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봉건시대’라고 우겨대는 ‘꼴통좌파’를 위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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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858회 작성일 17-05-29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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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마르크스보다 정도전이 더 긴요하다

 

조선을 ‘봉건시대’라고 우겨대는 ‘꼴통좌파’를 위한 글

 

김갑수 | 2017-05-29 12: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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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마르크스보다 정도전이 더 긴요하다
- 조선을 ‘봉건시대’라고 우겨대는 ‘꼴통좌파’를 위한 글


# 내 글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강하게 말한다. 자칭 진보주의자들 중에는 30년 전 아니 50년 전, 100년 전의 조선사관을 완강하게 보지하고 있는 축들이 있다. 한마디로 해서 그들은 게으른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것이 최근 30년 동안의 신간을 전혀 읽지 않았다고 실토하는 일이라는 점도 모른다. 사람에게는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지(知)와 무지(無知)의 확연한 경계선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에 근대적 법제도를 이식시키기 위해 우메 겐지로를 시켜 민법 등을 제정하는 사전조치로서 구관조사(舊慣調査)를 실시토록 했다. 그 의도는 근대법인 일본 민법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하면 여러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하여 근대법에 적합하지 않은 구관을 조사한 다음 조선 독자의 민법을 만들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조사를 진행해 보니 이러한 예상은 빗나가 근대적 소유권과 매우 유사한 토지 소유권이 이미 조선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다음은 우메 겐지로가 이토 히로부미에게 낸 당시 보고서의 일부이다.

“현재로서는 일반적으로 토지 소유권을 인민에게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어 보이며 (중략) 요컨대 소유권이라고 할 수 있는 권리가 조선의 인민에게는 적어도 수백 년 전부터 인정되어 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미야지마 히로시 논문 『일본사 인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하여』 중에서)

미국인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도 “우리는 이러한 정치 사회적 유형을 봉건제도와 구별해 ‘농업관료제’(agrarian bureaucracy)라고 부르는데, 조선시대에 이 유형이 완전히 발전된 형태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브루스 커밍스 저, 김동노 외 역 『한국현대사』, 서울, 창비, 2013년, 55쪽)

조선은 ‘왕정(王政)이기 때문에 봉건국가’라는 견해가 있다. 그들은 왕정을 곧 전제정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도 유럽에 한한 일이다. 서양인들이 고안한 데모크라시를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번역한다. 사실 이런 번역부터가 서양을 실제보다 우대하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데모크라시란 ‘(기득권) 다수결의 원칙’을 의미한다.

양보해서 서양의 데모크라시가 민주주의라면 조선왕정은 민본주의가 아닌가? 민주는 인민이 ‘주인’이라는 뜻이고 민본은 인민이 ‘근본’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조선은 대체로 왕권보다는 신권이 강한 나라였다.

다음은 1885년 조선에 와서 40년 동안 살면서 조선 각지를 여행한 선교사 겸 역사학자 제임스 게일의 진술이다.

“우리는 동양인이 전제정치의 강철 같은 폭압 아래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양인은 대체로 만족해하며 대개의 경우 혼자서도 행복하게 살아왔다.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정부는 시끄러운 데모크라시인 반면 동양인의 이상은 현명하고 훌륭한 통치자이다.” (제임스 게일, 『한국인의 역사』)

이어서 게일은, ‘만약 역사를 세심하게 읽고 비교한다면 결론은 의심할 바 없이 동양의 이상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하면서, ‘동양에는 때로 폭군이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폭군이 떼거리로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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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게일(1863-1937) 캐나다 선교사로 조선에 왔다. 조선을 동양의 그리이스라고 하며 조선에 흠뻑 빠져들었다. 

<구운몽>, <심청전>, <홍길동전>, 조선 시대 야담집 <천예록> 등을 영어로 번역해 영국 런던에서 발간했다.

(편집입력/재캐나다동포전국연합회)

 

지난 글에서 나는 조선을 봉건국가라고 하는 것은 모양주의(서구사대주의)거나 식민진보(식민사관적 진보주의)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 말고도 더욱 중요한 원인이 있다.

조선을 봉건국가라고 하는 것은 진보주의자에게서 더 많이 나타난다, 이것은 조금 이상한 일이 아닌가? 나는 이것을 진보들이 너무 마르크스에게 경도됐기 때문이라고 본다. 마르크스는 훌륭한(또는 위대한) 학자이지만 그의 논리가 우리에게 모두 적용될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착각에 가까운 오류이다.

마르크스는 서양 개념의 근대적 인물이었다. 나는 그의 역사발전론이나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을 신뢰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동양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서양학자들은 동양의 왕토사상을 마치 국왕이 전국의 토지를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것으로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르크스는 “아시아에서는 국왕이 최고의 지주였다”고 해석했다.

그런데 정도전은 국왕의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았다. 표면상 천하가 모두 왕의 것이라고 한 것은 수사법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 놓아야 왕의 재산축적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신하들과 협의하여 편성한 예산 내에서 정부기구의 허가를 받아야 예산을 사용할 수가 있었다.

진보주의자들이 굳이 조선을 봉건국가라고 하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유럽의 영향이 크다. 유럽의 중세는 분명히 ‘오랜 동안 불화와 반목’을 겪은 봉건국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에는 마르크스의 단계적 사회발전론도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게 사실이다.

도을 김용옥은 “삼봉은 마르크스의 이상주의와 레닌의 현실주의를 냉혹하게 밀착시켰다”고 평가했다.(김용옥,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 서울 통나무출판사, 2009년 10쪽)

과연 14세기 이른 시간에 정도전만 한 사상을 정립하고 구체화한 인물이 세계에 있었을까?

조선은 500년 역사 동안 정도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나라였다. 엉뚱한 말 같지만, 정도전이 마르크스가 아니듯이 마르크스 또한 정도전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마르크스의 것보다 정도전의 것에 압도적으로 더 많이 영향 받는 문명권에 있다는 점이다. (원문출처/진실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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