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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에 의한 학살사건(4)-미군기의 전선·남한지역 전술항공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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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봄호수 작성일17-02-28 23:03 조회2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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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에 의한 학살사건(4)-미군기의 전선·남한지역 전술항공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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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9 의 융단폭격 (자료사진편집입력/재캐나다동포전국련합회)


<연재> 임영태의 한국현대사, 망각과의 투쟁(37)

임영태  |  ytlim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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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2.28  00:3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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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한국전쟁 초기 미 공군의 역할

공중폭격은 미국의 한국전쟁 수행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미군(유엔군)은 기습공격으로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채 밀리던 초기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장비나 군사력의 면에서 공산군을 압도했다. 그럼에도 전황은 미국의 의도대로 잘 풀리지 않았다. 전쟁은 최종적으로는 무승부로 결정이 났지만 미군은 전쟁 내내 지상전에서 그 이전 어떤 전장에서도 경험해보지 새로운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제공권을 완벽하게 장악한 공군의 지원은 지상전의 열세를 만회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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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크기(YAK-9) / 6.25 전쟁 당시 전투기 및 폭격기(출처: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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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51기 / 6.25 전쟁 당시 전투기 및 폭격기(출처: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전쟁 발발 직후 맥아더는 미 제24사단 병력을 투입해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제24사단의 실병력은 평시편제인 1만2천명에도 미치지 못했고 거의가 실전경험이 없는 신병들이었다. 이들 병력 중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대대장 C. B. Smith) 가 특수임무부대(스미스부대)로 지정되어 7월 2일 가장 먼저 대전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 부대는 오산 북방 죽미령에서 맞은 최초의 전투에서 전체 병력의 1/3 이상을 상실했다.(1) 7월 5일에는 뒤이어 도착한 34연대를 평택과 안성에 각각 배치하고 지연전투에 나섰으나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는 실패했다.(2)

전쟁초기 북한은 주요지역에 대한 침투공격을 위해 보병사단에 탱크대대를 부속시켰다. 반면, 미군은 전쟁초기 탱크를 저지할 수 있는 병력과 지상무기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 전쟁초기 지상에서는 확실히 북한 인민군이 한국군이나 미군보다 전력면에서 앞섰다.(3) 미 지상군은 7월 20일까지 평택-천안, 전의-조치원, 금강(공주-대평리), 대전에서 북한군 제3·4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으나 제24사단장인 딘(W. F. Dean) 소장이 행방불명되었다가 포로로 잡히는 패배를 경험해야 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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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29기 / 6.25 전쟁 당시 전투기 및 폭격기(출처: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대전이 함락 후 유엔군은 금강저지선도 위협받았다. 미군은 인민군 정규전뿐만 아니라 기습 공격과 피난민 속에 위장한 채 접근하는 게릴라전에 심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과 잘못된 판단이 결국 노근리 사건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5) 중공군 참전 뒤 미군은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공산군(중공군과 북한군)은 매복과 기습, 선택과 집중을 통한 새로운 유형의 공격으로 유엔군(미군)을 당혹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 시기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 미군이 거둔 신화는 한국전쟁에서 거의 먹혀들지 않았다.

미군은 이러한 지상전의 어려움을 압도적인 공군력을 바탕으로 한 공중폭격으로 만회하고자 하였다. 미 공군은1950년 7월 20일 이후 한반도 상공에서 제공권을 완벽히 장악함으로써 자신의 목표를 수행할 수 있었다. 7월 20일경 이미 대전이 인민군의 수중에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대전이 점령되면 이후 인민군은 노도처럼 밀어붙여 남한 전체를 장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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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전경

그러나 이 무렵 이미 북한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은 “파국적 상황”이라며 전선사령관 김책과 총참모장 강건(강건태)을 강하게 질책할 정도로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김일성이 파국적 상황을 거론한 것은 한국전쟁 초기부터 대거 투입된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인해 후방인 북한지역의 교통과 산업시설이 파괴되었으며, 동시에 남한지역에서도 전선과 후방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으로 인해 군대의 이동 자체가 어려움에 봉착했기 때문이다.(6)

미군이 제공권을 장악하여 남한 전선에 대한 근접지원작전과 북한 지역에 대한 전략 폭격을 감행하면서 인민군의 진격 속도는 현저하게 늦어졌다. 미 공군의 공중폭격 때문에 인민군은 낮에는 이동하지 못하고 야간에만 이동해야 했다. 보급품의 이동과 병력 이동 또한 공중폭격으로 어려움을 겪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미 공군의 공중폭격은 한국전쟁 기간 내내 공산군측에 막대한 피해를 안겨주었고, 공산군의 전쟁 수행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는 최대의 장애물로 작용하였다. 특히 초기 미 공군의 전선지역 근접항공지원과 북한군 차단공격은 북한의 남한 점령 계획을 무산시키는 데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군의 공중폭격을 둘러싼 논쟁

미 공군은 한국전쟁에서 이처럼 중대한 역할을 했지만, 그에 대한 학자들의 체계적인 연구는 부족한 편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자료적 제약이 큰 원인이었다. 미 공군의 작전보고서가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은 채 비밀문서로 묶여 있어서 체계적인 연구가 어려웠던 것이다. 반면, 일찍부터 비밀자료들에 접근할 수 있었던 일부관계자들은 미 공군의 입장을 대변하는 주장을 펴는데 주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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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51 무스탕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입장을 잘 반영한 책으로는 미국 공군대학의 풋트렐이 1958년에 발간한『한국전쟁기 미 공군, 1950~1953(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김태우에 의하면, 저자인 풋트렐은 한국전쟁 미 공군의 모든 역량이 ‘군사목표’의 공격에만 집중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사실상 민간지역 폭격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미 공군측 입장을 대변하는 책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이런 책들은 현재 시점에서도 접근 불가능한 1차 자료들까지 포함한 방대한 자료를 이용하여 미 공군의 활동을 분석하고 있지만 하나같이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도시와 농촌지역 폭격사실을 증명하는 당대의 수많은 문서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고 평가된다.(7)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 공군의 공중폭격이 북한지역을 초토화하고 민간인을 대량으로 살상한 사실은 명백하다. 수정주의적 입장에 선 많은 한국전쟁 연구자들도 미군 폭격의 범죄성을 고발하고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할리데이(Joe Halliday)와 미국의 역사학자 커밍스(Bruce Cumings)는 공동저작에서 한국전쟁 사망자를 3백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면서, 이토록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첫 번째 원인으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심했던 (미군의 공중)폭격”을 꼽았다.(8) 그러나 이들이 주로 활용한 자료들은 <뉴욕타임즈>나 <런던타임즈> 같은 한국전쟁기 미국과 유럽의 언론기사였다. 1980년대 후반까지도 미 공군이 생산한 원자료의 상당부분을 전혀 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966년 ‘정보자유법’이 개정되면서부터 미국은 정부의 주요 문서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전쟁 관련 문서들도 해당 법령에 따라 1970년대 중반부터 공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전쟁기 미 공군자료의 대부분은 1970년대 중반 이후에도 오랫동안 비밀자료로 묶여 있었다. 미국은 한국전쟁기 한반도의 도시와 농촌 지역 폭격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미 공군 자료들을 비밀자료로 취급해 비공개 대상으로 분류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1995년 클린턴 대통령이 대통령령 ‘E.O.12958’을 공포, 정부 소장 기록물 중 25년이 지난 ‘비밀기록물’ 대부분을 2000년까지 일괄 해제하라고 지시하면서 공군자료 또한 비밀자료로 묶어둘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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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80 슈팅스타

이에 따라 1996년 1년 동안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은 1억3천1백만 장의 비밀문서를 검토하여 그 중 1억1천1백만 장을 비밀해제했다. 그러나 미 극동공군의 활동과 관련된 RG342 등의 자료들은 1996년 이후에도 비밀문서로 묶여 있다가 2000년에야 비로소 비밀해제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이처럼 뒤늦은 비밀해제는 한국전쟁 문서군 중에서도 이례적이다. 그 뒤 미 공군역사연구소가 소장한 한국전쟁 관련 자료들도 대부분 비밀해제하여 2008년 7월 1일 현재 1955년 이전 기록물의 90% 이상이 공개된 상태이다.(9)

커밍스와 할리데이는 이처럼 미 공군의 원자료가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전쟁기 언론의 목소리를 빌어 공중폭격의 잔학상을 알리고자 하였다. 그들의 연구가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비인도적 성격을 폭로하는 데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자료 활용에서는 많은 한계를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미 공군이 주장한 ‘군사적 폭격’이라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자료적 근거가 부족했던 것이다.(10) 그런데 육군사관학교 교수인 크래인(Conard C. Crane)은 비밀문서 해제된 미 극동공군 관련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활용하여 펴낸『한국에서 미 공군의 전략, 1950~1953(American Airpower Strategy in Korea, 1950~1953)』을 통해서 미 공군측의 주요 주장들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크래인은 한국전쟁기 공군력의 ‘군사적 한계’를 명시적으로 지적하였으며, 동시에 중공군 참전 이후 미 공군의 북한 도시와 농촌지역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격 사실을 당대 자료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군사목표’만을 폭격했다는 기존 미 공군측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그가 육사 교수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그의 저서는 미 공군의 북한지역 민간인 폭격을 군사적 관점에서만 다루었을 뿐, 전쟁 초기 미 공군의 남북한 민간지역 폭격사실은 분석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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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 위의 융단 폭격

사실 미국이 공개한 자료들 가운데는 미 공군기들이 ‘군사목표’에 따라 폭격을 감행했다는 걸 보여주는 자료는 차고 넘친다. 역시 미 공군기들이 군사적 목표뿐만 아니라 민간인 지역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들 또한 차고 넘친다. 결국 어떤 자료를 바탕으로, 어떤 관점에서 보는가가 중요한 셈이다.

한국전쟁기 미 공군은 초기 ‘군사목표’의 파괴에 중심을 두고 폭격작전을 폈으나 실제로는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격을 감행하는 결과를 낳았다. 미 공군은 전쟁 초기부터 북한지역에 대한 전략폭격·차단작전과 함께 남한지역에서 아군을 지원하기 위한 전술항공작전을 동시에 전개하였다. 북한지역에 대한 전략폭격에서 민간인지역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충분히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남한에서 전개한 전술항공작전에서는 어땠을까? 미 공군기는 아군에 대한 오폭과 함께 민간인 지역을 폭격하여 수많은 민간인을 살상하였다. 미국측은 폭격에 의한 남한에서의 민간인 살상을 거의 인정하지 않고 극히 일부에 대해서만 ‘오폭’을 인정할 뿐이다. 그러나 남한에서 발생한 미군기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희생은 대부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상황에서 일어난 일들로써 엄밀하게 말하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학살’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미 공군의 남한지역 전술항공작전

1950년 7월 3일 미 공군참모총장 반덴버그는 미 본토의 전략공군사령부 예하 제15공군의 2개 중폭격기부대에 극동지역 임무 수행을 명령했다. 미 극동공군 사령관 스트레이트메이어는 새로운 중폭격부대들이 합류하자 7월 8일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FEAFBC: Far East Air Forces Bomber Command))를 도쿄의 요코다 기지에 창설했다.(12) 폭격기사령부는 전략공군에서 차출된 중폭격기 2개 전대(제22폭격전대와 제92폭격전대)와 제31전략정찰대대, 극동공군의 제19폭격전대로 구성되었다. 오도넬(E. O'Donnell) 소장이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미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의 주요 임무는 북한군의 전투력에 기여하는 북한지역 산업시설과 군수창고, 유류저장소, 한강-삼척 라인 북쪽의 도로·철로·항만과 항공시설 등을 파괴하는 일이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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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스키토 정찰기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최초로 북폭에 투입된 미 공군은 극동공군 산하 제5공군(Fifth Air Force: FAF) 소속의 제3폭격전대였다. 제5공군은 일본 나고야에 사령부를 두고 일본 본토 방어 임무를 수행 중이었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남한지역 전술공군작전을 담당했다. 그러나 일본에 기지를 두고 작전을 전개하던 제5공군은 항속거리 문제가 자주 발생하자 한국으로 기지 이전을 모색하였고, 대구비행장(K-2), 부산 수영비행장(K-9), 포항비행장(K-3) 등 3개의 비행장을 확장하여 8월부터 전술부대의 작전기지로 활용하였다. 제5공군은 필리핀 주둔 일부 공군부대의 작전통제권도 이양받았고, 7월 24일 전방사령부를 주한 미 제5공군사령부(HQ. Fifth Air Force in Korea:FAFIK)로 개칭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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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술항공통제 비행부대의 모스키토 요원들

제5공군이 주로 남한지역에서 수행한 전술항공작전(Tactical Air Operations)이란 적 지상군과 그 지원 시설의 발견과 파괴, 제공권 확보 등을 위하여 육군 또는 해군과 협력하여 벌이는 공군 작전을 말한다. 여기에는 적 병력이나 보급품이 전선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교통중심지역, 조차장, 도로, 철도, 병력이동로, 이동병력의 숙소 등을 파괴하는 후방차단작전과 육군을 비롯한 지상군의 작전지역 내 혹은 그 주변 지역에서 지상군에 직접적으로 화력을 지원하는 근접지원작전이 있다.(15)

한국전쟁 초기 지상에서 전투중인 미 지상군에 대한 공군의 직접적인 화력 지원은 모두 전술항공작전의 영역에 포함된다. 적 후방지역을 폭격하는 전략폭격은 목표물의 사전 선정과정을 통해 비교적 폭격이 선명하고 체계적으로 진행되지만, 전술항공작전은 매일 급변하는 전황에 따라 다양한 경로를 통해 폭격이 수행되었다.(16)

전쟁 초기부터 남한지역 전술항공작전을 전담한 부대는 미 제5공군이었다. 또 다른 항공전투부대인 극공공군 폭격기사령부는 극동공군 사령관의 명령이나 제5공군 사령관과의 조율 이후에만 38선 이남지역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제5공군의 임무는 전투지역 제공권의 우위 유지, 일본에 대한 영공방위, 적의 수송수단과 교통시설 파괴, 병력 이동 및 호위, 수색·정찰 및 구조업무, 폭격기사령관과의 조율 아래서 38선 이북지역 작전 수행 등이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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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중 미국 폭격기가 경기도 인근에 네이팜탄을 퍼붓고 있다.

한국전쟁 초기 미 공군은 전술항공작전을 수행하는 데서 상당한 혼란을 경험했다. 극동공군은 원래 방어 목적의 부대였기 때문에 공격 경험이 없었다. 한국전쟁 이전의 제5공군은 일본 영공 방위를 담당한 부대였으나 일본의 미8군과 함께 어떤 합동훈련을 해본 경험도 없었다. 전술항공작전을 위한 인력과 장비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지상군과 전술항공 사이의 공대지작전을 통제하는 메커니즘의 심장부는 합동작전센터(Joint Operations Center, JOC)였다. 이곳의 공대지작전부는 전술항공작전을 위한 육군의 요구를 접수하는 곳이었고, 전투작전부는 전술항공부대에 이 요구들을 명령으로 이행하는 기구였다. 공대지작전부는 육군장교들로 구성되며 육군사령관을 대표했고, 전투작전부는 공군 병력으로 구성되며 전술공군사령관을 대표했다. 7월 5일 제5공군 작전부장 머피는 대전으로 가서 24사단 본부 내에 합동작전센터(JOC)를 수립했고, 이로써 미 육군과 공군 사이의 안정적인 협조체계가 구축되었다.(20)

합동작전센터와 함께 제5공군의 공대지작전에서 핵심적 위상을 차지한 기구는 전술항공통제센터(Tactical Air Control Center, TACC)였다. 제5공군사령관은 전술항공통제센터를 통해 자기 휘하 부대의 모든 공군활동을 통제하였다. 전술항공통제센터는 처음 대전에서 급조되었다가 일본 이다즈께에 제6132전술항공통제대대가 수립된 후 즉시 대구로 이동하여 완전한 형태를 갖추었다. 7월 20일 주한 제5공군본부가 합동작전센터와 전술항공통제센터가 있는 대구에 자리를 잡으면서 명령과 통제가 한 장소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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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중 미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온 몸에 화상을 입은 한국 민간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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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2월 네이팜탄 공격으로 화상을 입은 여성 3명이 경기도 수원 근처 진료시설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전술항공통제시스템의 최전방부대는 전술항공통제반(Tactical Aircraft Control Parties, TACP)이었다. 이는 전방 육군부대 주변에서 근접항공지원공격을 통제하기 위해 특별히 조직된 팀이었다. 전술통제반은 무전기를 갖춘 지프 차량과 경험 있는 조종사인 전방사령관, 차량의 통신장비를 운동하는 공군 사병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한국거친 도로가 무전기 지프차를 쉽게 망가뜨려 임무 수행에 어려움이 있었다.

미 공군은 지상에서 지프를 타고 수행하던 임무를 모스키토라는 공중통제관이 타는 항공기가 수행함으로써 어려움을 상당부분 해결하였다. 소형 모스키토기는 모기처럼 웽웽대는 소리를 냈는데, 이 작은 모기소리가 폭격기라는 말벌의 독침을 불러오는 역할을 했다. 이 모스키토기들이 사전 정찰을 통해 F-80과 같은 빠른 속도를 내는 전폭기들에게 무전기로 목표물을 알려주는 길잡이 역할을 했던 것이다.(22)

전폭기들은 지상의 전술항공통제반이나 모스키토 해머(Hammer)의 지시에 따라 목표지역을 공격했다. 많은 경우 전폭기들이 현지의 지상이 공중 통제관의 지시가 내려질 경우 목표물이 아군이나 민간인으로 의심되는 경우조차도 어김없이 폭격을 수행했다. 때로는 통신이 원활하지 못할 경우, 전술항공통제센터가 직접 목표물을 지정해주거나, 조종사들 스스로 정찰활동을 통해 목표물을 찾아다니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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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5월 한국전쟁에서 300만 갤런 째 네이팜탄 투하를 기념하며 찍은 사진. 중앙이 제5공군 제8전투폭격단 사령관 그룸블스 중령(Wilbur J. Grumbles)이고 오른쪽이 조종사 체널트(Charles J. Chenault) 대위.

남한지역에서 전술항공작전에 주로 투입된 전폭기 F-80은 항속거리가 짧아서 목표물 상공에 10~15분의 짧은 시간밖에 머물지 못했다. 이런 짧은 항속거리는 민간인 지역 폭격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정확한 폭격 목표를 찾아내지 못할 경우 장착하고 온 폭탄을 모두 민간인 지역에 ‘소진’해 버렸던 것이다. 이때 위력을 발휘한 것이 바로 네이팜탄이다. 네이팜탄은 남북한을 가리지 않고 한반도 전역을 초토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네이팜탄(napalm bomb)은 네이팜(napalm)(23)이 들어 있는 공중폭탄을 말했다. 네이팜은 과거의 소이탄보다 더 오래 더 넓은 곳을 불태웠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네이팜 농축액 생산량은 연 3천5백만 킬로그램에 달했고, 네이팜을 원료로 하는 M-69폭탄은 약 3천만 개가 제작되었다. M-69는 태평양 전쟁에서 수많은 일본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을 희생시켰다. M-69는 네이팜으로 가득찬 파이프 모양의 신종폭탄으로 일시에 폭파하며 네이팜을 사방을 흩뿌렸는데 반경 90미터까지 날려 보낼 수 있었다. 구식 소이탄은 폭탄 추락지점만 태웠지만, M-69는 수백 군데에 동시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24)

‘오폭’이 아닌 ‘학살’

항공기를 이용하여 지상병력에 직접적으로 화력을 지원하는 작전을 ‘근접지원작전(Ciose Air Support, CAS)’이라고 부른다. 근접지원작전은 지상군이 수세에 몰렸던 한국전쟁 초기 남한지역에서 특히 강조된 미 공군의 작전개념이었다. 전쟁 초기 미군은 인민군의 격퇴를 목표로 하기보다는 진격을 지체시키는 것을 실질적인 목표로 설정하였고, 이때 인민군의 예봉을 무디게 하기 위해 활용된 것이 근접지원작전이다. 근접지원임무는 1950년 6~9월 미 극동공군의 작전에서 가장 중요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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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1951)

남한지역 근접지원작전은 대부분 제5공군 전폭기들의 몫이었다. 다급할 때는 B-29중폭격기가 동원되기도 했지만 F-80기나 F-51기와 같은 전폭기의 활약에 비할 바 아니었다. 1950년 7월 10일 미 공군은 전선부근 근접지원작전을 통해 평택에서 북한 트럭 117대와 탱크 38대를 파괴하였다. 7월 17일에는 대전 동남방 8㎞ 금강 근방에서 근접지원작전을 통해 북한군을 혼란에 빠뜨려 일시 후퇴하게 만들었다. 7월 30일 제5공군의 F-80편대가 황간 동북쪽 2마일 지점의 대포 8문과 다수의 자동차들을 파괴했다. 이런 맹활약에 지상군 사령관들은 극동공군사령관 앞으로 연일 전폭기 근접지원작전에 감사하는 편지를 보냈다.(26)

한국전쟁 초기 극동공군의 폭격선은 전황의 변화에 따라 바뀌었다. 1950년 7월 1일 미 육군은 한강 남안을 따라 공식적인 폭격선을 최초로 설정했다. 미 공군 수뇌부는 조종사들에게 폭격선 남쪽의 목표물을 공격할 때는 공격 이전에 적극적으로 목표물을 확인하라고 요구하였으나 폭격선 북쪽의 목표물에 대해서는 제한 없는 공격을 허락했다. 폭격선은 전선이 남하함에 따라 계속 남쪽으로 이동했고 제한 없는 공격의 범위는 점차 남한지역 전반으로 확장되었다. 7월 3일 서울, 7월 12일 충주, 7월 26일 영주·대전·전주, 8월 3일 진주, 9월 12일 포항 등의 도시들이 근접지원작전의 대상에 포함되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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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초기 미 공군 폭격선의 변화

미 공군의 근접지원작전은 전쟁 초기의 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문제를 노출했다. 1950년 7~9월 내내 지속적으로 유엔군 병력에 대한 오폭이 있었다. 1950년 7월 3일 F-51무스탕기 5대가 평택과 오산 사이의 도로 위 한국군을 인민군으로 오인하여 공격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8월 10일에는 F-80전폭기가 미 제19연대의 분대원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해 3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8월 29일에는 24연대의 미군과 한국군 병사 21명이 기총소사로 부상을 당했다. 9월 10일에는 제68전천후 전투기대대의 한 조종사가 유엔군 영역 내의 교량을 폭격하였으며, 같은 대대의 대대장은 대구를 김천으로 착각하여 도시 한가운데서 3차례나 기총소사를 했다.(28)

9월 23일에는 4대의 F-51기가 영국 27여단을 향해 네이팜과 기총소사 공격을 가해 6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미 공군은 오폭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했으나 오폭은 반복되었다. 9월 24일과 26일 미군 비행기가 미 제7사단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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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12. 21. 경북 왜관, 낙동강 철교 어귀에 부서진 채 버려진 북한군의 소련제 탱크

미 공군기의 아군에 대한 ‘오폭’은 대부분 조종사들이 초목으로 덮인 한국지형에 익숙하지 않았고, 공중에서 아군과 적군을 정확히 구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러나 전쟁 초기 전선 주변의 도시와 촌락에 대한 폭격은 대부분 오폭이 아니었다. 미 공군 전폭기의 수많은 임무보고서(Mission Report)는 전선 인근의 촌락들이 주요 목표물(target)이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군기들은 인민군이나 빨치산 등 적군의 존재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빈번하게 공격을 가하곤 했다.(29)

미 공군기들이 남한 도시와 촌락을 폭격한 표면적 이유는 해당지역이 북한군 “병력집결지(troop concentration)” 또는 “보급품집적소(supply dump)”라는 것이었다. 이는 워싱턴의 공식입장이기도 했다. 1950년 9월 6일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한국에서 미 공군의 목표물은 철저히 “침략자들의 군사적 목표물”에 한정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애치슨은 오히려 공산주의자들이 주요 군사지역에 민간인을 동원하거나, 민간인 거주지역을 군사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민간인의 희생을 증폭시켰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의 신성모 국방장관도 8월 10일 “군수·군기나 전차 같은 것을 민가나 또는 극장·학교건물 같은 데로 은닉 도피시켜 우리의 공격을 부득이하게 만들어왔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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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12.28. 끊어진 한강 철교, 오른쪽은 임시로 만든 부교

미국은 자신들이 인도주의적 원칙을 준수하고 있다면서 공식적으로 민간인 거주지역에 대한 폭격사실을 계속해서 부인하였다. 이 같은 워싱턴의 방침은 미 극동공군의 문서작성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1950년 9월 4일 미 극동공군사령관은 “도시지역은 본질적으로 공격의 대상이 아니지만, 촌락과 도시에 위치한 병참시설, 산업시설, 적의 병력과 장비는 실질적 목표가 된다는 원칙이 수립되었다”고 통보했다. 이러한 지시는 외형상 민간인 거주지역에 대한 폭격을 제한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도시와 촌락의 폭격을 승인해준 것이었다. 또한 스트레이트메이어는 문서작성 시 ‘촌락을 파괴하다’라고 표현하는 대신 ‘촌락 내 보급품집적소를 파괴하다’와 같이 표현하라고 지시했다. 추후 발생할 수 있는 논란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도시와 촌락에 대한 폭격은 반드시 군사적으로 해석·지시·보고되었다.(30)

미 공군은 처음에는 근접지원작전의 목표였던 북한군 병력과 차량·탱크, 기타 보급품에 대한 공격을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북한군이 공중폭격을 피해 철저히 은신하고 야간에만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미 공군이 공격목표를 탐색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미군 전폭기 조종사들은 “주간에 당신은 마을은 물론 어떤 지형에서도 적 병력을 거의 볼 수 없다. 당신은 모든 흔적들을 추적하는 수밖에 없다. 지나간 자국 또는 꺼진 불 등 모든 것이 추적의 대상이다. 잠복한 적 병력을 실질적으로 발견한다는 것은 극도로 어렵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병력이 숨어 있을 것처럼 보이는 장소를 찾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31)

미군 조종사들이 개활지에 나와 있는 사람들조차 적군인지 아군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은신처에 숨어 있는 적 병력을 발견해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런 어려움이 비극적 현실을 낳는 요인이 되었다. 전폭기 조종사들은 짧은 시간 내에 은신한 적을 찾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적으로 의심되는 것들’, ‘적으로 믿고 싶은 것들’, ‘증거는 없지만 적을 육감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했던 것이다. 또한 전폭기 조종사들은 자신의 임무성과 보고와 비행기착륙 시 안전을 위해 이륙 당시 장착한 폭탄 일체를 임무지역에서 완전히 ‘소진’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전폭기 조종사들에게 노출된 민간인과 촌락은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다.(32)

미군기의 무차별인 민간지역 폭격

근접지원작전의 경우, 미 공군 조종사들은 해당 지역의 적 존재여부나 민간인 존재여부와 상관없이 전술항공통제반이나 모스키토의 공격지시에 따라 무조건 공격을 감행했다. 1950년 9월 20일 오후 4시 40분에 이륙하여 6시 15분에 기지로 돌아온 제49전투폭격전대 제7전투폭격대대의 일개 편대는 모스키토 해머의 지시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김천 읍내를 공격했다. 전폭기들은 김천 읍내의 어느 구역에 적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되묻지도 않고 그저 “읍내에 남아 있던 가옥들과 건물들”에 로켓을 발사하고 기총소사를 가했다.(33)

9월 23일에는 제7전투폭격대대의 F-80 4대가 경북 의성군 의성읍에서 똑 같은 방식으로 공격을 가했다. 조종사들은 해당 모스키토의 지시에 따라 해당지역에 “로켓 10발과 50구경 기관총을 발사했다. 편대는 병력을 볼 수 없었기에 사살된 적 병력 현황을 알 수 없었다,” 공격 후 편대는 어떤 적 병력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다음날 김천에서 똑 같은 양상의 근접지원작전이 펼쳐졌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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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기의 융단 폭격.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에서 미 공군에 의해 이처럼 융단폭격이 감행되어 주변이 폐허로 변했다.

그러나 당시 김천 시내에는 북한군이 거주하지 않았다. 북한군은 미 공군의 근접지원폭격이 본격화되자 이를 피하기 위해 모두 산으로 숨어들었다. 더욱이 김천은 수일 전부터 미 공군의 폭격이 집중적으로 실시돼 부근의 북한군 부대들은 모두 시내를 벗어나 인근 산 속에 은신해 있었다. 종군작가 민병균과 리태준은 북한군 병력과 무관한 민간지역을 지속적으로 폭격을 하는 미 공군기를 두고 ‘머저리’라고 불렀다. 인민군 종군작가 김남천과 미 공군의 심문을 받은 북한군 포로들도 이와 유사한 말을 남겼다.(35)

전폭기 조종사들이 빠르게 비행하는 제트기 안에서 산속에 은신한 적을 찾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미군 조종사들은 적 병력들이 은신한 것으로 의심되는 특정지역이나 마을에 대해 무차별적 공격을 꺼리지 않았다. 그들은 적 병력이 숨어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장소에 무조건 시험폭격을 가했다. 그렇게 하면 숨어 있는 적군이 튀어나올 것으로 봤지만 밖으로 나온 것은 북한군이 아니라 민간인들이었다.(36)

미군 조종사들은 북한군의 자동차나 보급품만 파괴하지 않고 인근의 마을까지 공격했다. 1950년 8월 19일 낙동강 전선 부근의 송정동 서쪽 2~3마일에 위치한 마을 세 곳이 미 공군기의 공격으로 불에 타서 초토화되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존재여부는 보고되지 않았다. 미군기는 북한군 병력이나 전차, 차량뿐만 아니라 교량과 석유저장소 등 도시 전체를 폭격함으로써 북한군이 요충지를 활용하지 못하도록 했다.(37)

전쟁 초기 미 공군기 조종사들은 전선부근에 집단적으로 모여 있는 민간인들에게도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했다. 이는 미 지상군의 피난민 통제정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7월말 무초대사가 딘 러스크 국무차관보에게 보낸 서한에는 “만약 피난민들이 미 방어선 북쪽에 나타날 경우 경고 사격을 하고 계속 전진하면 총격을 받을 것이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38) 미군 조종사들은 이러한 방침에 따라 ‘흰 옷 입은 사람들’을 보고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이 민간인복장을 한 채 피난민대열에 섞여 있다고 생각하여 공격을 가하곤 했다.

피난민에 대한 총격 결정은 대규모 민간인 희생을 낳는 원인이 되었다. 1950년 7월 26일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피난민에 대한 미군의 총격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날 전폭기의 폭격과 기총소사로 약 100여 명의 피난민이 목숨을 잃었고, 이후 7월 29일까지 계속된 쌍굴다리 안팎에 대한 지상군의 사격으로 200~300명이 희생되었다.(39)

1950년 7월 25일 제5공군 작전부장 터너 로저스(T. C. Rogers)에 의해 작성된 「민간 피난민 기총소사 정책」에는 미 공군은 육군이 진지로 접근하는 민간 피난민들을 항공기로 기총공격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공격을 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피난민들에 대한 기총공격은 영동뿐만 아니라 보편적으로 벌어졌다. 7월 20일 제35전폭대대의 한 편대가 “유성 3~4마일 남쪽의 흰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했”고, 또 다른 편대는 전선부근 민간인에 대해 공격했다. 이처럼 미 공군 전폭기들은 남한의 전선인근에서 발견되는 민간인을 향해 무차별적인 공격을 감행했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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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

전쟁 초기 미 공군 전폭기 조종사들과 모스키토 조종사들은 남한 전선부근의 민간인에 대해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나름대로 합리화시켜 갔다. 자신들이 공격한 민간인 집단은 ‘위장한 게릴라부대원’ 또는 ‘적을 지원하는 지원세력’이라고 정당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심한 스트레스를 겪었고, 과민한 신경을 진정시키기 위해 술이 동원되었다.

제80전투폭격대대 소속 조종사프라이스는 “전쟁 초기에 비행군의관이 매 비행임무 끝에 1온스의 버본위스키를 직접 나눠주었다. 조종사의 정신을 안정시키는 데 필요하다는 주장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조종사들은 하루 5~6회 이상의 출격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오후 즈음 그들은 비행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멀쩡한 사람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 매 25회의 비행임무가 끝날 때마다 한 병이 통째로 지급되기 시작했다”(41)고 증언했다.

프라이스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에 참전한 대부분의 조종사들은 자신의 생활이 술에 찌들어 있었다고 회고했다. 간밤의 숙취로 인해 구토하는 조종자들의 모습을 비행대기선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미국의 젊은 청년들은 이유도 모르고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해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살인자가 되었고, 그 스트레스를 술에 찌든 채 잊어버리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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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김태우,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8, 123쪽

2) 국방군사연구소,『한국전쟁(상)』, 1995, 196~234쪽

3) 전쟁기념사업회, 『한국전쟁사』1권, 1992, 195쪽

4) 국방군사연구소, 위의 책, 249~253쪽

5) 임영태, 『거꾸로 읽는 한국사』, 푸른나무, 2002, 111쪽

6) 김태우, 위의 논문, 124쪽

7) 김태우, 위의 논문, 5~7쪽

8) 브루스 커밍스·존 할리데이 지음/ 차성수·양동주 옮김,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태암, 202쪽

9) 김태우, 위의 논문, 3~4쪽

10) 커밍스와 헐리데이의 공동저작과 한국전쟁을 다룬 커밍스 등 수정주의 시각의 연구자들의 논문과 책은 대부분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 사이에 발간되었다. 당연히 한국전쟁과 관련된 미국의 비밀문서들이 상당부분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저술했기 때문에 자료이용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11) 김태우, 위의 논문, 8쪽

12) 진실화해위원회, 「이리역 미군폭격 사건」,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5, 2010, 665쪽

13) 김태우,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103쪽

14) 국사편찬위원회, 「미l 극동공군 산하 제5공군」,『한국사 데이터베이스』제7권(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fs_007_0020_0040_0010)

15) 진실화해위원회, 「이리역 미군폭격 사건」,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5, 2010, 666~668쪽

16) 김태우, 위의 책, 169쪽

17) 진실화해위원회, 「이리역 미군폭격 사건」,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5, 2010, 666쪽

18) 김태우, 위의 논문, 129쪽 참고

19) 김태우, 위의 논문, 124쪽

20) 김태우, 위의 논문, 126쪽

21) 진실화해위원회, 「이리역 미군폭격 사건」,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5, 2010, 668쪽

22) 김태우, 위의 논문, 128쪽

23) [화학] 올레산, 나프텐산, 야자 지방산을 혼합하여 만든 알루미늄 비누. 휘발유와 반죽하여 소이탄, 불꽃탄 같은 화염성 폭약과 젤리화제(jelly化劑)의 원료로 쓴다.(다음 국어사전)

24) 제임스 브래들리 저/ 한종현 옮김, 『플라이보이스』, 2005, 292쪽

25) 김태우, 위의 논문, 143쪽

26) 김태우, 위의 논문, 144쪽

27) 김태우, 위의 논문, 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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