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제국주의자를 몰살시킨 위대한 조선의 전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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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봄호수
댓글 0건 조회 6,932회 작성일 16-12-29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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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 전인 1866년 9월2일 USA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서

평양군민들의 공격을 받고 불탔다.  선원은 모두 참살했다.


배에서 탈출했던 영국인 목사 토머스와 중국인 자오링펑은 생포된 뒤

강 언덕에서 분노에 찬 군민들에 둘러싸여 뭇매를 맞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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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앞잡이 선교사 토마스 처형장면 (평양대동강변)

 

5년 뒤인 1871년 미제국주의의 강화도 침략(신미양요)에 구실이된

제너럴셔먼호 비극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당시 조선은 먼곳에서 온 사람들을 후하게 대접해 돌려보내는 예의를 지켰고,

셔먼호 사건 불과 두달여 전인 1866년 5월에도 미합중국 서프라이즈호가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가 관할하는 평안도에 난파했으나 

선원들은 극진한 대접을 하고 안전하게 귀국시켰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


1866년 6월 18일 미국인 프레스턴이 조선으로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톈진을  출발했다.


제너럴 셔먼호에는 대포 2문이 장착되어 있었으며,

완전무장한 승무원 19명과 통역자인 영국인 선교사 토머스가 타고 있었다.

셔먼호가 평안도 용강현 앞바다에 나타낫다

황주목사가 를 찾아가 방문목적 등을 탐문했다.


황주목사는 국법상 외국 선박의 영해 항행은 금지돼 있다고

경고하면서도 쌀과 고기 등을 지원했다.


중군 이현익과  신태정이 통역자 토머스 목사의 요청에 따라

쌀 1섬과 쇠고기 50근, 닭 25마리, 달걀 50개, 땔감 20다발을 줬다.


박규수는 쌀 2섬과 쇠고기 50근, 돼지 1마리, 닭 20마리, 달걀 50개,

땔감 20다발을 추가로 제공했다...


7월 7일 대동강 하류에 도착하여 서서히 강을 거슬러 올라가

황해도 황주목 삼전면 송산리 앞에 정박했다.


당시 조선은 대원군 정권하에 철저한 쇄국정책을 견지하고 있던터라

외국과의 교역 및 기독교 포교는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황주목사 정대식, 역관 이용숙 등이 프레스턴 일행에게 돌아가라고 했으나,

제너럴 셔먼호는 7월 13일 평양부 신장포까지 올라갔다.


평안도관찰사 박규수는 제너럴 셔먼호로 중군 이현익과 서윤 신태정을 파견하여

즉시 퇴거할 것을 경고했다. 프레스턴 일당은 물러가지 않았고,

야간에는 상륙하여 약탈까지 자행했다.


평양군민, 제너럴호 불태울만 했다


그리고 폭우로 수위가 높아진 대동강 상류까지 나아가 16일 만경대 부근에 정박했다.

이현익은  박치영·유순원과 함께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배에 접근했다가

제너럴 셔먼호에 붙잡혀 감금당했다.


신태정이 제너럴 셔먼호에 접근하여 이현익을 석방을 요구했으나,

석방조건으로 쌀 1,000석과 금·은·인삼 등을 요구했다.


19일 아침 제너럴 셔먼호는 총 등을 난사하면서 황강정 앞까지 이르고,

5명이 작은 배에 편승하여 조탄(鳥灘)으로 올라갔다.


강변에는 평양군민이 운집하여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는데,

이현익 송환교섭의 실패사실을 듣고 격분한 군민들은 활과 소총을 난사하고 돌을 던졌다.


불안감을 느낀 프레스턴 일행은 뱃머리를 돌려 하류로 내려가기 시작하여

양각도에 이르렀다. 이때 퇴역장교 박춘권이 배를 타고 제너럴 셔먼호에

돌입하여 이현익을 구출했으나 유순원과 박치영은 살해되었다.


그동안 대동강의 수위는 줄어들어 대형 선박의 출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제너럴 셔먼호를 조용하게 퇴거시킬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한 박규수는

22일 철산부사 백낙연을 평양중군에 임명하고 화공·포격을 명했다.


제너럴 셔먼호가 처음에 공격을 피했다가, 점점 탄약이 떨어지고 배는

여울에 걸려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조선측은 24일 썰물 때 작은 배에 연료를 싣고 불을 지른 다음,


제너럴 셔먼호 쪽으로 내리띄움으로써 제너럴 셔먼호를 소각시켜버리고,

2문의 대포를 노획했다.


제너럴 셔먼호의 승무원은 전멸되었으며, 조선측에서는 1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양선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에 접한 대원군은 박규수·백낙연·신태정의

품계를 올려주고 중국에 양이쇄멸(洋夷殺滅)의 사실을 알렸다.


그후 미국은 1871년 대한포함외교을 수립하여 조선침략을 단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신미양요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신미양요후 미제국주의는  자신의 국력으로 조선을 침략할수 없다고 판단하고...

포함외교를 포기하고 필리핀을 침략하기 위해 돌아가고

일제와 야합하여 카스라-태프트조약으로 아시아식민지배 이룬 제국주의 나라이다

 

그후 ...용산에 성조기는 힘차게 펄럭이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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