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방위군 사건(1)-1951년 초 한국 겨울의 연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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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봄호수
댓글 0건 조회 6,518회 작성일 16-12-28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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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방위군 사건(1)-1951년 초 한국 겨울의 연옥도

<연재> 임영태의 한국현대사 망각과의 투쟁(27)

임영태  |  ytlim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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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27  01: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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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만백성의 해골로 산천을 뒤덮은 사건



1950년 말 중국인민해방군(중국군)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유엔군이 서울을 버리고 떠나야 할 상황이 되었다. 중국군이 처음 조중 국경선을 넘기 시작한 것은 10월 19일, 린뱌오가 지휘하는 제4야전군 제13병단 소속 6개군 18만 명이었다. 11월에는 제13병단을 지원하기 위해 산둥반도에서 만주로 이동한 제3야전군 제9병단 소속 3개군 12만 명이 조중 국경을 넘었다. 중국군은 험준한 산악지대를 이용해 야간 행군을 한 뒤 10월 25경 운산 북방에 등장해 한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의 배후를 차단하고 공격을 감행했다. 한국군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한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추가로 투입된 미8군 제1기병 사단도 패퇴했다. 중국군의 공세에 밀린 미군과 한국군은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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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록강을 건너는 중국인민해방군

그러나 그동안 승승장구하며 기세를 올리던 유엔군은 계속 밀어붙여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으로 11월 24일 총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11월 25일부터 중국군과 북한군의 제2차 합동 반격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고, 26일에는 패배가 분명해졌다. 미공군은 지상전력을 지원하기 위해 융단 폭격을 계속해댔지만 중국군은 끝없이 밀려들었다. 당시 유엔군 총병력은 한국군을 포함해 42만 명 이상(한국군 22만4천명, 미군 17만8천명, 기타 유엔군 2만 명)으로 33만 명(중국군 20만 명-1951년 1월에는 30만 명으로 증강, 인민군 13만 명)의 공산군보다 우세했다.

 

유엔군은 병력뿐만 아니라 화력도 공산군에 비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중국군은 북한 주민의 협조를 받아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쌓은 유격전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1)

 

북한 인민군은 조중 국경과 함경도 지역으로 패주하면서 북한지역 산악지대에 유격대를 심어두었고, 북한 주민들은 미 공군의 폭격을 피해 산으로 숨어들었다. 북한 주민들의 협조와 지원은 유엔군의 우수한 화력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었다. 유엔군은 퇴각하기 시작하였고, 인민군과 중국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 서부전선에서는 12월 6일 평양이 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동부전선에서는 장진호 부근의 유엔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흥남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원산을 비롯한 후방지역이 공산군 제2전선부대에 점령된 상태여서 유엔군은 바다로밖에 철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저 유명한 ‘흥남철수’가 시작되었다. 2차 공세가 일단락되는 12월 25일경 공산군은 38선 이북을 대부분 회복했다. 12월 31일부터 3차 공세에 나선 공산군은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수중에 넣었다. 유엔군은 서울을 초토화시킨 상태에서 황급히 후퇴했다. 이른바 ‘1.4후퇴’다.(2)

 

이처럼 전황이 급변하자 이승만 정부는 만17세에서 40세 미만의 장정들을 제2국민병, 즉 국민방위군으로 편성하여 대구와 부산 등 남부지역으로 이송하도록 했다. 전쟁 초기 북한군의 급습으로 서울시민을 적의 수중에 고스란히 넘겨주었던 경험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한겨울 혹한 속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50만여 명의 국민방위군을 이동시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국민방위군 장정들 가운데 수만 명이 남하하면서 얼어 죽고 굶어죽는 참상이 연출되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행방불명, 동상, 질병 등으로 낙오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살아서 목적지에 도착한 장정들도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거지중의 상거지, 해골들의 행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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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피난민들(1950년 12월 4일 촬영. 이 사진으로 맥스 데스포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한국군에 의한 직접적인 민간인 학살 행위는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은 참상을 연출한 사건이 1951년 초반 겨울에 발생했다. 국민방위군 사건이다. 리영희는 그의 자서전 『역정-나의 청년시대』에서 국민방위군 사건을 두고 “6.25전쟁의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 행위였다. 이승만 정권과 그 지배적 인간들, 그 체제 그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나아가 그는 “얼마나 많은 아버지가, 형제와 오빠가, 아들이 죽어갔는지! 단테의 연옥도, 불교의 지옥도 그럴 수는 없었다. 단테나 석가나 예수가 한국의 1951년 초 겨울의 참상을 보았다면 그들의 지옥을 차라리 천국이라고 수정했을지도 모를 일이다”라고 말했을 지경이다.(3)

 

당시 미군 고문관의 통역장교로 참전하고 있던 청년 리영희는 이 역사의 현장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보려고 필사적으로 뛰었다. 그는 고문관을 앞세우고 온갖 기관과 단체와 창고를 쑤시고 다니면서 가마니․약품․DDT, 겨울바람을 막아줄 종이, 판자 따위를 닥치는 대로 지프에 실어 날랐다. 하지만 그는 “그것으로 몇 사람의 목숨이나 살렸는지는 의심스럽다”고 자책하고 있다. 그에게 이 사건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순진하고 직선적인 정의감에 불타는 애국주의자’로서의 리영희의 첫 의식이 촉발된 것도 “국민방위군의 참상을 목격하면서”였다.(4)

 

또한 성공회대의 한홍구 교수는 “국민방위군 사건은 국가권력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또 다른 학살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사건은 다른 학살사건처럼 방위군 병사들을 총을 들고 죽이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보급품과 식량을 지급하지 않고 횡령해 수만 명을 굶어죽고, 얼어 죽고, 영양실조로 병들어 죽게 한 사실상의 학살사건이다”라고 평가했다.(5)

 

당나라 만당기(晩唐期)(6)의 시인 조송(曹松)은 ‘기해세(己亥歲)’란 시에서 “장수 한 사람이 공을 세우려면 만백성이 백골이 되어한다(一將功成萬骨枯)”(7)며 전쟁으로 인한 백성의 고통을 노래한 바 있다. 전쟁은 자연과 더불어 인간 세상도 파괴한다. 전쟁은 모든 사람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가장 고통받는 것은 힘없는 일반백성, 민중이다. 조송의 시 ‘기해세’에서 말하는 것처럼 전쟁은 ‘만백성의 해골’위에서 진행된다. 국민방위군 사건이야말로 만백성의 해골로 산천을 뒤덮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4후퇴와 국민방위군 조직법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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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방위군의 전신인 대한청년단 결성식(전라남도 지부)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한국 정부는 6․25 전쟁 초기의 쓰라린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국회에서는 국민방위법과 관련하여 다소간 논란이 되었지만 큰 무리없이 통과되었다. 특히 답변에 나선 장경근 국방부차관이 “6.25 당시 군병력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사설단체에 불과한 청년방위대가 후방 예비군의 역할을 맡은 까닭에 잡음과 부작용이 많았다”고 시인하는 등 저자세를 보이자 국회의원들도 쉽게 넘어가 주었다.(8)

 

12월 16일 국회를 통과하고 21일에 공포된 국민방위군 설치법은 현역군인과 경찰, 공무원과 학생을 제외한 17세 이

상 40세 이하의 장정을 제2국민병으로 동원하도록 하였다.(9) 그러면서도 예산계획은 전혀 세우지 않았다. 그럼에도 국회의원도 누구 한 사람 그 문제를 따지고 들지 않았다. 국민방위군 법령에 따라 경남북 일대에 설치할 예정인 51개 교육대에서 이들 국민방위군의 군사훈련을 받도록 결정하였다. 인민군에 의한 징발을 막기 위해 50만여 명의 청장년을 서울 이남으로 후송한다는 계획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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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방위군 주요 간부들. 앞줄 왼쪽부터 윤익헌 부사령관, 박경구 참모장, 김윤근 사령관

법안이 공포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방위군 사령관에 김윤근(金潤根, 준장), 부사령관에 윤익헌(尹益憲, 대령), 참모장에 박경구(朴經九) 등 청년방위대, 대한청년단 간부들을 지휘부로 대거 임명하였다.(10) 사실상 대한청년단 조직을 거의 그대로 국민방위군으로 옮겨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형편이었다.(아래 <표> 참고)

 

청년방위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예비군인 호국군(11)이 해체된 이후인 1949년 11월 초 대한청년단(한청)을 주축으로 창설되었다.

 

 대한청년단은 1948년 10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해방 후 좌우익의 대립과정에서 생겨난 대동청년단(지청천․이성주), 서북청년단(문봉제․김성주), 청년조선총동맹(유진산), 대한독립청년단(서상천․이영), 조선민족청년단(이범석․강인봉)(12) 등 반공청년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해 만든 조직이었다. 대한청년단 단장은 신성모였고, 이승만은 총재였다. 대통령이 총재로 있는 조직이니 사실상 준국가기관이었다.(13)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은 일제시대 지원병 출신으로 전국대회에서 8차례나 우승한 전력을 가진 유명한 씨름꾼이었고 두주불사로도 유명했다.(14) 김윤근은 입으로는 ‘애국, 반공, 군인과 군대의 신성한 의무’를 외쳤지만, “병사들을 개패듯”하는 무지막지한 인간이었다.(15) 그의 학력은 불분명하고(16)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청년연맹,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감찰국장), 청년방위대(대장) 등에서 주요 직책을 경험했으나 군 경력은 전무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승만, 신성모의 총애를 바탕으로 국민방위군 사령관으로 별(준장)까지 달게 되어 벼락출세의 표본이 되었다.(17)

 

<표> 국민방위군사령부 주요 간부(18)

직책

이름

계급

대한청년단 직책

청년방위대 직책

비고

사령관

김윤근

육군준장

단장

사령관

1951. 8.13 사형

부사령관

윤익헌

육군대령

총무국장

경리국장

1951. 8.13 사형

참모장

박경구

육군중령

감찰국장

부사령관

1951.3.3 참모장 임명

인사처장

유지원

육군중령

훈련국장

총무국장

1951.8.2 면관

정보처장

문봉제

-

부단장

-

-

작전처장

이병국

육군소위

선전부장

-

-

군수처장

김희

-

외사부장

-

-

휼병실장

김연근

-

-

의무실장

-

재무실장

강석한

방위중령

경리부장

-

1951. 8.13 사형

후생실장

김두호

육군소위

-

-

-

조달과장

박창원

방위소령

-

-

1951. 8.13 사형

보급과장

박기환

방위중령

-

-

1951. 8.13 사형


국민방위군 사건의 실질적인 주범으로 평가되는 윤익헌은 일제시기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고(19), 해방 후에는 광복청년회,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 등에서 총무국장을 지내며 돈을 관리하였다. 그가 총무국장을 주로 맡은 것은 “돈을 만들어 내는데 그와 맞먹을 사람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기 때문”(20)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재정을 주무르는데 이력이 난 인물이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의 재심재판에서도 심판관들은 “드러난 모든 증거나 정황으로 보아 사령관 김윤근 피고는 횡령 내용을 잘 몰랐던 것 같고, 부사령관 윤익헌 피고가 모든 처리를 한 것으로 심증을 굳히고 있었”(21)다고 할 정도로 국민방위군과 관련된 비리를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다. 그는 조사와 재판 과정에서도 반성하는 기색이 없었고, 시종일관 거침없이 답변하여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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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방위군 사건의 최고책임자인 신성모 국방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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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모 장관의 정치적 책임자인 이승만 대통령

 

 

 

 

 

 

 

 

 

그러나 국민방위군 간부들, 특히 김윤근은 50만 명에 이르는 청장년들의 생명과 교육을 책임진 사령관으로서의 소양과 자질, 책임감은 전혀 갖지 못한 인

물이었다. 김윤근은 기껏해야 한청이나 청년방위대 같은 반공청년단 정도를 거느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국민방위군 사령관이라는 막중한 자리에 앉힘으로써 국민방위군의 비극적 결과는 이미 예고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행정도 정치도 모르는 씨름꾼이었는데 어쩌다 분수에 맞지도 않는 중책을 맡아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23) 따라서 그 책임 소재는 엄밀히 따지자면 그를 방위군 사령관에 임명한 신성모 국방장관과 이승만 대통령에게 있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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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집된 국민방위군

그런데 대한청년단과 청년방위대 간부들이 국민방위군의 요직을 차지한 데는 그 나름의 연유가 있었다. 6․25가 발발하자 대한청년단은 군경의 협조와 지원 아래 준군사조직인 청년방위대를 창설하고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후방 치안과 군사 지원업무를 가로맡았다. 군당국도 청년방위대를 방조하면서 모병업무, 치안 활동 등에 활용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청년방위대는 강제모병과 민폐로 많은 말썽을 빚었다.(25) 그런데도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국민방위법이라는 법적 근거까지 만들어 이들 우익반공청년단체들에게 장정 50만 명의 생명을 맡긴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은 수많은 생명을 책임진 조직이었지만 급조된 때문에 정부는 예산이나 물적 지원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세워놓지 않은 채 장정들의 후방후송을 독촉하였다.(26) 그 때문에 방위사령부는 이들 장정들의 후송과 수용, 교육체계 등을 전혀 갖추지 못한 채 업무를 개시했다. 그러니 문제가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모든 게 개판이었다.(27)

 

2명에 가마니 한 장이 고작

 

국민방위군은 후송 작전부터가 엉망이었다. 옷도 식량도 지급하지 않은 채 ‘도착지 부산’과 같은 식으로 무조건 내몰았다. 정부가 마련한 것이라고는 고작 양곡권 뿐이었다. 장정들의 인솔책임자가 남하하면서 현지 군수나 서장 등에게 급식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하지만 심각한 전란의 과정에서 행정체계는 엉망이어서 거의 마비상태였다. 모두들 먹을 게 없어 굶주리고 있는 전쟁의 와중에 군인도 아닌 일반 장정들, 그것도 타향 사람들의 숙식을 누가 책임지겠는가.(28) 처음 일부는 그래도 밥도 해먹이고 했지만 매일같이 수천 명씩 줄이어 밀려드는 장정들에게 밥을 해줄 식량도 없을 뿐 아니라 그럴 시설과 인력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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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창을 들고 행진하는 국민방위군

국민방위군에 소집된 사람들은 아무리 예비군이라고 하더라도 정부에서 소집했으니 방한복과 식사는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는 그나마 집에서 입고 있던 누더기 옷들도 다 벗어놓고 홑바지 저고리로 집을 나선 장정들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정부는 거기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었다. 이들에게 입힐 옷값을 배정하지 않은 이유가 가관이었다. “현금을 주더라도 방한복 50만 벌을 구할 길이 없는데 예산은 배정해서 무엇하나?”는 것이었다.(29)

 

이에 김희 군수처장과 이병국 작전처장은 “방한복이야 갑자기 조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식량조차 안 준다다니 말이 되느냐”며 따졌다. 하지만 김윤근 사령관은 이들의 불평을 억누르며 호송작전을 빨리 수행하라고 다그쳤다.(30)

 

엄동설한에 단벌로 집을 떠난 장정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지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그 중에는 고향을 떠날 때는 시계도 차고 제법 외투도 입고 담요도 걸머메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두어 달 지나는 동안 모두가 갈아입을 옷도 없어 누더기 한 장 걸친 알거지가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남하하는 동안 속옷에 꿰매어 감춰오던 알량한 돈도 이리저리 뜯기고, 몸에 가진 것이라곤 다 팔아 치워 식량과 바꿔야 했던 것이다. 그래도 굶주림을 피할 수는 없었다. 굶주림과 혹한 속에서 남하하던 장정들은 쓰러져 갔다. ‘죽음의 행진’이 시작된 것이다.(31)

 

남하할 때는 물론이고 교육대에 도착한 뒤에도 병들어 쓰러지면 속수무책이었다. 병실도 없고 의약품도 없었다. 포도당 같은 영양제는 모두 장교들이 돈벌이를 위해 떼먹었다. 방위군 장정들도 약품을 돈을 주고 사야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병들면 꼼짝없이 죽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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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방위군 사건을 다룬 당시의 기사

국민방위군이 해체된 뒤 국방부에서는 공식적으로 피해상황을 발표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제2국민병 68만여 명을 소집하여 질병, 동상 등에 의한 낙오 및 도망자를 제외하고 약 30만 명이 수용되었으며, 사망자는 1,234명이었다.(32) 하지만 38만여 명에 달하는 낙오자의 행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33) 국방부는 1,200여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당시 언론에서는 5만여 명이 사망하였다는 보도가 있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망자가 10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국회의원 서민호는 「국민방위군의옥사건 중간보고」에서 “팔십 퍼센트의 귀환 장정이 노력취업이 불가능하며, 그 중 대다수는 생명을 보존하기 어렵다고 한다”고 보고하면서 “책임자는 할복사죄하라”고 하였다.(34)

 

또한 육군본부 보고에 의하면 2월말까지 남하하다가 행방불명, 동상, 질병 등으로 낙오된 장정이 27만 3천여 명에 이르고,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38만여 명이었다.(35) 중앙일보사의『민족의 증언』에서는 “전대원의 2할 가량이 아사나 병사했을 것으로 추산”하였고,(36) 이승만을 매우 높게 평가하는 유영익 교수조차도 “9만 명가량의 군인이 동사, 아사, 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으로 규정지었을 정도이다.(37)

 

국민방위대원들의 모습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6․25 당시 통역장교로 참전해 그 참상을 직접 목격했던 리영희(李泳禧)는 그의 청년시대의 자전기 『역정』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끌려온 예비병력으로서의 국민방위군의 최종 남하 목적지의 하나가 진주였다. 진주에 주둔한 날부터 그야말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의 국민방위군 청장년들의 행렬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 진주시내외의 각종 학교건물과 운동장은 해골 같은 인간들로 꽉 들어찼다. 인간이 그런 참혹한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느닷없이 끌려나온 그들의 옷은 누더기가 되고, 천리길을 걸어 내려오는 동안에 신발은 해져 맨발로 얼음길을 밟고 있었다. … 인간을, 포로도 아닌 동포를, 이렇게 처참하게 학대할 수 있을까 싶었다. … 중학과 각급 학교 교실에는 가마니도 제대로 없었다. 다 깨어진 창문을 막을 아무것도 지급되지 않았다. … 그들은 내의 한 벌 받은 일이 없었고 꽁보리밥 한 그릇을 몇이서 나누어 먹어야 했다. 교실 안에 수용된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교실이 틈도 없이 채워진 뒤에 다다른 형제들은 엄동설한에 운동장에서 몸에 걸친 것 하나로 밤을 세워야 했다. 누운 채 일어나지 않으면 죽은 것이고, 죽으면 그대로 거적에 씌워지지도 않은 채 끌려나갔다. 시체에 씌워줄 거적이 어디 있단 말인가!”(38)

 

‘죽음의 대열’‘해골의 행렬’

 

남하하는 과정에만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었다. 교육대에 도착한 다음에도 장정들에게 지급된 것은 2명에 한 장씩의 가마니가 고작이었다. 그것을 깔고 덮거나 해서 자라는 것이었다. 잠자리도 전쟁 통에 깨어진 창문을 막을 아무것도 지급되지 않았으나, 그나마 학교 교실 안에라도 수용된 사람은 다행이었다. 교실이 다 채워지면 노천 운동장에서 몸에 걸친 옷 그대로 밤을 세워야 했다. 당시 국민방위군 제8교육대 경리과장(중위)이었던 문학평론가 홍사중(洪思重)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내가 있던 진주교육대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래도 좋은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네 기둥이 멀쩡한 진주여고 교사(校舍)가 있었다. 물론 폭격으로 멀쩡한 유리창이나 문짝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거적으로 바람막이를 해야 했다. 다행이 마루바닥이 그대로 남아있는 교실들도 제법 있었다. 여기에 2명에 1장씩 지급된 거적을 담요와 이불 대신 쓰도록 했다. 이것만으로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50~60의 학생을 수용하던 교실 하나에 1백 50명가량 수용했으니까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내는 게 제일이었다. 덕을 본 것은 이(虱)들 뿐이었다. 진주의 또 한가지 고마운 것은 가까운 곳에 남강이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주일에 한 번꼴로 날씨가 포근한 날을 골라서 기간사병들이 장정들을 남강으로 데리고 가서 몸을 씻게 하고 이를 잡게 했다. 이는 손으로 한 마리 두 마리 잡는 게 아니었다. 발가벗긴 다음에 몸을 빗자루로 쓸어내리는 것이었다. 옷은 털어내고.”(39)

 

이런 상황에서 교육이 될 리가 없었다. 그나마 기력이 남아 있던 처음에는 구보훈련도 했던 모양이지만 나중에는 모두 영양실조에 걸리자 고작한다는 게 군가나 부르는 일이었다. 먹을 것이라곤 꽁보리밥 한 그릇을 몇 사람이 나누어 먹어야 했으니 당연했다. 심지어는 아예 민가에 가서 얻어먹으라고 내쫓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국민방위군에 직접 참가했던 임쾌동(林快童)은 “나는 1951년 1월 20일에 방위군 김해 교육대에 들어갔는데, 피복이나 침구도 안주고 겨우 2명에게 가마니 한 장씩을 주면서 깔고 자라는 거예요. 밥은 동네 민가에서 얻어먹으라는 거구요.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쌀이나 밥을 잘 주었는데, 날이 갈수록 민심이 싸늘해 갑디다. 수십 명의 훈병들이 매일같이 아침 저녁으로 인근 부락으로 동냥을 나가니 주민들도 못견디게 됐지요. 소대장들은 군사훈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밥 얻어오는 요령을 습득시켰어요”라고 증언했다.(40)

 

장교들은 “아침식사 시간에 맞추어 찾아가 땔나무를 얻으러 왔다면서 슬슬 눈치를 살피다 밥을 슬쩍해가지고 뛰라는 식의 요령”을 알려주었다. 주민들은 밥상을 차려놓고 먹다가도 우리가 나타나면 밥상을 다락에 넣고 피해버렸다. 몇 달씩 이발이나 목욕을 못하니까 몸에서는 악취가 풍겨 주민들이 근처만 가도 도망갔다. 임쾌동은 “2월 중순부터는 매일 10여명이 굶어죽었어요. 학식이 있고 좀 똘똘한 훈병들은 밥을 얻으러 나갔다가 그대로 도망쳤어요. 마을에서는 방위군을 거지떼라고 불렀구요. 지당한 호칭이지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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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홑저고리 바람으로 남하하는 국민방위군 장정들

하루는 마을에서 환갑잔치를 벌인다는 정보가 들어와 훈련병 50여명이 몰려갔다. 그들이 가니까 악취가 잔칫집 안에 확 퍼졌다. 손님들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구역질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아예 자리를 떠버렸다. 훈련병들은 “이때다 하고 잔칫상으로 우르르 몰려가서 떡이니 국수니 마구 집어먹었”다. 그러자 “손님들이 혼비백산해서 모두 뒷산으로 올라가버리고 집주인은 국민방위군 거지떼 때문에 오늘 잔치를 망쳤다면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훈련병들은 잔칫상에 놓인 간장까지 싹 비워버렸다. 그런데 그날 밤 4명이 죽었다. 굶주린 창자에 일시에 너무 쓸어 넣어서 창자가 터지고 토사곽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41)

 

3월 중순에는 조개나 달팽이라도 주어먹으려고 떼를 지어 낙동강으로 나갔다. 그런데 마침 꽤 큰 어선이 건조되어 젯상을 차려놓고 무당이 푸닥거리를 하고 있었다. 젯상에는 떡․고기․과일 등이 수북이 놓여 있었다. 그들 눈에는 먹을 것 밖에는 안 보였지만, 그래도 금새 덮칠 수는 없었다. 무당이 한창 신이 나서 주문을 외는 틈을 타서 구경꾼 사이를 슬슬 비집고 들어가자 냄새 때문에 구경꾼들이 웅성대고 무당도 슬그머니 굿을 멈추어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훈련병들은 이 틈에 아예 젯상을 송두리째 들고 2백 미터쯤 달아나서 삽시간에 모두 먹어치웠다. 무당은 보따리를 챙겨 굿을 중단하고 가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교육대에 도착하고 나서도 굶주림과 열병 때문에 죽은 훈련병들이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42)

 

사정이 이랬으니 국민방위군을 ‘죽음의 대열’‘해골의 행렬’, ‘거지중의 상거지’라고 불렀던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교육대에 도착해서 생활하던 기간사병에게 구타당해 죽거나 병으로 사망한 훈병들도 적지 않았다.(43) 국민방위군 희생자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최소한 5만 명에서 많게는 9만 명의 사람들이 아사, 병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 가운데도 반 이상은 골병이 들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국민방위군 제17교육대(남해도) 훈련병이었던 양정희는 집으로 돌아가서도 “건강을 회복하는데 4, 5개월이 걸렸”다고 증언하였다.(44)

 

오히려 2백만여 명에 달하던 피란민들이 국민방위군에 비하면 훨씬 구호도 좋았고 희생자도 적었던 셈이다. 이처럼 처참한 상황이 벌어졌으니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여론이 비등하자 국회에서 의혹을 밝히기 위해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헌병사령부에서도 조사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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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임영태, 『북한 50년사 1』, 들녘, 1999, 254쪽

 

2) 임영태, 위의 책, 255쪽

 

3) 리영희,『역정-나의 청년시대』, 창작과비평사, 1996, 168~169쪽

 

4) 리영희, 위의 책, 168쪽

 

5) 한홍구,『대한민국사』02, 한겨레신문사, 2003, 185쪽

 

6) 중국 문학사에서 당시(唐詩)는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의 네 시기로 구분한다. 초당시기를 대표하는 시인으로는 왕발, 양형, 노조린, 낙빈왕의 ‘초당사걸’이 있다. 성당 전기는 당 왕조가 가장 번영을 누린 시기였으나 후기에는 당 왕조의 정치적 능력이 고갈되면서 안사의 난 등으로 쇠퇴기로 접어든다. 성당기를 대표하는 시인으로는 이백과 두보를 비롯하여 왕창령, 왕유, 맹호연 등이 있다. 중당기를 대표하는 시인으로는 한유, 유종원, 백거이가 있다. 당의 황혼기인 만당기는 민란과 전란이 전국을 휩쓸며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던 시기로 지식인들이 좌절과 혼돈에 빠졌고 그 때문에 자연도피적인 정서가 충만하였다. 두목, 이상은, 온정균 등이 유명하다(김영구, 『중국문학사강의』,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2005, 293~385쪽).

 

7) 물 많은 이 고장에 전란을 끌어들였으니/ 백성들이 무슨 수로 편안히 살 수 있겠는가/ 전쟁은 귀족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그대는 말하지 말라/ 장수 한 사람이 공을 세우려면 만백성이 백골이 되어야 하는 것을(澤國江山入戰圖/ 生民何計樂樵蘇/ 憑君莫話封侯事/ 一將功成萬骨枯)(기세춘․신영복 편역, 『중국역대시가선집 3』, 돌베개, 1994, 590~591쪽)


기해세(己亥歲)는 황소의 난이 일어났던 기해년을 말한다. 황소가 난을 일으키고 양자강을 건너 북상했으나 관군에 밀려 강동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이때 관군이 계속 추격을 했으면 난을 평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관군을 지휘하던 장군은, “소위 위정자들이란, 나라가 위급하면 병사를 사랑하고 상 주기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태평한 세월이 돌아오면, 병사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죄까지 지운다. 그러므로 전쟁이 끝나지 않도록 적을 살려 두어야만 한다”고 하며 완전 섬멸을 피하였다. 황소는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이듬해에는 장안을 함락시켰다. 3년 뒤 황소는 결국 관군에 패해 자살하였고, 당나라도 이 난으로 사실상 붕괴하였다.


8) 부산일보사, 『비화 임시수도 천일』, 1983, 160~161쪽

 

9) 원안에는 그 외에도 ▲ 육군참모총장은 국방부장관의 지시를 받아 국민방위군을 지휘 감독할 수 있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또한 수정 첨가된 내용에는 ▲ 국민방위군은 육군참모총장의 명에 의하여 군사행동을 하거나 군사훈련을 받는 이외에는 정치운동․청년운동 또는 일반치안에 관여할 수 없다. ▲ 청년방위대 등 군사유사단체는 이 법 시행일로부터 모두 해체한다는 것 등이 있었다.

 

10) 남정옥, 「국민방위군」,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 Ⅰ』, 군사편찬연구소, 2001, 176쪽

 

11) 여순사건 후 호국군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1948년 11월 20일 긴급대통령령으로 임시조치령이 공포되어 1949년 4월 8일에 창설되었다. 호국군은 예비역으로서 생업에 종사하면서 필요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한국전쟁사』제1권, 1967, 353~355쪽; 남정옥, 위의 글, 174쪽

 

12)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은 처음 한청으로의 합류를 반대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이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에게 직접 해산하고 합류할 것을 지시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합류하게 되었다. 족청이 해산, 한청에 합류한 다음, 이승만은 한청 단장인 신성모를 국방부장관에 임명하였다. 

 

13) 신성모는 1949년 3월부터 이범석으로부터 국방부 장관, 4월에는 국무총리(서리) 감투까지 물려받아 사실상 이승만 정부의 2인자 노릇을 하였다.

 

14) 부산일보사, 『비화 임시수도 천일』, 1983, 159쪽

 

15) 리영희, 위의 책, 169쪽

 

16) 함남출신으로 연희전문을 졸업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불분명하다. 다만 그가 일제시대 씨름챔피언, 일본강도판 유도 5단 등이었던 것은 맞는 듯하다.(리영희, 위의 책, 169쪽; 남정옥, 위의 글, 177쪽

참고) 

 

17) 김윤근 자력표 사본에 의하면, 김윤근이 준장으로 진급한 것은 1950년 10월 20일이다. 그런데 이때는 중공군의 직접적인 참전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고, 오히려 북진통일이라는 공세적 상황이었다.

 

따라서 김윤근의 준장 진급은 처음에는 부족한 치안병력 확보를 위해 청년방위대사령관으로 임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급변하고 국민방위군을 조직하게 되면서 청년방위대와 대한청년단을 국민방위군의 기간조직으로 삼고 김윤근을 국민방위군사령관에 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남정옥, 「국민방위군」,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 Ⅰ』, 군사편찬연구소, 2001, 186쪽 참고).

 

18) 남정옥, 위의 글, 197쪽 참고

 

19) 경기도 이천 출신의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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