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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에 의한 학살사건(3)-정전회담과 미군의 무차별적 북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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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봄호수 작성일17-02-21 14:59 조회13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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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에 의한 학살사건(3)-정전회담과 미군의 무차별적 북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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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6일부터 미군의 무차별 북폭이 시작되었다,  B-29 전폭기의 폭탄투하장면 / 자료사진입력, 재캐나다동포전국련합회)


<연재> 임영태의 한국현대사, 망각과의 투쟁(35)

임영태  |  ytlim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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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2.21  02: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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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미군의 철도차단작전과 북한의 대응
  
1951년 4월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 확대와 원자탄 사용을 주장하던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을 해임하고 리지웨이 제8군사령관을 그 후임으로 임명했다. 신임 제8군사령관으로는 밴플리트가 선정되었다. 5월 20일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은 웨일랜드를 스트레이트메이어의 후임 극동공군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제5공군사령관에는 에버세스트를, 폭격기사령관에는 제임스 브릭스를 각각 새로이 임명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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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공군의 원산 북한 수송로 폭격 모습(ⓒ미해군 홈페이지)

1951년 6월 30일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는 트루먼의 지시에 따라 서울과 도쿄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정전을 위한 군사회담을 공산측에 제안했다. 공산군측은 군사행동을 중지하고 평화회담을 38선 부근의 개성에서 열자고 주장했지만 리지웨이는 “정전협정 체결 시까지 적대행위는 정지되지 않는다”는 답신을 보냈다.

 

중공군 참전 이후 소련에서 제공된 미그-15 전투기가 압록강 인근에서 미 공군 비행기들과 공중 전투를 벌였지만 공산측 전투작전의 대부분은 지상군 몫이었다. 반면 유엔군은 압도적인 해군력과 공군력을 활용해 북한 전역에서 무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정전협정 내내 계속된 미군기의 폭격은 북한지역 민간인에게 참기 힘든 고통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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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공군의 북한 철로 폭격. 폭격이 진행되는 동안 논밭 두렁에 엎드려 있는 노무자들의 모습. 이들은 폭격이 끝나면 곧바로 복구 작업에 투입되곤 했다. 북한에서는 한국전쟁 동안 미 공군기의 철로차단 작전을 위한 폭격에 대응하는 철도복구대가 조직되었다. 이것은인간의 의지와 기계의 싸움처럼 보였다.

 

1951년 교체된 신임 극동공군 최고지휘부는 정전협정이 진행되는 동안 공군력의 진정한 가치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선이 교착된 상황에서 새로운 병력과 보급품의 이동을 막는 공군의 차단작전이 중요했다. 웨일랜드 극동공군사령관은 북한 전역의 철도망 파괴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미 공군은 정전협정이 시작된 다음 1951년 6월~1952년 6월까지 1년여 동안 ‘철도차단작전’을 펼쳤다. 이 기간 동안에도 미 공군은 북한의 도시와 촌락을 밤낮없이 폭격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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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기에 폭격 당하는 철도 조차장(1952년)

이 시기 북한지역의 철도차단은 미 공군의 가장 중요한 군사목표였던 것은 분명하다. 전선에서 싸우는 공산군은 중국에서 들어오는 식량과 무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식량과 무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공산군은 곧바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열차는 공산군의 가장 중요한 보급품 이동수단이었다. 당시 북한은 세계적인 수준의 발달된 철도 수송망을 갖추고 있었고. 열차는 북한지역에서 얼마든지 채굴 가능한 석탄을 주연료로 사용했다. 공산군 지도부는 철도의 활용에 전쟁의 사활을 걸고 있었다.

 

이 시기 미 공군은 철도차단작전에 전력의 많은 부분을 집중했다. 1951년 8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된 스트랭글작전(Operation Strangle: ‘교살[絞殺: 목 졸라 죽이기]작전’ 혹은 ‘질식[窒息: 숨통 끊어 죽이기]작전’)과 1952년 3월부터 5월까지 지속된 새처레이트작전(Operation Saturate: ‘집중폭격작전’)이 대표적이었다. 미 공군은 철도차단작전을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폭격기술을 개발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당대 세계 최고의 미국의 첨단과학기술도 북한 주민들의 의지와 투지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3)

 

북한지도부는 말 그대로 철도와 교량복구 사업에 전쟁의 사활을 걸었다. 미 공군의 철도차단작전과 북한사람들의 목숨을 건 철도복구사업이 정면으로 맞붙었다. 미 공군의 폭격이 시작되면 철로주변에 있던 북한사람들은 급히 철로로부터 도피하였다가 폭격이 끝나면 바로 복구사업에 투입되었다. 북한 “노무자들은 주요 철도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대기하고 있다가 폭격으로 인해 노반이 파괴되면 즉각적으로 복구에 돌입”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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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기의 폭격으로 부서진 승호리 철교(출처 tistory.com)

 

미군의 대규모 철도차단작전이 시작되면서 공산측의 야간수송도 쉽지 않았다. 공산군 지도부는 전쟁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는 보급품을 이동하기 위해 철도와 열차 수리에 총력을 기울였다. 철도복구사업은 주로 야간에 수행되었다. 그것은 폭탄과 어둠에 맞서 싸운 일종의 전투였다. 북한은 철로 곳곳에 순시원을 배치하여 파괴된 철로를 찾아낸 뒤 바로 노동자들을 투입했다. 철도복구노동자들은 해질녘부터 작업을 시작해 자정 전에 대부분 일을 마쳤다. 매일 반복되는 작업으로 노동자들의 업무숙련도는 놀랄 정도로 발전했다.

 

한편, 미 공군의 철도차단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북한 도시와 농촌에 대한 공격은 ‘상대적으로’ 강도가 덜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에도 민간지역에 대한 폭격은 규모만 축소되었을 뿐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는 보급품집적소와 병력집중지역, 조차장 파괴라는 명목으로 북한의 주요 도시들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1951년 7월과 8월에 미공군의 집중적인 공격이 감행되자 정전회담도 결렬되어 한동안 중단되었다.(5)

 

미 공군의 야간폭격과 민간지역 공격

 

1952년 1월 7일 342대의 전폭기들이 북한지역에서 무장정찰을 수행했다. 1월 6~7일 밤에는 48대의 B-26기가 양덕, 신고산, 영흥, 고원, 회양, 정주 지역에 총 9회의 공격작전을 감행했다. 1월 8일에는 321대의 전폭기들이 무장정찰을 수행했고, 7~8일 밤에는 48대의 B-26기가 선천 북쪽지역까지 폭격을 감행했다. 폭격기사령부 소속 B-29기의 도심조차장 공격도 계속되었다. 이처럼 극동공군의 북한 농촌과 도시 공격이 계속되었다.(6) 

 

그런데 1952년 1월 폭격기사령부의 조차장 폭격은 기존 폭격과 달리 모두 밤에 수행되었다. B-29중폭격기들은 1951년 10월 28일의 주간폭격작전을 마지막으로 이후 모든 임무를 야간에만 수행했다. 이것은 공산측의 대공방어능력이 증강되고 미그-15기가 등장하면서 제공권이 위협을 받자 미 공군이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폭격기술인 ‘쇼란(SHORAN: Short-Range Navigation Radar)’을 개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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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 12월 원산 외곽의 교량을 폭격하는 미공군기 F9F기(ⓒ미해군 홈페이지)

1951년 10월 공산공군이 북한 영공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미 공군의 공중우세가 위기에 빠졌다. 10월 중에 미 공군은 미그-15기의 출현을  2,573회나 목격했는데 그 중 2,166회나 교전을 벌였다. 미 공군은 10월의 마지막 주 공산측의 대공포화와 미그-15기의 공격으로 B-29기 5대를 상실하고, 8대를 파손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일주일 동안 B-29기 승무원도 55명이나 사망 또는 실종되었다. B-29기가 한국에서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할 수 없다고 예상하는 비관론자들까지 나타났다.(7) 

 

이런 상황에서 B-29기의 야간작전수행을 가능케 한 무선유도시스템 ‘쇼란’이 개발되었다. 무선유도시스템 쇼란은 보이지 않는 표적에 대한 폭격을 가능하게 해주는 장치로 기상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구름 위에서의 폭격과 야간폭격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쇼란의 도입으로 B-29기의 야간비행이 가능하게 되었고, 따라서 주간에만 활동할 수 있었던 미그-15기의 위협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었다. 미그-15기 때문에 북한지역 폭격에 제약을 받았던 B-29기는 또 다시 북한영공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기술에 대한 숙달이 부족했던 폭격기조종사들은 어두운 암흑 속에서 사실상 목표물과 상관없이 북한 도시지역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함으로써 북한 전역을 초토화시켰다.(8)

 

B-29중폭격기의 쇼란 폭격뿐만 아니라 B-26경폭격기의 야간습격작전 또한 북한 민간인들의 대량희생을 강요했다. B-26경폭격기들은 1951년 여름부터 주로 야간 도로봉쇄와 열차공격 임무를 담당했다. 애초 야간차단작전을 위해 B-26기가 주로 사용한 무기는 M-47소이탄과 500파운드 GP폭탄, 지발신관(遲發信管)(9)파열폭탄 등이었다. 하지만 1952년 5월부터 미 공군은 차량을 직접 파괴하는 폭탄 대신 주로 ‘대인폭탄(antipersonnel bomb)’과 ‘시한폭탄(delayed-action bomb)’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차량에 대한 직접 공격보다 도로와 철도, 교량을 복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시한폭탄은 복구 작업에 참여하는 민간인들에게 공포감을 형성시켜 군사적 압박뿐만 아니라 심리적 압력수단으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공중폭격을 통한 심리적 압박은 정전협상 시작 후 공산측 지도부를 향해서도 구상되었다.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과 극동공군 지휘관들은 정전회담에 압력을 가할 물리적 수단으로 공중폭격에 주목했다. 이들은 공군력을 활용하여 적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민간시설과 민간인에게 커다란 위해를 가함으로써 정전회담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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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의 원산지역 항공사진. 시가지는 흔적도 없고 미군기의 폭격으로 만들어진 폭탄 구멍만 곳곳에 숭숭하다.(ⓒ미해군 홈페이지)

1951년 7월 13일 리지웨이는 “현 교섭기간 중 한국에 와 있는 적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도록 모든 공군력을 동원하여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내라”고 명령했다. 7월 30일 미군 전폭기 354대가 투입돼 평양을 공격했지만 이 사실은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공군 내부 문서에도 평양공격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다. 리지웨이는 평양공격을 정전회담 압력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했으나 합동참모본부가 쉽사리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합동참모본부는 유엔군측이 협상을 결렬시키려는 듯한 인상을 외부세계에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11)

 

합참과 리지웨이는 1951년 8월 25일에 진행된 나진 폭격 과정에서도 갈등을 표출했다. 합동참모본부는 소련의 직접적인 전쟁 개입을 우려하여 1950년 9월

1일 이후 나진에 대한 공중폭격을 금지했지만 1951년 7월 공산측이 나진에 많은 물자를 비축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리지웨이는 나진 공격의 필요성을 합참본부에 보고했다. 합참은 트루먼의 재가를 받아 나진폭격을 승인했다. 폭격기사령부는 35대의 B-29를 동원, 나진폭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날의 폭격은 한국전쟁에서 마지막 나진폭격이었다. 소련 국경지역이라는 정치적 민감성 때문에 폭격 자체가 제한된 것이다. 훗날 유엔측 정전회담 대표였던 조이(C. Turner Joy) 제독은 나진폭격 금지와 같은 제한조치들이 정전협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에서의 정전협상은 “적이 간청한다고 해서 결코 압력을 줄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있던 모든 육해공군 사령관들은 ‘폭격을 통한 압력행사’를 강렬히 원했는데 마침내 1952년 중반 이후 실현되었다.(12)

 

이념전쟁의 포로가 된 포로교환문제

 

정전협상은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공산군측은 북한․중국이 합동대표단을 구성했지만, 유엔군측은 한명의 남한 참석자 외에 모두 미군장교로 구성되었다.(13) 후에 그 한명의 남한 참석자마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철수함으로써 정전회담은 북한․중국과 미국 사이의 회담이 되고 말았다. 남한은 끝내 정전협정문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지금 남한이 과연 평화협정 당사자인가 아닌가 하는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정전회담이 시작되자 유엔측은 군사문제만 취급하자고 했으나 공산측은 외국군 철수 등 정치문제까지 포함시키려 했다. 논란 끝에 7월 26일 다섯 가지 의제가 결정되었다. 1) 의제 및 의사일정 채택, 2) 군사분계선 설정, 3) 휴전감시 방법 및 기구구성, 4) 전쟁포로 처리, 5) 관련 각국 정부에 대한 건의 등이었다.(14)

 

먼저 군사분계선 문제가 논의되었다. 공산측은 38선을, 유엔측은 자신들이 제공권과 제해권을 갖고 있으므로 지상 접촉선인 38선보다 훨씬 더 북쪽 선을 주장했다. 8월 22일부터 10월 25일까지 정전협상이 잠시 중단되었고, 그 사이 미 공군은 북한지역을 대대적으로 공습했다. 7월과 8월, 미군 폭격기들이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주요 도시에 소이탄(네이팜탄)과 시한폭탄을 비롯한 수천 톤의 폭탄을 쏟아 부었다. 북한의 도시들은 잿더미로 변했다. 농촌지역 또한 무차별적 공격대상이 되었고 민간인들이 대량 학살되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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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공포로_석방-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미군은 8월 15일을 전후하여 공산측의 통신망과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한 ‘교살작전’을 감행했다. 9월과 10월에는 ‘허드슨 항 작전(Operation Hudson Habor)’을 통해 북한 상공에서 모의 원자폭탄 투하 비행을 실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했던 B-29중폭격기가 동원돼 북한 상공을 비행하면서 보조원자탄 또는 TNT폭탄을 투하했다.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핵공격 위협이었다.(16)

 

10월 25일 판문점으로 장소를 옮겨 정전회담이 다시 시작되었다. 11월 27일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현재의 전선을 중심으로 군사분계선을 긋는 데 양측이 합의했다. 양측은 1952년부터 휴전감시문제와 포로처리문제를 논의하였다. 휴전감시문제는 논란 끝에 1952년 5월 2일 휴전감시 출입지역을 쌍방 5개소로 하고, 중립국감시위원회는 체코, 폴란드, 스위스, 덴마크 등 4개국으로 구성하는 데 합의하였다.

 

그 사이 정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질 때마다 미 공군에 의한 북한지역 융단 폭격이 지속되었다. 특히 해군까지 참여한 가운데 ‘질식작전’, ‘집중폭격작전’이 진행되어 한 달 평균 900회나 출격했고, 철도․도로 차단작전이 강화되었다. 미국은 정전협상이 결렬될 경우 한반도 내의 공격지역 제한을 철폐하며(조소국경지역 12마일은 제외), 중국 공군기지를 공격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하는 중국 본토기지 공격까지 계획하였다. 그러나 1952년 5월, 4가지의 의제 가운데 포로교환문제를 제외한 나머지 3개항이 모두 타결되었다.(17)

 

다른 문제들이 타결되자 포로교환 문제는 금방 끝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남은 포로교환 문제로 정전회담은 이후에도 1년 이상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북한지역에 대한 무자비한 폭격으로 북한의 도시와 농촌지역이 초토화되었다. 이때 미국은 심리전과 사회전의 한 형태로 공중폭격을 사용하였다. 로버트 로벳은 “우리가 만약 북한지역을 계속 초토화시키려 했었다면 우리는 북한인들에 대해 가장 비인간적인 짓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전쟁해야만 하였다”라고 지적했다.(18) 그런데 실제로 미국은 북한에 대해 “가장 비인간적인 짓”을 저질렀다.

 

미국이 주장하는 ‘인도주의’ 명분 때문에 ‘비인도적’ 민간인 살상이 계속되었다. 1952년 한국전쟁 양상이 새롭게 전개되었다. 정전협상에서 포로송환문제를 두고 양측 사이에 심각한 이념전․심리전이 전개되었다. 미국은 “전쟁포로들은 전쟁 종결 후 지체없이 석방되고 송환되어야 한다(제118조)”는 ‘전쟁포로에 관한 제네바협정’에 서명하였으나 비준은 하지는 않았다. 중국과 북한 모두 이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지만(19), 공산측은 제네바협정 무조건 송환 원칙(제118조)에 따라 자동송환(강제송환, 무조건 송환)을 주장했다.(20) 반면, 유엔(미국)측은 인도주의를 강조하며 자원송환(자유의사에 따른 송환)을 주장했다. 양측은 자신의 원칙에서 조금도 물러설 의도가 없었다.

 

인도주의로 포장된 가장 비인도적 행위

 

1952년 2월 27일 유엔사령관 리지웨이는 포로관련 협상이 송환원칙문제만 남긴 채 모두 타결되었다고 합참에 보고했다. 리지웨이는 포로문제에 대한 워싱턴의 결심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트루먼은 “미국은 포로를 송환하기 위하여 강제력을 사용하거나, 포로의 생명이 위태롭게 될 어떠한 협정도 수락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트루먼은 제네바협정에 규정된 ‘자동송환원칙(강제송환원칙)’이 비인도적이고 부당하다면서 ‘자원송환원칙(자유송환원칙)’을 공식화했다.

 

그런데 미국 내부문서들은 많은 이들이 제네바원칙을 지지했음을 보여준다. 1951년 7월 정전회담 시작 전 주에 열린 합동참모회의는 “자의에 따른 송환은 그것이 인간적이며 또한 심리전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호소력이 있지만, 제네바협정을 위반하는 것이고 미국을 손상시킬지도 모르는 선례를 만들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변호사인 애치슨은 사적으로는 자동송환원칙에 동의한다고 했다. 하지만 애치슨은 트루먼과 함께 리지웨이 등 군인사들의 반대에도 자유송환원칙을 강력히 지지하였다.(21) 심리적․이념적 이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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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포로수용유적공원. 포로들의 생활상을 모형으로 전시했다.

 

미국은 자유의사에 따른 송환이 인도주의에 맞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도주의적’ 관점을 부각시킨 미국측의 자원송환원칙은 이후 무수한 ‘비인도적’ 결과를 양산했다. 포로송환을 둘러싸고 공산측과 유엔측의 논쟁은 1년 이상 지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상되었다. 건국 이후 한 번도 전쟁에서 패배한 경험이 없었던 미국으로서는, 동북아시아의 두 신생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채 협상을 통해 종전에 이르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미국은 포로교환을 둘러싸고 자원송환원칙을 관철함으로써 적어도 이념 전쟁에서라도 승리를 거두고자 했다. 

 

미국은 군사적으로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포로송환의 ‘영예로운 해결’을 통해 정치적․심리적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미국은 인도주의를 앞세웠지만 이는 공산포로들의 모국 송환을 부정하게 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의 심리적․도덕적 승리를 얻고 이를 정치적 선전 자료로 활용하겠다는 의도였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포로문제가 단순히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전쟁포로로 얼마를 교환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이념성을 다투는 이념전쟁 자체”였다.(22)

 

미국은 이러한 이념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공산 포로들의 송환을 최소화하기 위해 반공 교육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포로들에 대한 고문과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포로수용소 내에서는 친공산포로들과 반공포로로 나뉘어 서로에 대한 테러와 납치, 보복살해까지 자행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미군의 강제분류 심사에 반발하며 친공포로들이 수차에 걸쳐 폭동을 일으켰고, 1952년 5월 8일에는 포로들이 유엔군 포로수용소 소장인 도트 준장을 납치, 감금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도트 준장은 공산포로들에게 납치된 뒤, 미군의 강제 분류 심사와 이 과정에서 폭력, 고문, 협박, 학살 등의 불법행위가 있었음을 시인함으로써 미국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미군은 도트 준장이 납치에서 풀려난 뒤 포로들을 분리 수용하여 통제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미군의 분리정책에 저항하던 많은 포로들이 학살되었다.(23)

 

공산측 협상의 주요당사자였던 중국 또한 포로송환문제에서 강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오쩌둥은 포로송환 문제가 ‘정치문제’라고 보았으며, 누차에 걸쳐 포로송환문제를 양보할 수 없다고 천명했다. 그는 “만약 적이 양보를 거절하고 계속해서 지연시킨다면 우리는 즉시 선전을 확대하고 적의 휴전회담 결렬 기도와 침략전쟁 확대 음모를 폭로하고 국제여론을 동원하고 우리의 전선에서의 굳건한 방어와 결합시켜 적에게 계속해서 손상을 입혀 적이 최후의 양보를 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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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포로수용소유적박물관에 전시된 반공-친공포로의 대립을 보여주는 디오라마

 

반면, 북한지도부는 포로문제를 하루빨리 마무리하고 정전협정을 이루기를 바랐다. 1951년 1월 16일 북한 외무상 박헌영은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를 방문하여 “전 조선 인민은 평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전쟁을 계속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전달했다.(25) 소련정부의 통제로 보도가 되지는 않았지만, 1952년 3월 김일성은 소련의 <타스통신> 기자들을 불러 정전을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26)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 수차례에 걸쳐 강력한 정전 의지를 피력했다. 김일성이 포로문제의 조기 타결을 원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미 공군의 폭격 때문이었다. 김일성은 북한지역의 폭격피해가 이미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고 판단했다. 그는 1952년 7월 16일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에서 마오쩌둥의 강경한 입장에 동의하면서도 폭격으로 인한 북한의 막심한 피해를 동시에 강조하였다.

 

김일성은 “현재의 조선 상황을 분석해 볼 때 정전회담이 무기한 연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적은 막대한 인적 물적 타격을 주었다. 최근 북조선 내 모든 발전의 가동이 중단되었으며, 적 공군의 적극적 활동으로 발전소의 재가동이 어려워 경제는 모든 분야에서 큰 타격을 받고 있다. … 야만적 폭격이 있었던 지난 24시간 동안 평양에서만(1952년 7월 12일 밤 11시) 6천명 이상의 주민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적군은 이러한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여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27)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북한정권과 주민들은 인도주의를 강조하는 미국의 포로송환원칙과 이를 강경하게 거부하는 소련․중국 틈바구니에서 공중폭격을 1년간이나 더 견뎌야 했다.(28)

 

항공압력작전과 수력발전소 폭격

 

1952년 7월은 미 극동공군작전사에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7월에 수행된 평양 공습은 기존의 차단작전과는 다른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미 극동공군은 차단작전 중심으로 진행되던 기존의 폭격전략에 큰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이른바 ‘항공압력전략(air pressure strategy)’이라는 전략개념이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항공압력전략이란 공군력에 가해졌던 기존의 정치․군사적 제약요소를 제거하고 오히려 공군력을 ‘정치적 압력수단’으로 직접 활용하는 새로운 공군전략 개념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2년간 미 공군은 주로 전술적 역할에 치중했다. 극동공군은 제공권의 확보와 유지, 적의 이동 차단, 지상군에 대한 근접지원 등에 주력했다. 그런데 1952년 2월 차단작전 중심으로 진행되던 극동공군의 전략에 강한 이의가 제기되었다. 1월 18일 극동공군 작전부장으로 부임한 제이콥 스마트(Jacob E. Smart)는 유엔측이 정전협상에서 가장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해 극동공군의 전략을 대대적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월말 스마트는 다음과 같은 극동공군의 전투작전정책을 보고했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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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록강 북중 국경에 있는 수풍발전소

 

그것은 “첫째,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북한군과 중국군에게 효율적이고 적극적인 군사적 압력을 유지한다. 둘째, 유엔군사령부가 가장 유리한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현재의 한반도 정전협상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셋째, 일반적인 긴급상황에 대비하여 기타작전 수행능력을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1952년 3월 새로운 작전방침에 대한 상부의 재가를 확보한 스마트는 랜돌프(R. L. Randolph)와 메이요(B. I. Mayo)에게 “극동공군력을 최적으로 활용하여 북한의 공산군에게 최대의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고안해 내라”고 지시했다.

 

랜돌프와 메이요는 1952년 4월 12일 극동공군의 최우선 임무는 제공권 유지라고 하면서 남는 공군력을 “선별적 목표 파괴에 최대한 투입하여, 적에게 가능한 한 장비․보급․병력면에서 값비싼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걸 위해서 수력발전소, 기관차, 차량, 보급품, 도시와 촌락의 건물들이 공격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특히 공산측의 군사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보급지역은 핵심 목표물로 간주되었다.(30)

 

1952년 4월 28일 정전회담 유엔측 대표 조이 제독은 워싱턴의 지시에 따라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한 일괄타결안을 공산측에 제시했다. 이날 트루먼은 클라크(Mark W. Clark) 장군을 새로운 유엔사령관 겸 극동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클라크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오스트리아 점령군 사령관으로 일하면서 소련측과 직접 협상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는 “러시아인들과 함께 보낸 골치 아픈 2년은 공산주의자들의 숭배대상에 대해 알게 된 시기였다. 그들이 숭상하는 것은 힘(force)이었다”라고 말했다. 클라크는 항공압력이라는 새로운 공군전략을 구상한 스마트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줄 최적의 신임 상관이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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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공군의 폭격으로 파괴되는 수풍발전소

미 극동공군은 공산측 지도부와 인민에게 심리적 압박을 행사할 수 있는 첫 번째 목표로 북한지역의 수력발전소에 주목했다. 수풍, 부전, 장진, 허천, 부영, 금강산 등의 북한지역 수력발전소들은 일본의 최고 기술자들이 20년 이상의 공사기간을 통해 건설한 당대 최고수준의 시설들이었다. 이것들은 한반도 전력의 90% 이상을 생산해냈고, 만주지역 또한 전력소비의 10% 이상을 수풍발전소에 의지하고 있었다.(32)

 

1952년 6월 23일 최초로 수력발전소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F-84기 79대와 F-80기 45대가 동원되어 수풍발전소에 145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어 제5공군 F-51기들이 부전의 제3,4호 발전소를 공격했고, 제1해병비행단은 장진의 제3,4호 발전소를 공격했다. 해군 함재기들은 부전의 제1,2호 발전소와 허천발전소를 공격했다. 이후 제5공군은 4일동안 730회의 전폭기출격과 238회의 요격출격을 기록하였다. 폭격 후 분석관들은 북한의 전력생산 잠재력의 90% 이상이 파괴되었다고 평가했다. 1952년 9월 12일에도 B-29기 31대가 출격하여 수풍댐을 대량 폭격하였다. 극동공군은 발전소 부근에서 특정한 움직임이나 복구활동이 관찰되면 어김없이 대량 폭격을 감행했다.(33)

 

미 공군의 수력발전소 폭격은 공산측 지도부와 인민들에게 커다란 심리적 압박감을 주었다. 그러나 이 시기 인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킨 것은 민간인 거주지역에 대한 무차별폭격이었다. 1952년 7월 10일 미 극동공군의 새로운 작전지침이 제5공군의 폭격기사령부에 하달되었다. 북한 내 적군에게 최대의 압력을 가하기 위해 이용가능한 항공전투력을 모두 투입해 파괴목표를 최대한 공격하라고 요구했다. 이때부터 북한지역의 촌락과 도시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핵심적 공격대상으로 재설정되었다. 새로운 지침 하달 후 제5공군은 폭격기의 파괴목표로 북한의 촌락과 도시 78개를 선정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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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공군의 수풍발전소 폭격

1952년 7월 11일 극동지역 모든 항공부대가 평양의 30개 목표공격에 투입되었다. 야간에도 54대의 B-29기들이 쇼란 폭격을 감행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래 최대인 1,254대의 전폭기와 폭격기들이 평양공격에 투입되었다. ‘프레셔펌프작전(Operation Pressure Pump)’으로 명명된 작전이었다. 평양방송은 미 공군의 공습으로 1만5천동의 건물이 파괴되고 7,000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35)

 

평양뿐만 아니라 북한의 전역이 이와 유사한 공격을 받았다. 미 공군은 북한지역 주요 촌락과 도시를 연일 폭격했다. 기상악화 등으로 비행자체가 불가능하거나 다음날의 대량출격을 위해 대기명령이 내려지지 않는 한 전면적인 항공압력작전이 계속되었다. 폭격의 양상은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시키는 모습을 띠었다. 미 공군의 이 같은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북한 전역이 초토화되고 수많은 건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952년 7월 이후 제5공군 전폭기와 경폭격기도 ‘작전계획72-52(Operations Plan 72-52)’에 따라 민간시설 폭격에 적극 나섰다. 이는 전선으로 이어지는 주보급로 주변보급지역, 항구에서 이어지는 도로주변의 보급지역에 대한 조직적 공격이었다. 미 제5공군기들은 좌표지점을 중심으로 집중폭격을 가했고, 좌표지점과 주변지역은 완전히 황폐화되었다.(36)

 

북한과 중국의 미군의 세균전 폭로

 

한편, 이 무렵 세균전 문제가 등장하면서 미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1952년 2월 22일과 3월 8일, 북한 외상 박헌영과 중국 외상 저우언라이는 미 공군이 세균전을 감행하고 있다며 유엔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미국은 이를 강력히 부인하였으나 북한과 중국은 미국이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하자 세균전을 감행하여 정전협상을 유리하게 이끌려 한다고 비난했다. 북한과 중국의 요구로 국제과학위원회(ISC)와 국제민주법률가협회(IADL)가 북한에 파견되어 이 문제를 조사하게 되었다.

 

국제과학위원회와 국제민주법률가협회는 북한과 만주의 오염지대를 조사한 후 “오염지대에 인간과 동물에게 각종 전염병을 감염시키는 여러 가지 물고기, 풍뎅이, 거미, 벼룩, 모기, 쥐 등이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생물들은 그 대부분이 지역 토산이 아니거나 아직 발생시기가 안 되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조사단은 결론적으로 일본군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질병을 퍼뜨리기 위하여 사용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것은 아니더라도 거의 유사한 방법을 미 공군이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따라서 동 조사단의 의견으로는 괴질병에 걸려 있는 많은 곤충들이 1952년 4월 4일~5일에 걸쳐 야밤에 비행기로 강남지방으로 운반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비행기는 미국의 F82 쌍발야간전투기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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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중국에서의 세균전에 관한 국제과학위원회의 사실조사 보고서’-니덤보고서.

스티븐 엔티콧과 에드워드 해거먼은 방대한 실증자료를 토대로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을 썼다. 그 책에 의하면, 6.25전쟁 당시 북한군과 중국군에 의해 격투 당해 포로가 된 미군 조종사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세균전에 가담했다고 진술했다. 총 36명의 미국 장교가 생물학전에 참여했다는 내용의 자술서를 제출했는데 이 중 현재 27개의 자술서를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제5공군 소속 조종사들로, 대령 2명, 대위 2명, 중위 20명이다.(38)

 

공산측은 이들 장교들로부터 미군 지휘부의 생물학전 결정에 관한 정보, 미국의 생물학전 선택의 배경, 세균무기 생산기지, 사용된 세균무기 유형, 유포 질병의 종류, 생물학전 수행 방식, 생물학전의 역사․개발․훈련에 관해 군인들에게 행한 강의 내용, 미 세균전 프로그램 진행 단계, 보안주의 사항, 그리고 세균전 결과에 대한 미군의 평가 등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스티븐 엔티콧과 에드워드 해거먼에 의하면, 중국은 조종사들의 진술서를 바탕으로 세균전과 관련된 퍼즐조각을 맞췄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심각한 패퇴에 직면한 1950년 12월, 미 합동참모본부는 1951년 말까지 생물학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를 완료하라고 연구 개발 부서에 지시했다. … 당시 미 공군 참모총장 반덴버그 장군은 구식 전투기 교체 명목으로 최신예 F-86 세이버 전투기 75대를 한국에 배치하도록 명령했다. 개발 담당 참모차장 G. P. 사빌 소장에 의하면 이 비행기들은 세균전 프로그램 수행과 관련돼 있었다.

 

11월, 군산의 제3폭격비행전대 소속 B-26 폭격기들과 오키나와 제20공군 소속 B-29 중형 폭격기들에 의해 실험이 시작됐다. … 1951년 12월 말 이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 합동참모본부가 세균전 범위를 압록강 북쪽 중국까지 확대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작전은 1952년 1월 시작됐다.”(39)
 
한편, 중국은 1952년 5월 24일 즈음에 미 생물학전 프로그램이 실험 단계에서 작전 단계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명령은 제5공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글렌 바커스 장군이 내렸다. 바커스는 이는 “단순한 군사 정책이 아닌 국가 정책의 문제이며 1급 기밀 적용 대상”이라고 말했다. 작전에는 믿을 수 있고 충성스러운 군인들로 바커스가 직접 뽑은 조종사들만 투입됐다. 세균전의 목표는 “만주에서부터 38선 근처의 주요 저항선까지 남쪽으로 이동하는 병력과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북한 중앙부를 가로지르는 오염 벨트를 만드는 것”이었다. 미국이 생물학무기를 도입한 이유는 ‘전쟁을 빨리 끝내고 미국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과 같은 이유였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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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 당시 미군이 세균을 살포한 38선 이북 지역 지도(자료 :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그러나 이러한 그림조작을 맞추는 데 결정적인 바탕이 되었던 미 공군 조종사들은 나중에 미국으로 송환된 뒤에 모두들 “자백이 거짓이며 협박에 의한 것”이라고 부인했다.(41) 하지만 미국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많은 자료들이 미국의 세균전 의혹을 충분히 뒷받침해주고 있다. 미국은 이미 2차 세계대전 중에 적국인 일본의 세균전 개발에 자극받아 이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미국은 핵무기 개발로 세균무기는 실전에서 사용할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전쟁이 끝난 뒤 일본 전범세력과의 비밀 거래를 통해 광범위한 세균전 실험 정보까지 확보했다. 생물학 무기의 보유는 당연히 사용을 재촉한다. 미국은 냉전 초기에 일어난 한국전쟁에서 이 같은 무기를 실험, 사용했고, 한국인과 중국인은 이 실험의 대상이 되었다.(42)

 

물론 세균전 문제는 아직도 명확하게 미국 내부 자료를 통해 확인된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는 엄밀하게 말해 ‘의혹 수준’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내부 자료를 통해 확인되지 않았을 뿐 많은 것들이 미국의 세균전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어쩌면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는 미 극동공군의 활동과 관련된 미국의 극비문서에 그걸 확인해주는 증거 내용이 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와 같은 세균전 의혹과 공산포로 고문 문제 등으로 미국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미국은 자유의 화신,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추악한 전쟁범죄자’로 간주되었다. 영국 등 우방국에서도 미국의 전쟁 수행 방식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휴전에 대한 여론의 압력이 높아졌다. 세균전과 포로 문제가 폭로됨으로써 공산측은 정전협정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불리한 세계여론에도 불구하고 이념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사고를 버리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한반도, 특히 북한의 인민들은 지금까지 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미 공군(유엔군)의 강화되는 심리전

 

한편, 미 극동공군과 유엔군은 1952년 하반기부터 심리전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주로 삐라와 방송을 통해 진행된 유엔군의 심리전은 한국전쟁 초기부터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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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봄호수님의 댓글

봄호수 작성일

장문이라서 전부 올려지지가 않네요 
남어지는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9835
클릭하여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