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찬근 ③, 빗장을 열고 통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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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봄호수
댓글 0건 조회 5,563회 작성일 16-12-08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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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찬근 ③, 빗장을 열고 통일로

<연재> 류경완의 모래내 일기 - 만남의 집 (37)

류경완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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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0.31  15:3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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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9월 계룡산에서 왼쪽부터 허찬형, 리찬근, 강담, 양원진 선생. [사진 - 류경완]

 

 

  

▲ [사진 - 류경완]

 

 

1951년 5월 단오 전날, 선생은 나태호 동지(후일 출소해서 대전에 정착했다가 작고, 부인과 남매가 현재 가양동에 살고 있다)와 함께 탈출을 결행한다. 거제포로수용소에 온 지 아홉 달 만이었다.

 

철조망과 탐조등으로 둘러쳐진 수용소, 인근 야산에 열 명씩 한 조로 채석 노역을 나갔다가 두 사람은 복귀하는 일행에서 빠져나왔다. 솔숲에 숨어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 밭에 새 천막들이 늘어서 있었다. 당시 수용해야 할 포로들은 17만여 명으로 늘고, 거제 원주민 10만에 원산 등 북에서 배로 실어 나른 피난민들만 20만이었다. (1952년 5월 미군소장을 인질로 잡은 수용소 폭동 당시 철조망 인근 원주민 1,100여 세대는 포로들과 내통, 협조했다는 혐의로 3년간 강제소개를 당한다)

 

뒷산 보리밭에 올라 통영 쪽 어촌을 내려다보니 경계가 삼엄했다. 30분마다 경비선이 순회하는 해안가 짙은 안개 사이로 작은 고깃배가 보였다. 방향을 잡고 내려가다 중턱에서 다시 보니 배가 사라졌다. 돌아가도 어차피 죽을 목숨, 그대로 내려가니 다행히 다른 어선이 있어 무작정 올라타고 진해 쪽으로 노를 저었다.

 

무사히 건너편 해안가에 닿아 밭으로 숨어들다 낫을 든 젊은이들과 마주친다.


“어디 가는 사람들이오?”
“고향 가는 길이외다.”
다행히 또 그냥 지나갔다.

 

섬인지 육지인지도 분간이 안 되는 낯선 길, 개울 참게를 잡아먹고 북두칠성을 보며 계속 걸었다. 민가에 들어가 말린 갈치를 뜯으니 주인이 ‘도둑이야’ 소리쳐 도망친다는 게 하필 지서 앞을 지났다. 수색대의 총소리가 따라왔다. 이튿날 절에서 쌀 한 되를 동냥하고 남강 갈대밭에 은신하니 바로 앞에 멱 감는 여인들 소리가 왁자지껄했다.

 

오후 4시경 환한 대낮에 유유히 도강, 함안 쪽 산을 올랐다. 군당 조직부장이 검색했다.


“누구야?”
“고향 가는 사람이오.”


바로 알아채고는 반갑다고 악수를 청해 왔다. 여기저기서 산사람들이 나타나 인사하는 사이 수색대로 오인한 나태호 동지는 날쌔게 달아났다. 한참을 쫓아가 설명한 후에야 간신히 돌려세울 수 있었다.

 

지리산으로 들어가 이영회 부대와 만나고 도당위원장에게 북으로 보내달라고 했다가 혼이 났다.


“지금 정신이 있소, 없소? 전후방이 따로 없는 상황이오. 함안과 의령의 군당사업을 보장하시오.”

 

의령에 나와 1개 중대 사업으로 군당호위부대에 배속되지만 상황은 열악했다. 세균탄에 의한 열병이 번져 대부분 환자였고 전투를 치를 총도 탄알도 없었다. 그 해 8월 8.15 기념 순회기동투쟁 당시 허찬형 선생이 참가한 생비랑, 삼가지서 전투 총소리도 먼발치에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 2006년 10월 빨치산 추모제에서. 허찬형, 박종린, 손경수, 임방규 선생 등과 함께. [사진제공 - 리찬근]

 


1951년 12월 동계대공세 때 선생은 토벌대에 포위되어 다리에 중상을 입고 다시 체포된다.


의령지법에는 사형대가 있었다. ‘1번부터 20번까지는 사형, 그 뒤는 무기’ 혹은 ‘앞줄 사형 뒷줄 무기’ 하던 시절, 수많은 인민군과 빨치산들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단심제에서 3심제로 바뀌며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던 법정, 판사의 주문이 귀에 들어오지 않아 멍하니 앉아 있으니 주위에서 ‘저 사람은 살았다’고 두런거렸다. 감방으로 돌아오자 간수가 밥 두 덩이를 갖다 주었다.

 

이른 폭설이 내리던 52년 10월 선생은 대구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양화, 성냥공장에 출역하며 유황성냥에 풀칠하던 밀가루를 맛있게 돌려먹곤 했다고 한다. 이후 대전과 목포교도소를 전전했다.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꼭 16년 만인 69년 7월 27일 선생은 대전교도소에서 출소했다. 갱생보호소의 김과장이 가끔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며 호의를 베풀었다. 이듬해 봄 방이라도 얻으라며 그가 준 만원으로 목동사거리 교사의 집에 거처를 마련하지만 사흘 만에 쫓겨난다.

 

68~70년은 인민군 출신에 대한 길거리 지프 납치.실종이 횡행하던 때였다. 황해도 출신으로 인민군에 참전했다 15년을 살고 출소한 노병술 역시 68년 7월경 노상 작업장에 수선도구를 놔 둔 채 실종된 상태였다. 선생은 그 남겨진 연장을 인수해서 신발, 양산 등의 수선일을 시작했다.

 

대전에서 출소해 몰려 살던 10여 명 중 많은 동지들이 70년대 사회안전법으로 다시 구금되었다. 지인 소개로 일곱 살 차 부인 서연이 님을 만나 결혼한 선생은 구금을 면했다. 현재 대전서 살며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중국 벌판을 돌며 싸우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긴 투쟁의 나날, 똑똑한 사람들은 다 죽었지요. 여전히 외세의 지배와 보수의 날조가 천지를 덮고 있지만 감옥이 꽉 차야 터집니다. 남북 간에도 빗장을 열고 들락날락해야 통일의 길이 열리겠지요.”

 

동북 국공내전을 거쳐 인민군으로, 유일하게 거제포로수용소를 탈출해 지리산으로 간 장기수. 여든 넷 정정한 선생의 가슴엔 아직 풀지 못한 이야기들이 산으로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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