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에 의한 학살사건(1)-노근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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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봄호수
댓글 0건 조회 5,613회 작성일 17-02-06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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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캐나다동포전국련합회)


미군에 의한 학살사건(1)-노근리 사건

<연재> 임영태의 한국현대사, 망각과의 투쟁(33)

임영태  |  ytlim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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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2.07  01:5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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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현재 한국과 미국은 ‘동맹관계’지만 대등하지 않다. 한국은 외교, 정치, 군사,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미국에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다. ‘절대적’이라고까지 말하기에는 약간 어폐가 있지만 미국이 한국에 ‘큰’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한때는 ‘종속국’이나 ‘신식민지’와 같은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대등하지 않은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한미관계에서 가장 불균형이 심한 곳은 군사와 관련된 부문이다. 아직도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은 미군이 갖고 있다.(1)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고 한류가 세계를 누빈다며 자랑하지만, 자기나라 군대의 작전통제권도 갖고 있지 못한 것은 ‘창피한’차원을 넘어서는 매우 심각한 국가주권의 흠결 사항이 아닐 수 없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국가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기고 있는 꼴이니 이를 두고 어떻게 제대로 된 나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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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하고 있는 미군 병사. 노근리에서 보인 미군의 모습은 세계 최강의 군대와는 거리가 먼, 나약하고 훈련이 안 된, 오합지졸 그것이었다.

 

한국과 미국이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부터이니 135년이나 되는 오랜 관계를 갖고 있다. 미국과의 공식 관계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끊어졌다. 하지만 일제시기에도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미주지역 동포들은 임시정부 재정지원의 중추역할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도 미국과 한국은 정치, 문화, 종교적으로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 후 미군이 남한지역을 점령하면서부터 미국은 한국에게 가장 가까운 ‘우방(友邦)’이 되었다. 한국 현대사는 미국과의 관계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미국은 미군정을 통해 남한지역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평정하였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했다. 미국은 남한 정부의 산파 역할을 했고, 6.25전쟁으로 남한 정부가 위기에 처하자 직접 군대를 보내 구해주었다. 또한 많은 한국인들은 미국이 제공한 원조물자로 전시의 어려운 삶을 지탱할 수 있었다. 미국은 한국인의 ‘구세주’가 되었다. 그와 같은 미국의 은혜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가끔씩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서 성조기를 휘날리며 미국의 은덕을 찬양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곤 한다.

 

그러나 앞으로 대한민국을 짊어지고 나갈 세대에게는 미국에 대한 부채가 없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미국에 빚진 게 없으니 비굴할 필요도 없다. 그들의 조부모들 세대가 신세를 좀 졌다고 그들까지 채무자가 돼야 할 이유는 없다. 물론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 세대 중에도 미국의 은덕에 대해 그다지 고마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미국이 한국을 지원해준 것은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지 한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미국은 그동안 한국에 준 것 이상으로 가져갔다. 한국은 60년 이상 미국에 헐값으로 군사기지를 제공해왔다. 지금은 한국이 주한미군의 주둔비용을 50%나 분담하고 있다. 미국의 새 대통령 트럼프는 한국에 주둔비용을 더 내놓으라고 요구할 태세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다. 어디 주한미군이 한국의 안보만을 위해 주둔하는 군대인가 말이다. 냉전시대에는 그런 주장이 먹혀들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주한미군의 주된 역할은 사실상 미국의 세계패권을 위협할 잠재적 적국인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의 지위 변화’다. 그런데도 남한의 친미주의자들은 주한미군의 주둔에 거저 감읍할 따름이다.

 

반미의 무풍지대에서 대중적 반미로

 

정부 수립 이후 한국은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미국의 요구를 거의 맹목적으로 추종해왔다.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미국의 의도와 배치되는 행위를 한 번도 없었다. 한국은 어떤 동맹국도 거부한 베트남 전쟁 파견을 수용하여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파견하며 ‘자유의 십자군’노릇을 하였다. 이라크에도 미국·영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파병했다. 베트남과 이라크에 파병한 것은 한국의 국익과도 관련이 있지만 굳이 군대까지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럼에도 한국이 그러한 일을 한 것은 미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한국은 일본, 영국과는 차원이 다른 ‘하위동맹자’이지만 지금까지 미국의 훌륭한 동맹자 노릇을 해온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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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근리 사건을 다룬 한겨레신문 기사

 

여기서 자세하게 거론할 필요는 없겠지만 경제적으로도 한국은 미국에 받은 만큼 돌려주었다. 게다가 한국은 미국식 제도와 문화, 사고방식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를 가장 빠르게 받아들인 나라이기도 하다. 양적 균형이 맞는지 정확히 계산하기는 어렵지만 한국도 미국에게 줄 만큼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 한국민은 미국에 대해 부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21세기에 들어와서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상당히 바뀐 것은 분명해 보인다. 과거 한국에서는 미국에 대한 비판을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남한 사회는 누구 말처럼 ‘멸균실’수준의 반공(反共)국가였고, 그에 버금갈 정도로 ‘반미의 무풍지대’였다. 1980년대가 되어서야 이른바 ‘반미운동권’이 겨우 선도적인 미국비판을 내놓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그래봐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대학생들의 서울 문화원 점거사건, 농민들의 미국산 농산물 수입 반대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21세기 한국민의 의식이 많이 달라졌다. 미국이 불합리한 태도를 보이면 거침없이 반미의식을 표현한다. 2008년 미국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시위가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여 억울한 죽음을 당한 여중생 효순과 미순을 위한 촛불시위도 그랬다. 여기에는 중학생, 고등학생들도 적극 참여했다. 2016년부터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 사드 반대투쟁이 반미투쟁으로 나아가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위안부 협상에서 배후에서 압력을 행사한 것과 함께 한반도에서 미국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국민들은 잘 알고 있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성역이 아니다. 한국민의 이해관계와 배치될 경우 언제든지 대중적인 반미투쟁도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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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근리사건 현장 항공사진(2007년 5월)

이 같은 한국인의 대미인식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 한국 현대사를 통해 오랫동안 쌓여온 역사의식의 발전 결과라 할 수 있다. 역사의식은 역사의 고비마다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1960년 4.19, 1980년 5.18 광주항쟁, 1987년 6월항쟁, 그리고 2016년 11월 촛불혁명과 같은 혁명적 사건들을 통해서다. 하지만 한편으로 역사에서는 생각지 못했던 유연적인 사건, 작은 일들이 역사의 변화에, 사람들의 의식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노근리 사건도 그런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노근리 사건은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하순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이 한국 민간인을 집단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랫동안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채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44년 동안 역사의 이면에 은폐되어 있던 노근리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한국전쟁 시기 미군에 의한 한국 민간인 학살의 단초가 드러났고,

 

이를 통해 그동안 ‘인권과 정의의 보루’로 포장되었던 미군의 실체가 폭로되었다. 이 사건에서 드러난 미군의 모습은 자유․인권의 수호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무고한 민간인을 향해 기총소사와 총질을 해댄 학살자였다. 이 사건은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미군의 실상을 드러내는 데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미국과 한국 두 나라 정부는 오랫동안 노근리 사건의 진실을 은폐해 왔으나 영원히 감출 수는 없었다. 나아가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벌인 학살 행위에 대해서도 다시 조망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노근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1950년 7월 25일 전후한 시점에서 영동 일대는 대전을 점령하고 남하를 시도하는 인민군과 패주하는 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인민군은 7월 19일 대전공략에 들어가 7월 24일 대전을 완전히 수중에 넣었다. 대전이 함락 후 인민군 주력부대의 다음 공격 목표로 영동 지역이 들어왔다. 전선이 가까워지자 대전에서 김천 방면으로 통하는 도로변에 위치한 영동읍 임계리와 주곡리 주민들은 근처 산속으로 피란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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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사건 현장 1960년대 쌍굴다리 전경(노근리 사건 자료집)

그런데 그때 미군이 들어왔다. 미군은 피란을 시켜준다면서 모두들 산에서 내려오라고 했다. 미군은 일본인 통역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주민들을 모았다. 당시 임계리는 60호 정도의 마을로, 평균 4인 가족으로 계산을 해도 2백여 명이 넘었다. 임계리 보다 큰, 바로 옆 동네 주곡리 주민 3백여 명도 미군의 권유로 피란길에 올랐다. 거기에 대전 등지에서 피란을 오다가 합세한 2백여 명의 타지 사람들까지 합류해 대략 7백여 명의 피란민 대열이 형성됐다. 이들은 미군의 재촉을 받으며 남쪽으로 향했다.(2)

 

그러나 해거름 무렵에 출발한 7백여 명의 피란민 행렬은 미군의 재촉에도 속도를 내지 못했다. 보리쌀 자루와 솥, 이불보따리를 짊어진 대다가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함께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가지 못해 밤이 되었다. 미군들은 피란을 중지시켰다. 모두 도로 밑의 강변으로 내몬 뒤 모두 엎드리라고 명령했다. 고개를 들면 총을 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날 밤 가까운 곳에서 인민군과 교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총알이 날아가고 포격소리도 요란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악몽처럼 밤을 지샜다.

 

다음날 아침 미군의 명령에 따라 피란민들이 다시 출발했다. 강변에서 도로로 올라온 피란민 행렬이 4킬로미터 가량 나아가 노근리 근처에 다다랐을 때였다. 미군들은 탱크로 도로를 차단하고 정지 명령을 내린 다음, 도로와 인접한 철로로 올라가라고 명령했다. 피란민들은 미군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7, 8명의 미군들이 철길 위로 올라온 7백여 명의 피란 짐들을 앞쪽에서부터 검사하기 시작했다. 검사를 기다리는 행렬이 2백미터는 되었다. 전날 저녁부터 밥을 못 먹은 피란민들은 차례를 기다리면서 가족끼리 둘러앉아 미숫가루 등으로 허기를 달랬다. 일부는 앞가슴을 풀어헤친 채 소 그늘에 앉아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3)

 

피란민들의 짐보따리에는 이불이나 보리쌀 따위밖에 없었다. 피란민들의 짐 검사를 끝낸 미군들은 어딘가에 무전기로 연락을 하더니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곧 미군 폭격기가 날아와 피란민을 향해 폭탄을 떨어뜨렸다. 미군 폭격기는 20여 분간 폭격과 함께 기총소사를 했다. 현장은 삽시간에 아비규환 상태가 되었다. 철로는 엿가락처럼 휘었고 여기저기서 사람과 소가 쓰러졌다. 이때 철로 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최소한 1백여 명은 죽었을 것이라고들 증언하였다.(4)

 

살아남은 사람들은 폭격을 피해 철로 밑에 있는 수로용 굴로 모여들었다. 굴의 폭은 2미터가 될까 했다. 폭격이 멈추자 폭격 직전 어디론가 달아났던 미군 3~4명이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이제 진짜 안전한 곳으로 피란시켜 주겠으니 모두 나오라”고 말했다. 미군들 가운데 위생병 한 명은 부상자들에게 약도 발라주고 붕대도 감아주었다. 사람들은 치료까지 해주는 것을 보고는 아까는 뭔가 잘못돼 폭격을 했지만, 이제 정말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주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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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굴다리 남단 좌측 외벽 총탄 자국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미군은 피란민들을 바로 1백여 미터 떨어진 쌍굴다리로 몰아넣었다. 철로 밑에 나란히 뚫린 쌍굴다리 밑에 약 4백여 명의 피란민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들어찼다. 그런 상태에서 미군은 굴다리가 내려다보이는 양쪽 야산에 기관총을 설치하고는 굴다리에서 한 발자국만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총을 쏘아 죽였다. 한 여름철인데다가 폭격에 놀라 허둥대느라 목이 말랐다. 사람들은 굴다리 바로 아래쪽 물이 좀 고여 있는 웅덩이로 슬금슬금 내려가 물을 마시려 했지만 나가는 족족 미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미군은 밖으로 나간 사람뿐만 아니라 굴다리 안까지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시체가 쌓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총에 맞지 않으려고 더 안쪽으로 밀착했다.

 

하루 종일 총질을 해댄 다음날 아침, 위생병을 앞세우고 미군 2~3명이 굴다리로 와서는 전날처럼 부상자를 치료해주었다. 미군 두세 명이 굴다리 안으로 들어와 상황을 살펴보기도 했다. 국민학교 처녀교사 정구임(당시 20세)이 일본어로 “제발 우리를 여기서 나가게 해달라, 남쪽으로 피란시켜 달라”고 했더니 미군은 “여기가 안전하다”고 말했다. 정구임은 그날 저녁 미군이 쏜 총에 사망했다.(5)

 

굴다리에는 미군과 영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연희전문 사학과에 다니던 정구일이었다. 그는 마을에서 피란 오기 직전 약 일주일간 마을 근처에 진지를 구축한 미군들의 통역관 노릇을 하기도 했다. 정구일이 굴다리 근처에 온 미군에게 “왜 아무 죄 없는 우리를 아무 이유 없이 죽이는지 그 이유나 알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그 미군은 “피란민이라 할지라도 의심나는 사람은 모두 죽이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다”고 답했다. 그래서 정구일이 “우리는 총은커녕 칼 한 자루도 가진 것 없는 양민들인데 무엇이 의심스럽기에 죽이려는가”라고 했더니 미군은 그냥 냉랭한 표정만 짓고 가버렸다.(6)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그때서야 사람들은 ‘미군들이 우리를 상부의 명령에 따라 작전상 죽이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날 밤부터 남자들을 중심으로 필사의 탈출이 시작됐다. 하지만 탈출을 시도한 사람 가운데 절반가량은 미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이틀이 지나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극도의 공포 속에 떨어야 했고, 허기와 목마름으로 극한상황을 맞았다. 사람들은 예의나 격식을 잊어버렸다. 전쟁이 어떻게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지를 그 굴다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실감했다. 전쟁은 이웃이나 친척뿐만 아니라 가족간의 본능적 사랑마저도 파괴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양해찬은 그 처절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 마을 조남일 씨 부인이 하필이면 그 굴다리에서 둘째 날 애를 낳았어요. 조남일 씨가 부인에게 말하더군요. ‘여기 있으며 죽는다, 탈출해야 한다.’부인이 ‘애는 어떡하고요’하니까 ‘애를 데리고 가면 가다 울어 미군에게 발각돼 우리 모두 죽는다, 여기 그냥 버려두고 가자’고 해요. 부인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탯줄도 끊지 않은 애를 버려두고 남편과 탈출하더군요. 그걸 말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버려진 아이에게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전쟁은 부부간의 사랑도 파괴하더군요. 부인하고 함께 달아나면 부인 발걸음이 늦어 미군에게 당할 가능성이 많으니까 부인에게 아무 말도 없이 슬그머니 도망친 남편들이 많았으니까요.”(7)

 

굴다리에서 사흘째. 남자 청장년들은 대부분 탈출하거나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고 굴다리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지칠 대로 지친 아녀자들과 어린이, 아기들이었다. 그런데 미군들은 이제 굴다리 바로 앞에까지 와서 총을 난사했다. 인민군들에게 패주하면서 마지막 살육을 한 것이다. 그때까지 굴다리 안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1백여 명 정도였는데 이 총질로 절반가량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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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쌍굴다리 등록문화재 등록(2003.6.25)

그러나 노근리 사건은 오랫동안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햇빛 아래 역사 속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정은용이었다. 당시 경찰관으로 가족들을 두고 피난을 떠났던 정은용은 나중에야 이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됐다. 그는 이 사건으로 다섯 살 난 아들과 두 살배기 딸을 잃었다. 그는 집에 돌아와 이 소식을 들은 후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시들 써 아픔을 토로했다.(8)

 

정은용은 1960년 10월 27일 노근리 사건을 상세히 기록해 미합중국 정부 앞으로 손해배상청구서를 보냈지만 아무 연락을 받지 못했다. 그 후 1994년 봄 다시 사건의 진상을 정리한 실록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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