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대의 초가집이 전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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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12(2023)년 4월 3일 《우리 민족끼리》
만경대의 초가집이 전하는 이야기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만경대는 반만년민족사에서 처음으로 맞이하고 높이 모신 어버이수령님께서 탄생하시여 어린시절을 보내신 우리 인민의 마음의 고향이며 세계 혁명적인민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은 태양의 성지, 혁명의 성지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산천은 몰라보게 달라졌지만 만경대고향집은 옛 모습그대로 추녀낮은 초가집이다.
하지만 해방전 이 나라의 어디서나 볼수 있었던 추녀낮은 이 초가집이 원래는 기와집이였다는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선봉건왕조말기에 평양으로 이주하여 4대에 걸쳐 남새농사를 하면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오던 위대한 수령님의 일가분들은 김응우선생님대에 생활이 너무나 쪼들리여 남리 만경대로 이사를 하였다.
오막살이 한칸 마련할 형편이 못되여 하는수없이 지주 리평택이네 묘를 봐주는 대신 산당집을 하나 얻어가지고 온 일가가 산지기와 소작살이를 하게 되였다.
당시까지만 하여도 산당집은 기와를 얹은 조선식팔각집이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해 가을 투전으로 많은 돈을 떼우게 된 리평택의 불량한 자식들이 산지기토지와 산당집을 팔아 돈을 마련하겠다고 하면서 당장 내놓으라고 을러메였다.
온 집안이 한지에 나앉게 되였을 때 증조할머님이신 김씨녀사께서는 자신의 머리채를 솎은 달비도 팔고 길쌈한 천도 팔고 닳아진 통대접까지 다 파시였다. 증조할아버님께서 그 돈에 빚돈을 낸것 등을 합쳐 엽전 17냥을 주고 산당집이나마 유지하게 되였다.
그때 돈이 모자라 지붕에 얹은 기와까지 벗겨 팔다나니 결국 산당집은 초가집이 되고말았다.
해방후 어느해인가 만경대고향집뒤에 2층짜리 양옥집이 세워진적이 있었다.
그무렵 만경대에 자주 나오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모시기 위해 따로 지은 집이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집을 헐어야 하겠다고 하시고는 만경대고향집에 대하여 이야기하시면서 자신께서는 그 집이 제일 좋다고, 해방을 맞아 자신께서 처음으로 늙으신 조부모님을 만나뵈러 그곳 만경대집에 갔을 때에도 조부모님들과 같이 그곳에서 자고왔다고 말씀하시였다.
만경대를 찾으시는 그이를 너무도 수수한 고향집에만 모시는것이 죄스러워 새집을 지어드렸건만 그 집을 허물도록 하시고 그 자재로 인민들의 살림집을 한동이라도 더 지었으면 좋았을것이라고 하신 위대한 수령님,
나라가 해방되였지만 아직 인민들의 살림형편이 어려운것을 두고 늘 마음쓰신 그이이시였기에 자신을 위하여서는 새집은 물론 고향집을 새로 꾸리는것마저도 절대로 승인하지 않으시였다.
유서깊은 만경대초가집에서 조금만 걸어나가면 어제날 오막살이집들이 있던 곳에 현대적인 살림집들이 큰 거리를 이룬 광복거리의 희한한 광경을 볼수 있고 집집에서 울리는 행복의 웃음소리를 들을수 있다.
나날이 번영해가는 우리 공화국의 벅찬 숨결과 더불어 인민들의 살림집은 한해가 다르게 현대적으로 변모되여갔건만 지금도 옛 모습그대로 남아있는 만경대초가집을 보며 우리 인민은 초가집이영의 력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게 하실 의지를 더욱 굳게 가다듬으신 위대한 수령님의 그 심중을 뜨겁게 받아안고있다.
진정 만경대의 초가집은 위대한 수령님의 고매한 인민적풍모를 세세년년 전하며 우리 인민의 마음속에 영원한 혁명의 성지로 길이 빛나고있다.
본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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