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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에 의한 학살사건(5)-미군기의 남한지역 초토화작전과 민간인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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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봄호수 작성일17-03-08 03:14 조회51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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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에 의한 학살사건(5)-미군기의 남한지역 초토화작전과 민간인 학살

<연재> 임영태의 한국현대사, 망각과의 투쟁(37)

임영태  |  ytlim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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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3.07  00:3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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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B-29기의 이리역 오폭 사건

전통적인 공군작전에서는 B-29와 같은 중폭격기는 근접지원작전에 동원될 수 없었다. 수만 피트 상공에서 대량폭격을 수행하는 B-29기는 적군과 아군이 밀착된 지역에서 적군을 섬멸하는 근접지원작전에는 부적합한 기종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초기 유엔군이 위기에 처한 7월부터 전선 주변의 근접지원작전에 동원되었으며, 1950년 8~9월에는 낙동강 전선에서 B-29기를 동원한 ‘융단폭격(carpet bombing)’이 벌어졌다. 낙동강 상공을 가득 덮은 중폭격기들은 짧은 동안 한정된 구역에 대해 카펫을 짜듯 촘촘하게 폭격을 했다. 그 가공할 위력과 공포는 북한지도부와 북한군들 사이에 빠르게 전파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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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역 미군 폭격사건의 희생자 위령비(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조사보고서 제5권, 7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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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역 미군 폭격사건의 희생자 위령비(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조사보고서 제5권, 723쪽

 

 

 

 

 

 

 

 

 

 

 

미 극동공군은 막강한 근접지원능력을 통해 형성된 북한군의 공포와 좌절을 심리전에 활용하려 했다. 한국전쟁 동안 유엔군은 25억 장 가량의 삐라를 북한지역과 적군에게 살포했다. 이는 한반도 전체를 20번이나 덮을 수 있는 수량이었다. 이들 삐라 가운데는 극동공군의 위용을 과시하는 내용들도 다수 들어 있었다. 적에 대한 심리적 위협을 가하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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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이리역 사건 발생 직후 현장조사 후 보고문서(진실화해위원회, ‘이리역 미군폭격 사건’, 『2010년 상반기조사보고서』)

B-29기는 7월 9일 미 제24사단이 위험에 직면하자 이를 구하기 위해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처음 동원되었다. 이후 폭격기사령부는 연일 B-29기들을 동원해 남한지역 전선 부근에 대량폭격을 감행하였다. 7월 10~11일 B-29기 10대가 천안-평택지역 근접지원에 동원되어 인민군 탱크, 자동차, 조차장, 병력 등을 공격했다. 7월 14일과 18일에도 B-29기가 동원되었다.(2) 그러나 B-29기가 남한지역 공중폭격에 동원되면서 민간인 지역에 대한 ‘오폭’이 심각한 문제로 부각하였다.

 

7월 9일 맥아더의 지시 직후 발생한 대표적인 민간인 피해사례는 7월 11일 B-29기 2대의 이리역(현재의 익산역) 폭격사건이다. 이날 오후 2시경 B-29기 2대가 동원돼 익산역 일대를 폭격, 역 근무자와 인근 송학동 주민들을 학살하고 가옥 50여 채를 전소시켰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오후 2시경 폭격기에서 수십 발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군 입대를 위해 역으로 향하던 다수의 젊은이들과 인근 송학동 주민 10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1차 폭격이 있고 10여 분이 지난 후 평화동에 있는 변전소를 향해 2차 폭격이 있었으며 이때 변전소와 호남선 선로가 완전히 파괴되었다.(3) 목격자의 한 사람인 이창근은 다음과 진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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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9월 미공군의 B-26 경폭격기가 전북 이리조차장을 폭격하는 모습

 

“비행기는 오후 2시 30분쯤 전주 방향에서 날아와 상공을 수회 배회하다가 군산 쪽으로 갔는데 다시 되돌아와서 이리 상공을 수회 배회를 하다가 폭탄을 투하하였다. … 당시 이리역에는 군 입대를 위해 집결한 장정 200여 명, 국회의원 시국강연을 위해 이리극장에 동원된 학생 30~40명, 철도관사에 30여 명, 당시 우시장이 열린 인화동에서 30여 명, 역 구내에서 철도공무원과 일반인 80여 명, 송학동 주민 5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약 4일 후인 7월 15일에도 호주기로 불리는 전투기 4대가 오후에 이리 상공에 나타나 40여분 동안 철도시설물과 만경강 철교 등에 기총사격을 하였다.”(4)

 

이리역 폭격사건을 보면 당시 얼마나 많은 민간인 지역이 B-29기의 공격에 노출되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전선은 천안 북쪽에서 형성되고 있어서 이리시는 전선지역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미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 산하 제19폭격전대 소속 B-29중폭격기 2대는 근접지원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리역을 평택역으로 오인하여 폭격함으로써 대량의 민간인 희생을 낳았다. 당시 미 공군은 남한측의 요청에 따라 이리역 사건에 대한 자체조사를 실시하였으나 ‘아군기로 위장한 북한기에 의한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린 채 사건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를 통해 이 사건은 목격자들의 한결같은 진술과 자료들을 바탕으로 미 공군의 B-29중폭기라고 결론 내렸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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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B-29기의 이리역 폭격 장소(1950. 7. 11.)(6)


B-29의 낙동강 전선 융단폭격

 

1950년 8월 13일 맥아더는 극동공군사령관을 자신의 사무실로 직접 불러 인민군 대병력이 집결하고 있는 지역을 B-29기를 ‘전부’동원하여 융단폭격을 하라고 지시했다.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미 공군은 8월 16일 왜관지역에 융단폭격을 감행하여 초토화시켰다. 이때 낙동강 서안의 일부 구역에 100여대의 B-29기가 동원돼 폭탄 3,400여개를 투하했다. 이 시기 바로 왜관지역에서 북한군과 대치했던 한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은 이 광경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는 후일 이날의 폭격으로 “낙동강 서쪽 약목과 구미 사이 가로 5.6㎞, 세로 12㎞의 직사각형 구역이 쑥밭이 됐다”고 회상하였다.(7)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미국의 푸트렐 박사는 한 논문에서 당시 상황을 “그 지역을 열두 개의 동일한 사각형으로 나누어 각 사각 지역의 중심을 각 폭격대대에서 공격점으로 할당했”고, B-29기가 목표지점 상공에 도착해 “3,084기의 500파운드, 150기의 1,000파운드 자유낙하폭탄을 투하했다”고 설명하고 있다.(8)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래 최대의 폭격작전이었다.(9) 그러나 이날 폭격의 실질적인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북한군 주력부대는 이미 낙동강을 도하해 남한군과 근접대치 중이었기 때문에 치명적 타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이날 왜관폭격의 진정한 효과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이었다. 폭격 전날의 융단폭격 소식은 남한군 병사들의 사기를 치솟게 했다. 백선엽도 오도넬도 이 점에서는 충분히 일치했다.

 

한편, 폭격지역으로부터 1.5㎞ 가량 떨어진 산 위에 위치하고 있었던 북한 종군기자 리태준은 “8, 9대씩 편대로 오더니 우리가 있는 산에서 1천5백메-터 밖에 있는 과수원과 농촌에 폭탄을 퍼부었다. 인민군들은 이놈의 비행기를 ‘머저리’라 부르거니와 무엇을 보고 무엇 때문에 폭탄을 쏟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농민들을 죽이고 그들의 주택과 농장을 파괴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아무 결과도 없을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폭격기 편대가 열한 차례나 와서 퍼부었다. … 이날 조선농민은 로소남녀 또 2백여 명이 뼈도 추리지 못할 참혹한 죽엄을 하였고, 동네 하나와 과수원들이 재와 가루가 되었다”라고 썼다.(10)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하면, 이날의 폭격으로 70호, 60호 정도의 시무실 마을과 시창 마을이 모두 파괴되고 마을 사람과 피난민 등 130여 명이 사망했다.(11)

 

이 작전 이후 B-29의 대규모 근접지원작전은 한동안 진행되지 않았다. 대신 B-29기는 근접지원과 함께 전술항공작전의 양대축을 이루는 차단작전에 대거 투입되었다. 그런데 9월 B-29는 또 다시 대규모 근접지원작전에 투입되었다. 9월 2일 폭격기사령부의 B-29기 25대가 동원돼 김천, 고창, 진주에 500파운드 폭탄 803발이 투하했다. 9월 3일에는 B-29기 35대가 동원돼 안동, 성주, 의성, 합천, 고령, 상주, 영동, 제천 전선 부근의 병력과 장비를 공격했다. 9월 18일에는 42대의 B-29기들이 왜관 서쪽과 북서쪽 지역의 두 곳에서 대규모 근접지원작전을 전개했다.(12)

 

B-29기가 이와 같은 근접지원작전에 참여함으로써 대규모 민간인 희생이 발생한 것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이로 인한 정확한 민간인 피해규모를 산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 공군 관련 자료에도 B-29에 의한 병력살상규모에 대한 정보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전, 영동, 제천, 대구, 김천, 안동, 포항 등에서 행해진 폭격으로 대량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사실은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를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되고 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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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포항지역 미군 폭격지도(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8권, 258쪽

 

1950년 9월 10일 충남 서천군 판교면 판교국민학교 뒤편의 임시장터에서 장을 보러왔던 100여명의 민간인 미군기의 기총사격으로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이 사건의 목격자로 생존한 나환석(당시 19세)은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서 “판교 쪽에서 비행기 세대(혹은 두 대)가 와가지고 폭격을 하는데 … 기관총을 갈기고 올라가요 또 갈리며 올라가더니 … 실탄이 쏟아지는데 지그재그로 쏟아지더라고 …또 한 사람은 다리가 없어졌는데도 산으로 올라갔어. … 그래가지고 아우성이 났어. 아버지 딸 아들 서로 막 부르고 이루 말할 수가 없어 …”라고 증언하였다.(14) 이런 일들이 충청지역 뿐만 아니라 남한 곳곳에서 벌어졌다.

 

1950년 7월 30일 구미시(당시 선산읍) 원리의 새도방 나루터를 폭격하여 마을사람들과 피난민들이 수없이 사망했고, 8월 4일에는 김천 연봉천 주변 피난민을 향해 미군기가 폭격을 가해 최소한 수십 명이 사망했다. 8월 16일에는 구미시 금전동의 와래천변 주변을 미군기가 폭격하여 피난민과 주변마을 사람 등 최소 수십 명이 사망했다.(15) 이 무렵 미군에 의한 폭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사건은 구미뿐만 아니라 청송군, 영덕군, 칠곡군, 영주시, 영천시, 의성군 등 경북지역 곳곳에서 발생했다.(16)

 

그러나 미군이 유일하게 민간인 거주지역 ‘오폭’을 시인한 사례는 1950년 7월 17일 B-29기의 안동지역 폭격밖에 없다. 당시 북한군은 문경, 단양, 영주지역까지 진격한 상황이었고, 원래 미 공군은 단양과 풍기를 폭격할 예정이었다. B-29기는 목표지역을 완전히 오판한 상황에서 안동을 단양 인근으로 착각하고 폭격을 감행했다. 그런데 문제는 안동이 전선과는 완전히 무관한 후방지역이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폭격선 이북지역에 대한 오폭이었다면 미군은 아무런 문제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 극동공군은 안동지역 오폭으로 22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했으며 미국인 희생자는 한명도 없다고 보고했다. 미 극동공군사령관은 폭격기사령관에게 폭격 이전에 목표물을 명확히 확인하라고 지시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끝냈다.(17)
  
B-29기의 남한지역 폭격과 민간인 피해

 

차단작전이란 적 병력이나 보급품이 전선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교통중심지역, 조차장, 도로, 철도, 병력이동로, 이동병력의 숙소 등을 파괴하는 작전을 뜻한다.(18) 이미 북한지역 폭격에서 살펴보았듯이, 미 공군은 차단작전이란 명목으로 북한의 주요 도시들을 대부분 폭격으로 초토화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차단작전은 북한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전선의 이동에 따라 북한군 병력과 보급품의 통과 지역이 남한지역 대부분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미 공군의 폭격선(bomb line)이 점차 남으로 이동하였고, 결국 낙동강 인근까지 내려왔다.

 

전쟁 초기 B-29중폭격기의 남한지역 차단작전은 교량과 철도역, 조차장 파괴작전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차단작전은 폭격선 북쪽의 주요 교량과 교통요충지를 파괴하여 북한 병력과 보급품의 이동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B-29의 차단작전은 군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남한의 민간인을 대량으로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교통요충지는 인구밀집지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B-29중폭격기들이 쏟아 부은 대형폭탄들은 목표물에서 벗어나 민간인을 대량으로 살상하였다.(19)

 

1950년 7월 10~26일 사이에 130대의 B-29기들이 근접지원작전에 동원되었다. 맥아더는 B-29기의 근접지원작전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지만 대부분의 공군 인사들은 거기에 의문을 표시했다. 결국 7월 25일 맥아더와 공군 수뇌부는 B-29 2개 전대는 주로 38선 이북지역에 대한 차단작전을, 나머지 1개 전대는 근접지원작전을 수행하는데 합의했다.(20)

 

미 공군의 주요한 공격목표 중에는 열차, 자동차, 탱크, 병력이동을 막기 위한 교량 파괴가 있었다. 1950년 6월 28일 미 공군은 남한지역 파괴의 우선순위에서 교량과 탱크를 병력 다음 순위 목표로 정했다. 7월 7일 미 공군은 북한군의 전선지역에 대한 보급 활동이 교량폭격으로 명백히 둔화되었다고 보고했다. 특히 서울, 평택, 안성, 청주지역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는 이 지역의 교량들이 미 공군에 의해 대거 폭파되었음을 의미했다.(21)

 

1950년 8월 3일 미 지상군에 의한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의 왜관교와 고령군 성산면 득성교 폭파로 다리를 건너던 피난민들 수백 명이 사망했다. 미 육군 3사단은 낙동강 제방까지 퇴각한 뒤 북한군이 이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폭파했는데 이때 무고한 민간인이 대량 학살된 것이다.(22) 8월 5일에는 낙동강변에 위치한 칠곡군 노석리에 대한 미 공군의 집중적인 공중폭격과 미 지상군의 포격으로 마을의 2/3가 소각되고 다수의 마을사람들과 피난민들이 다수 희생되었다.(23)

 

전쟁 초기 미군 폭격으로 가장 먼저 피해를 입은 것은 서울과 그 주변 지역 민간인들이었다. 6월 29일 미 공군 B-29중폭격기 8대가 출격, 김포비행장과 서울역을 폭격했다. 이날의 공격으로 특히 서울역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다. 1952년 서울시에 의해 집계된 통계자료에 의하면, 파괴된 서울시의 주택은 전소․전파가 34,742호, 반소․반파가 20,340호였다. 이는 전체 서울시 주택 191,260호 가운데 28.8%에 해당하는 수치였다.(24)

 

특히 중구와 용산구는 전체 주택의 52.1%와 70.0%가 파괴되었다. 반면, 종로구, 동대문구, 성북구는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입었다. 이는 미 공군의 차단작전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주택이 대거 파괴된 중구와 용산구는 남한 교통의 중심지인 서울역과 조차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점은 서울에서 발생한 사망자와 부상자의 원인별 피해자수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한국정부 공보처 통계국 자료에 의하면,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28일까지 서울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공습(공중폭격)이었다. 서울시민의 사망원인은 공중폭격 4,250명, 총격 및 포격 2,378명, 피살 1,721명, 화재 445명의 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용산구는 공중폭격으로 인한 사망자가 1,587명으로 가장 많았는데 두 번째인 서대문구 518명의 약 3배, 동대문구 138명, 성북구 159명의 약 10배 이상에 달했다.(25)

 

한국전쟁 초기 B-29편대들은 서울역과 조차장을 포함한 교통중심지역을 수차례 공격했다. 6월 29일 B-29 4대의 서울역 폭격, 6월 30일의 서울지역 철교․탱크․한강이북 병력 집중 공격, 7월 16일 B-29 47대의 서울 조차장 폭격, 8월 4~5일 각각 B-29 12대의 서울 조차장 폭격, 8월 20일 B-29 8대의 서울 조차장 공격, 8월 21일 B-29 8대의 서울 조차장 폭격, 8월 25일 B-29 8대의 서울 조차장 폭격 등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특히 7월 16일 47대의 B-29가 동원된 서울역 공격은 해당시기 북한지역 조차장 공격에 맞먹는 대규모 폭격작전이었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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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29 서울 조차장 폭격관련 문서(1950.7.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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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29 서울 조차장 폭격 모습(1950.7.16)
출처: Air Force Activities, 1950, Bombing Seoul(NARA NASM 4A 39044)(28)

 

7월 17일 스트레이트메이어는 자신의 일기에서 7월 16일 서울에 1,504발의 500파운드 폭탄이 투하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손정목은 이날의 폭격을 회고하며 “지금의 해방촌 언덕을 지나 남산 능선에 오른 순간 요란한 비행기 굉음에 놀라 뒤돌아보았더니 남쪽 하늘이 미군 폭격기로 뒤덮여 있었다. … 이날 폭격으로 용산 일대가 완전히 파괴됐다. … 피해지역은 이촌동에서 후암동․원효로를 지나 마포구 도화동․공덕동에 이르렀다. 일제시대 대표적 건물의 하나였던 용산역사, 철도국, 용산․마포구청 등이 이날 파괴됐다. 이날의 대폭격 외에도 북한에 점령된 석달과 인천상륙작전, 1.4후퇴를 거치면서 서울은 수많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다시피 했다”(29)라고 기록하였다.

 

이 같은 대대적인 폭격으로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이 불가피했다. 용산구 지역 건물의 70%가 파괴되고 1,500여 명의 인명살상이 발생한 것은 이러한 미 공군의 차단작전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특히 미 공군은 서울 조차장 폭격과정에서 시탄폭탄을 사용함으로써 민간인 피해를 증폭시켰다. 1950년 7월 26일 15대의 B-29기들이 38선 인근의 차단 목표 공격에 동원되었다. 7월 27일에는 서울 조차장 공격에 투입된 6대의 B-29기 이외에 8대의 B-29기가 북위 37도선과 38도선 사이의 교량과 조차장 폭격에 동원되었다. 9월 15일에는 B-29 17대가 동원돼 전선과 무관한 남측 후방지역인 대전․안동의 조차장과 창고를 공격했다. 이러한 공격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남한 내 차단작전과 B-26기의 공중폭격

 

미군은 전쟁 초기 전세가 수세로 몰리면서 위급해지자 북한지역 전략폭격에 동원될 예정이었던 B-29기들을 대거 남한지역 작전에 투입하였다. 하지만 원래 남한지역에 대한 공군작전은 제5공군의 몫이었다. 남한지역 공군작전을 담당했던 제5공군의 주력은 F-51이나 F-80과 같은 전폭기였으나 제3폭격전대 소속의 B-26경폭격기도 있었다. B-26기는 태평양전쟁 시기 야간폭격작전에서 그 가치를 입증했다. B-26기는 B-29중폭격기와 달리 주간에 저공폭격을 수행하는 장점이 있었다. B-26폭격기에서 투하된 GP폭탄은 낙하산이 장착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낙하산은 폭격의 정확성을 높여주며 저공의 B-26기가 폭탄투하지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 폭탄들은 대개 지상 낙하 후 몇 초 후에 폭발하는 퓨즈를 장착하고 있었다.(30)

 

B-26경폭격기는 한국전쟁 동안 약 55,000회를 출격하여 38,500대의 차량과 3,700대의 열차, 406대의 기관차를 파괴하는 성과를 올렸다. 특히 전쟁 초기 교량파괴에 동원되어야 할 B-29기의 대부분이 근접지원작전에 활용되면서 B-26기는 교량파괴와 철도 차단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B-26경폭격기들은 2~3대가 하나의 편대를 이루어 소규모의 교량을 공격했고, 4~6대가 1개 편대를 이루어 대규모 교량을 파괴했다. 또한 B-26편대들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0월 31일까지 245회의 철도차단에 총 1,140개의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 중 517개가 목표에 적중했고, 52개는 근처에 투하되었으며, 85개는 불발되었다.(31)

 

전폭기들 또한 B-26경폭기와 함께 남한지역 차단작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제5공군의 F-51과 F-80은 도로사에 움직이는 차량과 병력의 파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근접지원목표물을 발견하지 못한 전폭기들은 노상에 움직이는 우연적인 목표물을 공격하라고 교육받았던 것이다. 이들 전폭기들의 도로상 목표물 공격은 1950년 7월에 가장 맹위를 떨쳤다. 제5공군은 7월 7~9일 3일 동안에 평택-서울 구간에서 197대의 트럭과 44대의 탱크를 파괴했다고 한다. 7월 10일에는 평택지역 구름 아래로 북한군 탱크와 차량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접근 가능한 폭격기와 전폭기들이 모여들어 공격했다. 이날 117대의 트럭과 38대의 탱크를 파괴하고, 다수의 북한군 병력을 사살했다.(32)

 

전쟁 초기 미 공군의 차단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북한군은 야간행군과 산악행군을 통해 전선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미 공군은 이들 북한군 병력과 차량, 물자들이 은신한 곳으로 의심되는 곳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였다. 미 제5공군의 B-26경폭격기와 전폭기들은 북한군이 점령한 남한 후방지역 도심의 역과 조차장, 촌락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였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대량으로 살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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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1월 미군이 소백산 일대에 뿌린 전단지 (“피난민의 이동을 엄금함! / 각자의 집으로 도라가든지/ 혹은 행길을 떠나 산속에 머물르라/ 어떤 사람이나 행렬을 막론하고/ 유엔군쪽으로 오는 자는 총살함/ 유엔군 총사령관”)

8월 1일 제8폭격대대의 5개 편대들은 하루 동안 무려 6군데에 이르는 남한 조차장들을 폭격하였다. 폭격지역은 전라남도, 전라북도, 강원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등 광범위했다. 사실상 폭격선 북쪽에 위치한 남한지역 모든 조차장들이 전폭기의 공격 대상이었다. 미 공군은 지상의 전황과 무관한 적 후방의 남한 농촌지역에도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했다. 미 공군은 7월 24일부터 27일까지 4일 동안 무려 8,000톤의 폭탄이 투하됐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폭격으로 얼마나 많은 남한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을까?

 

전선으로부터 벗어난 적 후방지역에 대한 전폭기들의 공격은 대체로 ‘무장정찰(armed reconnassance)’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되었다. 전폭기들은 대개 근접지원 과정에서 모스키토의 유도에 의해 포격을 수행하곤 했지만, 무장정찰 과정에서는 전폭기 조종사 개인의 판단에 따라 자의적으로 목표를 설정하여 공격을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무장정찰 과정에서 이뤄진 폭격은 이동 중인 적 병력, 차량, 탱크 등이 중요한 목표로 설정되었으나 실제로는 조차장이나 마을 폭격이 혼재되어 나타났다.(33) 흰옷을 입은 사람들의 행렬도 공격 목표가 되었다. 다음의 조종사 보고서의 일부 내용은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정찰을 위해 제4구역으로 직행했다. 모스키토 피터(Peter)가 사천(35°05'N-128°06'E)으로부터 고성(34°58'N-128°20'E) 서쪽 2마일 지점까지의 노상에 대한 정찰을 하면서, 도로 양쪽 50피터 내의 어떤 것에 기총소사를 가해도 괜찮다는 지시를 내렸다. 편대는 약 400~500명의 사람들 외에는 어떤 것도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다양한 종류의 옷을 입고 있었고, 몇 종류의 짐 꾸러미를 나르고 있었다. 몇몇은 도랑에서 반격을 가했다. 편대는 45분 동안 이 도로를 정찰했다. 약 100명의 사람들이 사살당했다. 일반적 이동은 남서쪽이었다. 정찰구역에서 19시 10분부터 19시 50분까지 있었다.”(34)

 

미 공군의 계속되는 공격을 피해 북한군이 야간에 이동을 하면서 공중폭격의 효과가 약화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미군은 야간에도 폭격비행을 가능케 할 기술을 개발했는데, ‘쇼란(Shoran: 단거리항법레이더)’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야간 공격은 또 다른 비극의 서막을 의미했다. 야간폭격은 목표물이 정확하게 판별되지 않았기 때문에 민간지역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더욱 늘렸다. 미 공군 조종사들은 불빛을 폭격 판단의 주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그 때문에 북한군은 야간에 불빛이 새어 나가는 것을 철저히 방지했다. 미군기의 야간폭격은 공격 목표물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나 판단 없이 무차별적으로 이뤄지기 일쑤였다. 그 때문에 많은 미 공군기 조종사들의 보고서에서 “결과는 알 수 없다”는 표현들이 등장한다.

 

한 조종사는 “대구(35°52'N-128°35'E)-거창(35°41'N-127°55'E) 지역으로 갔다. 24시 00분에 35°20'N-127°57'E(35) 인근지역에 로켓공격을 수행했다. 결과는 알 수 없다. 00시 05분에 35°13'N-127°54'E(36) 인근의 불빛들에 기총소사를 가했다. 결과는 알 수 없다. 어둠 때문에 조망이 열악했다. 4발의 로켓과 50구경 기관포를 소비했다”라고 보고했다.(37) 또 어떤 이는 “22시 55분에 35°40'N-128°12'E(38) 인근의 불빛들에 200발의 50구경 기관포를 발사했다. 로켓 공격에 35°50'N-128°20'E(39) 지역에 화재가 2건 발생했다. 피해정도는 알 수 없다”라고 썼다.(40)

 

미 공군의 이 같은 폭격 방침은 남한에 대해서도 초토화 작전을 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한 지역에 대해 이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미군 조종사들이 폭격선 북쪽의 마을에 대해 어떻게 대했을지는 간단히 짐작할 수 있다. 미군 조종사들은 남북을 가리지 않고 적과 아군(또는 민간인)이 전혀 구분되지도 않는 암흑 속에서 민간인 마을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한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이들의 보고서에는 마을을 공격한 구체적 근거가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 결국 미 공군 조종사들에게 북한군이 점령한 지역의 마을들은 언제든지 마음대로 폭격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무고한 민간인의 대량학살이 계속되었다.   

 

미 공군의 남한․전선지역 초토화 작전

 

이와 같은 ‘초토화 정책’은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레이트 메이어,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 폭격기 사령관 오도넬, 제5공군사령관 페트리지 등 극동공군 수뇌부에 의해 전쟁 초기부터 일관되게 주장되어 왔던 내용이었다. 중공군의 참전과 함께 1950년 11월 맥아더의 초토화 정책이 발표되었고, 그 뒤에는 북한지역 뿐만 아니라 남한지역의 민간인 거주 촌락과 전선인근의 도시들도 모두 소각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1951년 1.4후퇴 이후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은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공중지원과 폭격을 최대한 활용하려 했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재반격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작전방침을 전군에 하달하였다. 첫째,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아군의 화력과 기동력을 최대한 이용한다. 둘째, 작전의 주요 목표는 아군의 손실을 최소화하고 적의 인원과 물자에 최대의 손실을 주는 것이다. 셋째, 모험적인 작전을 피하고 확인된 적정을 통하여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신중한 제한목표 공격을 실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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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계굴 원경(진실화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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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계굴 입구 주변 모습(진실화해위원회)

 

 

 

 

 

 

 

 

이러한 리지웨이의 작전방침은 간단히 말하면 무자비한 화력으로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분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미군은 북한지역에 대한 무자비한 전략폭격과 함께 전선지역에 대한 전술폭격을 강화했다. 특히 리지웨이는 중공군과 인민군의 침투 전술 및 게릴라 활동을 우려했고, 소백산 지역 등 전선지역의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공중지원과 화력을 최대한 확대하였다. 미 제10군단장이었던 알몬드 소장도 게릴라전 양상을 띠고 있는 인민군의 활동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공군력과 화력을 최대한 이용하여 적과 적의 은신처가 될 만한 곳을 모두 소각하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였다.(41)

 

알몬드 소장은 리지웨이 사령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게릴라에 맞서는 데 포병대 병력으로는 부족하고, 게릴라 활동 지역의 집들을 소각하는 작전에서 더 많은 항공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특히 미 제10군단 지역의 관할 지형 특성상 대대 차원의 독립적인 활동이 자주 요구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포병대 병력만으로 충분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평가하였다.(42)

 

이러한 강력한 항공지원 요청은 이 시기 실제 작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를 테면 곡계굴 주변에서 폭격 임무를 수행한 미 제5공군 제49폭격대의 경우, 1951년 1월 한달간 총 2,613회의 유효 출격이 있었는데 이는 1950년 12월의 2,473회보다 140회나 증가한 것이었다. 이 같은 기록적인 출격을 통해 387개의 각종 폭탄과 1,055기의 네이팜탄, 2,185,333발의 캘리버 50 기총사격과 3,166개의 로켓탄이 사용되었다. 특히 단양을 관할한 미 제10군단 지역에서만 1월 한 달간 132회의 출격이 있었다.(43)

 

이런 상황에서 단양 곡계굴(44) 사건이 발생했다. 1951년 1월 20일 미 제5공군 예하 제35전투요격단, 제49전투폭격단, 제7․9전투폭격대의 폭격으로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리 소재 곡계굴에 피신해 있던 200여 명 이상(45)의 민간인들(피난민들과 주변 마을주민들)이 사망한 것이다. 이날의 폭격은 미 제7사단 제17연대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는데 F-51기와 F-80기 11~13대가 동원되어 이루어졌다.(46) 이 사건은 당시 소백산 주변의 급박한 전황과 더불어 이에 대한 대응오로 나온 미군의 초토화 작전이 빗는 참사였다.(47)

 

1951년 1월 7일, 미10군단 예하 제32연대 제2대대 G중대는 인민군이 피난민 대열에 위장․합류할 것을 우려하여, 충북 단양군 가곡면 향산리 근방의 도로를 탱크로 봉쇄하고 피난민들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미군이 별도의 지시나 주민 보호조치도 없이 피난민들을 되돌려보내자, 피난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피신이 봉쇄된 가운데 자구책으로 곡계굴로 피신하였다. 1월 중순, 아몬드(Edward M. Almond) 소장이 지휘하는 미10군단은 중부전선의 북한군 침투지역에 대대적인 공중폭격과 소각작전을 실행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이러한 대량 학살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1951년 1월 당시 유엔군 측 입장에서 보면 인민군이 원주-제천-단양-풍기로 이어지는 주공급로를 장악할 경우 비교적 안정되어 있던 서부전선마저도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1951년 1월, 충북-경북 계선의 소백산맥지대는 한국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최대의 격전장으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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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곡계굴이 있는 단양군 영춘면 일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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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군 2․5군단의 공격과 미 10군단의 대치 상황( 1951. 1. 7-22 (출처 : Billy C. Mossman, Ebb and Flow, November 1950-July 1951, Center of Military History, 1990)

 

유엔군은 인민군의 소백산 침투전술을 중공군이 또 다른 총공세를 준비하는 과정으로 파악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유엔군 사령부는 지상군을 투입함과 동시에 대대적인 공중폭격을 동원해서라도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해야 했다.(48) 이를 위해 아몬드 소장은 공중폭격의 지원을 받아 주변지역을 소각하고 초토화하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작전은 10군단장 휘하의 7사단장 바(David G. Barr) 준장이 이의를 제기할 정도로 과도한 것이었다.(49) 

 

1951년 1월에 미군의 공중폭격으로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 곳은 곡계굴만이 아니었다. 경기, 충북, 경북, 강원 지역 등 광범한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집중적으로 민간인 희생이 발생한 것은 1950년 11월 맥아더의 지시에 의한 초토화 작전이 남한지역에까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도진순의 일차적인 연구와 진실화해위원회의 심도 있는 현지조사가 실시된 예천군 보문면 산성동 폭격에 대한 조사보고서, 경북 예천․충북 단양․경기․강원지역 폭격사건에 대한 조사보고서 등을 통해 미 공군의 초토화 작전이 남한지역에 확산된 과정을 속속들이 알 수 있다.(50) 

 

미군의 민간인 학살과 전쟁 범죄

 

미군의 공중폭격은 북한지역과 공산군에 집중되었지만 남한지역에도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다. 북한지역과 공산군을 향한 미군의 폭격은 초기부터 민간인과 민간지역에도 심각한 피해를 안겨주었다. 더욱이 중공군의 개입 후 1950년 11월부터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사실상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강경정책이 시행된 후 1년간은 철도차단작전에 집중되어 민간지역에 대한 공격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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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950.8.27. 미 공군 제18전폭전단 소속 제39폭격대대의 임무보고서(포항 용한리 해변 미군폭격사건 관련 자료)(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조사보고서, 8권)

 

하지만 정전협정이 진행되면서 미국의 폭격정책은 또 다시 바뀌었다. 전황이 교착되면서 전쟁은 물리적인 승리보다 심리전․이념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고, 미국은 압도적인 공군력을 이용한 항공압박 작전을 펼쳤다. 미국은 전쟁에서 물리적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상황에서 정치적․이념적․심리적 승리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추구했다. 미국은 포로교환에서 제네바 협정에 따른 ‘자동송환원칙’을 거부하고 인도주의의 명목으로 포로 개개인의 의사에 따른 자유송환원칙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인도주의는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라는 가장 비인도적인 결과를 낳는 요인이 되었다. 

 

미국은 정치적․심리적․이데올로기적 승리를 위해 공산측에 자유송환원칙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며 무차별적인 항공압박 작전을 전개하였다. 미국은 공중폭격을 통해 북한지역의 수력발전소를 폭격하였고, 마지막에는 저수지를 파괴함으로써 식량생산까지 가로막았다. 미국의 항공압박 작전은 북한지역에 대한 무차별적인 파괴와 대량 살상을 가져왔다.

 

한국 전쟁에서 미군기의 공중폭격으로 북한지역은 원시상태가 되었고, 북한의 추산에 따르면 30여만 명의 민간인이 미군기의 공중폭격으로 사망했다. 이는 한국전쟁 3년 동안 매일같이 250명 이상의 주민들이 살상된 수치이다. 이 같은 폭격에 의한 대량 살상은 북한에서 반미주의가 팽배하게 된 원인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 같은 공중폭격에 의한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51)   

 

북한만큼은 아니지만 미 공군기의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남한지역 또한 심각하게 파괴되었으며, 민간인이 대량 살상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북한지역에 대한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282,000명이 사망했다는 통계가 있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미군기의 폭격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는지에 대한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전쟁 초기 3개월 동안 서울지역에 대한 피해상황이 집계된 통계를 통해 공중폭격으로 가장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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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천여 명의 피난민이 모여 있는 곳에 미군함에서 포격을 가해 최소한 50여명의 사망자가 확인된 ‘포항 환여동 미군 함포 사건’의 현장인 해변가 모습(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조사보고서 5권, 89쪽)

 

미국 또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중폭격으로 인한 희생자 수를 밝힌 적이 없다. 단지 미국은 한국전쟁기 미 공군 조종사들의 임무보고에 기초하여 적 병력 184,808명을 사살했다는 통계수치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53) 한국 전쟁에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은 공중폭격에 의해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미군 함포의 포격으로 사망한 사건과 지상군에 의한 학살 사건 등도 적지 않다.(54) 다만 여기서는 다른 문제들은 다루지 않기로 한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미군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희생자의 통계를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한국민들이 자기 집이 파괴되는 것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무서운 일이나 그들은 그것을 조용히 참고 차라리 가옥이 파괴될지언정 적에게 나라를 뺏기어 독립된 국가에서 자유민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원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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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호수님의 댓글

봄호수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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