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주석님의 회고록에서 배운다 -배움의 천리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764회 작성일 17-02-06 22:05

본문

주체106(2017)년 2월 6일 [회고록] 


81fb1f01da46059962c2446cf4754999_1486436610_0102.jpg
     ​조선력사에서 가장 위대하신 김일성수령동지

 

위대한 주석님의 회고록에서 배운다

-배움의 천리길-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12살 나시던 해인 주체12(1923)년 초였다.

당시 중국동북지방에 있는 팔도구에서 혁명활동을 벌리시던 위대한 주석님의 아버님이신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소학교졸업을 얼마 앞둔 주석님께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씀하시였다.

네가 어려서부터 부모들을 따라다니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였다, 이제 다시 조선에 나가면 그보다 더 큰 고생도 할수 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너를 조선에 내보내자고 결심하였다, 조선에서 태여난 남아라면 마땅히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 네가 조선에 나가서 우리 나라가 왜 망했는가 하는것만 똑똑히 알아도 그것은 큰 소득이다, 고향에 나가서 우리 인민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고있는가 하는걸 체험해보아라, 그러면 네가 할바를 잘 알게 될것이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아버님의 말씀대로 팔도구에서 고향 만경대를 향해 《배움의 천리길》을 떠나시였다.

가야 할 천리중 500리이상은 무인지경이나 다름없는 험산준령이였다. 그 험한 산악들을 단신으로 넘는다는것이 헐치 않았다. 후창에서부터 강계에 이르는 길 량옆의 수림들에서는 대낮에도 맹수들이 어슬렁거리였다.

그때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천리길을 걸으시면서 고생을 퍼그나 하시였다. 직고개나 개고개(명문고개)와 같은 고개를 넘으실 때는 정말 힘이 드시였다.

오가산령을 하루종일 넘으시였는데 아무리 걸으시여도 고개가 끝이 나지 않고 새 고개가 연방 나타나군 하였다.

월탄을 거쳐 오가산을 넘은 다음에는 화평, 흑수, 강계, 성간, 전천, 고인, 청운, 희천, 향산, 구장을 지나 개천에 이르러 거기서 기차를 타고 만경대로 나오시였다.

그이께서는 그때 천리길을 걸으시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시였다. 한번은 발이 너무 아파서 어떤 농민의 발구를 탄 일이 있으시였다.

헤여질 때 값을 치르려고 돈을 내놓으니 농민은 받지 않고 오히려 그 돈으로 위대한 주석님께 엿을 사주었다.

강계객주집 주인도 좋은 사람이였다.

저녁늦게 강계시내에 도착하여 객주집에 들어서시니 그가 대문밖까지 나와서 위대한 주석님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는 김형직선생님께서 치신 전보를 받고 주석님을 기다리고있었던것이다.

김형직선생님을 《김선생》, 《김선생》하면서 존경해온 이 객주집의 할머니도 주석님을 보자 4년전에 아버지를 따라 중강으로 들어갈 때는 조그마했는데 이렇게 컸구나하면서 친손자라도 만난것처럼 기뻐하였다. 할머니는 미리 준비해놓은 소갈비국도 끓이고 청어도 구워서 자기 집 아이들한테는 하나도 먹이지 않고 위대한 주석님께만 드리였다. 밤에는 새로 꾸민 이불도 내놓았다. 주인들이 그때 정말 주석님을 위해 있는 성의를 다했다.

그이께서는 다음날 아침 강계우편국에 가시여 아버님께서 일러주신대로 팔도구에 계시는 부모님들에게 전보를 치시였다. 전보문 한자에 3전이였는데 여섯자가 넘으면 1전씩 더 받는다고 하여 전보용지에 《강계무사도착》이라는 여섯글자를 써넣으시였다.

이튿날 객주집주인은 위대한 주석님을 차에 태워보내시려고 자동차사업소에 갔다왔다. 그는 차고장으로 열흘쯤 기다려야 할것 같다면서 신청은 해놓았으니 친척집에 온셈치고 그동안 자기 집에서 묵으라고 하였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그의 진정이 고마웠지만 빨리 가야겠다고 하시였다. 그러자 그도 더는 만류하지 못하고 짚신 두컬레를 주면서 개고개쪽으로 가는 달구지군까지 한사람 물색하여 붙여주는것이였다.

개천역앞에 있던 서선려관 주인도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였다.

위대한 주석님께서 그 려관에 드시고 15전짜리 제일 눅거리 밥을 청하시였는데도 주인은 그것을 상관하지 않고 50전짜리 밥을 드리였다.

그리고 밤이 되자 주인은 다른 손님들이 다 포단을 깔고 모포 두장씩 덮고자는데 너 혼자만 어떻게 모포 한장만 깔고 자겠는가, 돈을 안내도 되니 마음놓고 받으라고 하였다.

조선사람들이 비록 나라를 빼앗기고 망국노가 되여 어렵게 살았지만 조상전래의 인정과 미풍량속만은 깨끗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금세기초까지만 하여도 우리 나라에는 무전려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기 집이나 마을에 찾아오는 나그네들이 돈을 내지 않아도 밥을 먹여주고 잠을 재워주는것이 조선의 풍속이였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천리길을 걸으시면서 조선민족이 참으로 선량하고 도덕적인 민족이라는것을 깊이 깨닫게 되시였다.

서선려관 주인도 강계객주집 주인이나 중강려인숙 주인과 마찬가지로 김형직선생님의 지도와 영향을 받은 사람이였다. 그이께서 여덟살적에 중강으로 들어가실 때에도 느끼시였지만 아버님한테는 이처럼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친지들이 어디에 가나 있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주석님의 일가분들을 친혈육처럼 맞이하고 보살펴주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아버지가 저 많은 친구들을 언제 다 사귀였을가, 저런 동지들을 얻느라고 걸음인들 얼마나 많이 걸었을가 하는 생각을 하시였다.

사방에 친구들이 있으니 객지에 나서도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이모저모로 그들의 도움을 받으시였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도 그들의 덕을 단단히 보시였다.

그때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강계시내가 전등불이 환하였지만 왜색이 짙어가는 거리풍경을 보시고 쓸쓸한 생각을 금할수 없으시였다.

조국에 위대한 주석님을 내보내시면서 조선을 알아야 한다고 절절하게 말씀하신 아버님의 참뜻이 마음속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였다.

하기에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나에게 있어서는 그 천리길이 조국을 알게 하고 우리 인민을 알게 해준 하나의 큰 학교였다.고 회고하시였던것이다.

 

 

                                                                                                                                     손유진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7-02-11 14:11:58 북녘소식에서 이동 됨]
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2016-2017 KCNCC(Korean Canada National Coordinating Council). All rights reserved

E-mail : kcncc1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