강구에 있는 공청원들이였다. 그곳에는 내가 아는 조직원들과 청년들이 많았다. 우리가 량강구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이 나에게 이 내막을 알려주었다.

유격대원들속에서 국민부테로분자들을 타도하고 최창걸의 복수를 하자는 목소리가 폭발적으로 터져나온것이 바로 그때였다. 류하의 청년들이 국민부의 테로분자들을 요정내고 남만청총대회때 괴모산골짜기에서 학살된 6렬사의 원쑤, 최창걸의 원쑤를 갚아야 한다고 부르짖을 때만 하여도 나와 목소리를 합쳐 그들을 달래던 동무들까지 지휘부로 찾아와 우리의 자제력에도 한도가 있지 않느냐고 하면서 한번 싸움을 본때있게 하여 버릇을 떼주자고 하였다. 그런데 버릇을 떼준다는것도 말은 쉽지만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였다. 우선 력량상으로 볼 때에도 상대는 우리보다 더 우세하였다.

그러나 이런 대비는 큰 문제로 되지 않았다. 제일 난처한것은 상대가 적아닌 적이라는것이였다. 항일구국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싸우는 무장부대들끼리 서로 맞총질을 한다는것은 사실상 1930년대 초기의 혼란된 시국만이 만들어낼수 있는 일종의 만화라고밖에는 달리 말할수가 없었다. 반일인민유격대와 독립군이 동족상잔을 한다는것도 우스운 일이였지만 중국인반일부대와 독립군이 합작하여 반일인민유격대를 공격한다는것도 괴이한 일이였다.

싸움을 하면 물론 승패는 갈라질것이였다. 하지만 이런 류의 싸움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다 도덕적인 규탄을 면치 못하는 법이였다. 승자의 목에 걸어 줄 월계관도 있을수 없거니와 패자의 희생을 동정할 눈물도 있을수가 없었다.

중국인무장부대를 잘못 건드려놓으면 우리의 활동에 수습할수 없는 난관이 조성될수 있었다. 모처럼 성사된 구국군과의 공동전선은 깨여지고 우리는 다시 남의 집 뒤골방에서 무기소제나 하며 세월을 보내던 초기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독립군부대를 치는것도 그만 못지 않은 악후과를 낳을수 있었다. 공산군부대가 독립군부대를 치면 인민이 우리를 외면하고 랭대할것이였다. 반공분자들은 좋은 때를 만났다고 공산주의자들을 헐뜯을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결과가 아니였다. 반일인민유격대와 독립군이 서로 총구를 마주대고 혈전을 벌린다는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였다. 그런데 독립군은 송화강 건너편에서 그런 혈전을 준비하고있었다.

1932년 여름을 생각하면 그때의 일이 제일먼저 떠오른다. 그때 나는 밤잠도 자지 못하고 이 맹랑한 문제를 민족단합의 경륜과 항일구국의 대의에 맞게 처리할 방도를 찾느라고 마음을 썩이였다. 그 일때문에 십년은 감수했다고 말할수 있다.

공동의 적인 일본군과는 싸움 한번 변변히 해보지 못하면서도 동족인 우리하고는 금수도 낯을 붉힐 스치스러운 악행을 다하는 국민부군대의 소행에 대해서는 나도 끓어오르는 분노와 혐오를 금할수 없었다. 지휘관들과 상론해보니 그들도 다같이 노기충천하여 국민부파시스트들에게 철추를 내려야 한다고 입을 모아 떠들었다.

《다시는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게 단단히 버르장머리를 떼줍시다. 그들이 죽어서 지하에 가더라도 두번다시 손에 동족의 피를 묻히는 일이 없도록 혼쌀을 내줍시다.》

차광수는 눈에 불꽃을 튕기며 국민부의 손에 쓰러진 동지들의 원한을 갚을 때가 왔다고 부르짖었다.

그러고보면 그 당시 우리를 둘러싸고있던 무장부대들은 어느것이나 다 적인셈이였다. 독립군도 적이고 구국군도 적이고 마적도 홍창회도 대도회도 다 적이였다. 반일인민유격대가 이런 역경에 처하게 된것은 우리 부대가 구국군의 별동대라는것을 보증할수 있는 류본초와 같은 증인이 없는데 있었다. 우리는 류본초를 통해서 부대를 합법화하는데 성공할수 있었지만 류본초와 같이 유력한 증인을 데리고 다니지 않으면 언제나 사면팔방으로부터 공격을 받을수 있는 위험을 걸머지고있었다.

우리가 통화에 갔다오는 사이 우사령부대는 안도에서 철수하여 왕덕림부대와 함께 녕안현일대로 깊숙이 퇴각하였다. 안도는 자유지대로 남아있었다. 자위군은 싸움을 크게 해보지도 못하고 일본군에 속속 투항하였다. 그 당시의 자위군의 일부는 벌써 반만항일의 구호를 내던지고 일본군고문들의 지휘봉에 따라 움직이는 반동군대로 되였다. 중국인반일부대가 공산군주력군으로 알려진 우리 부대를 감히 소멸하려고 결심한것은 그들이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 반동군대로 전락되였기때문이였다.

국민부의 반공선전에 청맹과니가 되다싶이한 독립군의 잔당은 우리에 대한 진속도 모르면서 반동화된 반일부대를 끼고 우리에게 도전을 하려는것이다. 이 문제를 놓고 나는 심각한 사색을 거듭했다. 상대가 아무리 토비화되고 우경화된 군사집단이라고 하여도 한피줄을 나눈 동족이고 또 구국투쟁에 몸을 바치고있던 사람들인것만큼 우리로서는 군사적방법에 의한 보복이나 제재를 추구할수 없었다. 어떻게 하나 그들을 정치적방법으로 설복하여야 하였다. 우리는 이토록 반일통일전선을 절대화하였다.

이렇게 되여 박훈을 책임자로 하는 몇동무가 독립군이 머물고있는 이도백하로 떠나갔다.

《박훈동무, 오늘은 총대신 입이 동무의 무기요. 총은 한방도 쏘지 말고 입으로써 독립군들을 설복해야 하오. 동무는 말주변도 좋고 인상도 씨원씨원한 사람이니 능히 그들을 감화시켜 미연에 족전을 방지할수 있을것이요. 그 어떤 경우에도 무력행사는 절대금물임을 꼭 명심해야 하오. 우리가 여기서 총성을 한방만 울리면 민족주의자들과의 통일전선은 끝장이 날수 있소. 어떻소? 동무의 성미에 맞지 않는 과업인데 꽤 해낼수 있겠소?》

내가 이렇게 묻자 박훈은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거리였다.

《까다로운 과업이긴 하지만 해보겠소.》

나는 박훈을 떠나보낸 다음에도 송화강반을 오래도록 거닐었다. 오늘밤만은 제발 총성이 울리지 말았으면 하고 속으로 빌었다. 박훈이 과연 독립군들을 설복해내겠는가 하는 우려와 걱정도 없지 않았다.

물론 그는 능력있는 선동가였고 수완가였다. 그러나 일단 성만 나면 앞뒤를 가리지 않는 그의 곰같은 성미가 나로 하여금 좀처럼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하였다.

내가 박훈의 그런 약점을 알면서도 그를 독립군의 진영으로 서슴없이 들여보낸것은 우리 부대에 그를 릉가할만한 활동가가 없었기때문이였다.

당시 이 분야에서 박훈과 견줄수 있는 인물은 차광수였다. 정황을 보면 마땅히 그가 한몫할 때였다. 그러나 차광수는 최창걸의 희생에 대한 소식을 접한 때부터 너무나도 큰 충격으로 자기를 다잡지 못하고있었다.

(박훈이, 부디 성공하고 돌아오오!)

나는 마음속으로 이런 말을 거듭 뇌이면서 이도백하쪽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다행히도 내가 우려하던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독립군은 애국력량의 단합을 절절히 호소하는 우리 동무들의 해설에 감화되였다. 그들은 저들 상층부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있으면서도 행동에는 옮기지 못하던 우유부단한 태도를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무장을 바치고 우리 반일인민유격대오에서 같이 싸울것을 흔연히 결의해나섰다.

독립군의 상층은 아직 우리와의 통합을 달가와하지 않았지만 하층병사들은 대결이 아니라 합작을 하고 힘을 합쳐 같이 싸워야 한다는것을 피부로 느끼고 기꺼이 우리와 손을 잡게 되였다. 이것은 독립군과의 통합의 첫 시작이였다.

이렇게 우리는 또 하나의 어려운 고비를 무난하게 넘기였다. 량세봉과의 결렬에다가 최창걸의 희생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덧붙여져 국민부에 대한 증오와 원한이 참을수 없게 되살아오르던 그때 우리가 민족대단합의 경륜을 위해 20대의 젊은이들로서는 쉽지 않은 도량과 인내를 발휘할수 있었던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였다. 만일 그때 우리가 리성을 잃고 복수감에 사로잡혀 국민부를 타도하였거나 독립군대원들과 무장대결을 하였더라면 지금처럼 이렇게 떳떳한 마음으로 후대들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할것이다. 300여명에 달하는 량사령의 부하들이 엄동설한에 합작의 기발을 들고 조선인민혁명군을 찾아오는 력사적화폭도 볼수 없었을것이다.

세상에 애국애족처럼 위대하고 순결하고 신성한 감정은 없다.

민족단합정신은 애국애족의 감정가운데서도 그 정수를 이루는 최고의 넋이라고 말할수 있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민족해방을 위해 출범한 그 첫 기슭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언제 어디서나 민족단합의 리념을 변함없이 소중하게 간직해오고있으며 그것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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