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1장 1 .《우 리 가 정》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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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005회 작성일 18-04-24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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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카나다동포전국련합회]

​김일성대주석님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1장을 3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주체107(2018)년 4월 15일 [회고록]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1장 (1부)

 

 1 .《우 리  가 정》

 

 

 

나의 생애는 조선의 근대력사에서 민족수난의 비극이 가장 암담하게 중첩되던 1910년대로부터 시작되였다. 내가 세상에 태여나기전에 우리 나라는 벌써 일본의 독점적인 식민지가 되였다. 황제의 통치권은 《한일합병》조약과 함께 일본천황에게로 모조리 넘어갔고 이 나라 백성들은 《총독제령》에 따라 움직이는 현대판노예가 되였다. 유구한 력사와 풍요한 자연부원과 수려한 산천경개를 자랑하는 이 강토는 일본제군화와 대포바퀴밑에서 짓이겨졌다.

민중은 국권을 강탈당한 슬픔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시일야방성대곡》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고있던 이 땅의 초야와 지붕밑에서 수많은 충신들과 유생들이 망국의 한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름없는 백정까지도 칠성판에 오른 국운을 통탄하며 죽음으로써 치욕의 《한일합병》에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에는 경찰들과 일반문관들은 말할것도 없고 보통학교 훈도들까지 금테를 두른 양복을 입고 정모를 쓰고 칼을 차고 다니는 야만적인 헌병경찰제도가 수립되였다. 천황의 칙령에 따라 총독은 조선에서 륙해군의 통솔권을 비롯하여 우리 민족의 귀와 입을 틀어막고 수족을 얽어맬수 있는 무제한한 권한을 가지였다. 조선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모든 정치단체들과 학술단체들은 해산의 운명을 면치 못하였다.

조선의 애국자들은 구류장과 감옥에서 연덩어리가 달린 소가죽채찍에 얻어맞았다. 도꾸가와막부시대의 고문방법을 그대로 이어받은 교형리들이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조선사람의 살을 마구 지지였다.

날마다 쏟아져나오는 《총독제령》에 의해 조선사람의 흰옷마저 먹물을 들쓰지 않으면 안되였다. 현해탄을 건너온 일본의 재벌들은 무슨 《회사령》이니, 조사령이니 하는 법령들의 그늘밑에서 우리 조국의 보화와 재부들을 무데기로 실어갔다.

나는 지금까지 세계 여러곳을 돌아다니며 지난날 식민지로 있었던 나라들을 적지 않게 보았지만 다른 민족의 말과 성까지 빼앗고 밥그릇까지 략탈해간 그렇게 지독한 제국주의는 보지 못하였다.

당시의 조선은 말그대로 사람못살 생지옥이였다. 조선사람들은 살아도 죽은 목숨과 같았다. 《… 일본은 모든 새로운 발명들과 순전한 아세아식고문을 결합시킨 전대미문의 야수성으로 조선을 략탈하고있으며 그를 계속 략탈하기 위하여 싸울것이다.》라고 한 레닌의 지적은 아주 타당하고 정확한것이다.

내가 성장하던 그 시기는 다른 대륙들에서도 식민지재분할을 위한 제국주의자들의 각축전이 치렬하게 벌어지고있던 때였다. 내가 태여난 그해에도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는 복잡한 사건들이 련달아 일어났다. 바로 그해에 미해병대가 온두라스에 상륙하였다. 프랑스는 마로끄를 자기의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이딸리아는 토이기의 로토스섬을 점령하였다.

국내에서는 《토지조사령》이 발표되여 민심을 뒤숭숭하게 하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나는 어수선한 동란의 시대에 태여나 불우하게 어린시절을 보냈다. 이러한 시대상은 나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한테서 우리 나라의 망국사를 들은 다음부터 봉건통치배들을 몹시 원망하였으며 피눈물을 머금고 나라의 자주권을 찾는 일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남들이 군함과 기차를 타고 세계를 돌아칠 때 우리 나라의 봉건통치배들은 갓쓰고 하늘소 타고 음풍영월로 수백년세월을 헛되게 보냈다. 그러다가 동서방의 침략세력이 함대를 끌고 접어들자 그렇게도 완고하게 닫아매였던 쇄국의 문을 열어놓았다. 봉건왕조는 외세가 마음대로 롱락하는 리권쟁탈의 흥정판으로 되였다.

력대로 사대주의를 일삼아오던 부패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은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있는 때에조차 큰 나라들의 조종밑에 당파싸움만 하였다. 그러다나니 오늘 친일파가 득세하면 일본군대가 왕궁을 지키고 래일 친로파가 득세하면 로씨야군대가 임금을 호위하고 모레 친청파가 득세하면 청나라 군대가 대궐의 파수를 서는판이였다.

그래서 한 나라의 왕비가 궁궐안에서 외국테로단의 칼에 맞아죽고(1895년 《을미사변》) 왕이라는것이 다른 나라 공사관에 가서 1년동안이나 갇혀있는가 하면(1896년 《아관파천》) 임금의 당아버지가 외국에 랍치되여가서 귀양살이를 하여도 오히려 사죄를 해야 되는 판국이였다.

왕궁을 지키는것도 남의 나라 군대에 맡겼으니 이 나라는 누가 지켜주고 돌보겠는가.

무변광대한 이 세계에서 가정이란 하나의 작은 물방울과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물방울도 세계의 한 부분이며 세계를 떠나서는 존재할수가 없다. 조선을 망국의 비운속에 몰아넣은 근대력사의 파도는 우리 가정에도 사정없이 쓸어들었다. 하지만 우리 집안 사람들은 그 위협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민족과 더불어 울고 웃으면서 폭풍속에 아낌없이 몸을 내던지였다.

우리 가문은 김계상할아버지대에 살길을 찾아 전라북도 전주에서 북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만경대에 뿌리를 내린것은 증조할아버지(김응우)대부터였다. 증조할아버지는 원래 평양 중성리에서 태여나 어려서부터 농사를 지었는데 생활이 너무도 구차하여 평양에 사는 지주 리평택의 묘지를 보아주기로 하고 산당집을 한채 얻어가지고 1860년대에 만경대로 이사해왔다.

만경대는 산천경개가 매우 아름다운 고장이다. 우리 집옆에 있는 산을 남산이라고 하는데 그 산마루에 올라가 대동강쪽을 굽어보면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을 감상하는것 같다. 타고장의 부자들과 벼슬아치들이 만경대일대의 산들을 경쟁적으로 사가지고 조상의 묘를 많이 쓴것도 이 일대의 아름다움을 탐냈기때문이였다. 만경대에는 평안감사의 묘도 있었다.

대대로 소작살이를 하다나니 우리 집안은 매우 어렵게 살았다. 그런데다가 3대를 두고 외독자로 내려오던 우리 가문이 할아버지(김보현)대에 와서는 아들딸 6형제를 보게 되여 열명 가까운 대식구로 불어났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나 자손들의 입에 풀칠이라도 시켜보려고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남들이 다 자는 이른새벽에도 쉬지 않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진거름을 모았다. 밤이 되면 등잔불밑에서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고 멍석을 틀었다.

할머니(리보익)도 밤마다 물레질을 하였다.

어머니(강반석)는 삼촌어머니(현양신)와 고모들(김구일녀, 김형실, 김형복)을 데리고 낮에는 밭에서 종일 김을 매고 밤에는 무명낳이를 하였다.

집사정이 하도 어려우니 큰삼촌(김형록)은 9살에 천자를 좀 배우고는 학교문앞에도 가보지 못하고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었다.

온 가정이 달라붙어 기를 쓰고 일했지만 늘 죽도 변변히 우리지 못하였다. 껍질도 벗기지 않은 수수로 타개죽을 쑤어먹군하였는데 목안이 깔깔해서 넘어가지 않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니 과일이나 고기 같은것은 생각할수도 없었다. 한번은 내 목에 화기가 났는데 그때 할머니가 어디서 돼지고기를 얻어왔다. 그 고기를 먹고 화기가 뚝 떨어졌다. 그후부터 나는 고기를 먹고싶으면 화기가 좀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였다.

내가 만경대에서 어린시절을 보낼 때 우리 할머니는 늘 집에 시계가 없는것을 한탄하였다. 할머니는 물욕이 없는분이였지만 남의 집에 걸려있는 벽시계만은 몹시 부러워하였다. 우리 이웃에 벽시계가 있는 집이 한집 있었다.

할머니가 그 집 벽시계를 부러워하기 시작한것은 우리 아버지가 숭실중학교를 다닐 때부터였다고 한다. 집에 시계가 없었으므로 할머니는 매번 쪽잠을 주무시다가 첫 새벽에 일어나 어림짐작으로 시간을 가늠하고는 서둘러 조반을 짓군하였다. 만경대에서 숭실중학교까지 30리길이니 조반을 일찍 짓지 않으면 지각을 할수 있었다.

어떤 날은 한밤중에 밥을 지어놓고도 등교시간이 되였는지 안되였는지 알수 없어 몇시간씩 잠을 못자고 부뚜막에서 동창만 바라볼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뒤집에 가서 몇시나 되였는지 알아보구 오렴.》하고 분부하였다.

어머니는 뒤집에 가서도 주인을 깨우기 미안하여 뜨락에 들어가지 못하고 울타리밖에 쪼그리고앉아 시계종이 땡땡소리를 낼 때까지 기다리군하였다. 그러다가 시계종이 울리면 집에 돌아와 할머니에게 시간을 알려드리군하였다.

내가 팔도구에서 살다가 고향에 돌아오니 삼촌어머니가 우리 아버지의 안부를 물으면서 이런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큰아버지가 먼길을 통학하시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였는데 성주는 칠골외가에 가있게 된다니 학교가 가까워서 좋겠다고 하였다.

우리 집에서는 해방될 때까지 할머니가 그렇게도 부러워하던 벽시계를 끝내 사다걸지 못하였다.

우리 집안사람들은 비록 죽물을 우리며 가난하게 살았지만 혈육이나 이웃간에 서로 도와주고 받들어주는 마음이 극진하였다.

《돈이 없이는 살수 있어도 인덕이 없으면 살수 없느니라.》 

(2부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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