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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와 더불어》 1권 1장 (제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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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4-24 11:57 조회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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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1장

(1부에 이어 2부)

 《돈이 없이는 살수 있어도 인덕이 없으면 살수 없느니라.》

할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늘 이런 훈계를 하였다. 이것이 곧 우리 가정의 철학이기도 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새것에 민감하고 향학열이 높았다.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면서도 늘 정규학교에 가고싶어하였다.

헤그밀사사건이 있은 그해 여름 슬매부락에서는 순화, 추자, 칠골, 신흥 네개 학교의 학생들이 모여서 련합운동회를 하였다. 아버지는 그날 순화학교 선수로 운동회에 참가하여 철봉, 씨름, 달리기를 비롯한 여러가지 종목에서 우승을 하였다. 그런데 높이뛰기에서만은 첫자리를 다른 학교 선수에게 빼앗기였다. 가름대에 머리태가 걸리는 바람에 실수를 하였기때문이였다.

운동회가 끝난 다음 아버지는 학교뒤산에 올라가 그 머리태를 뭉청 잘라버리였다. 수백년을 두고 내려오는 낡은 인습을 무시하고 부모의 허락도 없이 머리태를 잘라버린다는것이 그때로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였다.

할아버지는 큰 변이 났다고 야단을 하였다. 원래 우리 집안사람들이 대가 셌다.

아버지는 그날 할아버지가 무서워 집에도 못들어오고 울바자밖에서 서성거리였는데 증조할머니가 뒤문으로 데려다가 밥을 주었다고 한다. 증조할머니는 우리 아버지를 장손으로서 각별히 사랑하였다. 아버지는 자신이 숭실중학교에 들어갈수 있은것도 증조할머니의 덕이라고 늘 말씀하였다. 증조할머니가 보현할아버지를 설복하여 아버지를 신식학교에 다닐수 있게 해주었다. 봉건이 심했던 그 당시까지만 하여도 할아버지네 세대는 신식학교를 별로 달가와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숭실중학교에 입학한것은 나라가 망한 이듬해(1911년) 봄이였다. 당시는 개화의 첫 시기여서 량반들도 학교공부를 하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우리 집같이 타개죽도 변변히 먹지 못하는 집에서 자손들을 중학교에까지 보낸다는것은 대단히 힘에 부치는 일이였다.

그 당시 숭실중학교의 월사금이 2원이였다고 한다. 그 2원을 벌려고 어머니는 순화강에 나가 가막조개까지 주어다 팔았다. 할아버지는 참외를 심고 할머니는 열무농사를 하고 열다섯살밖에 안되였던 큰삼촌조차도 형님의 학비를 보탠다고 짚신삼이를 하였다.

아버지자신도 학비를 벌려고 수업이 끝난 다음에는 학교당국이 운영하는 실습장에서 해가 질녘까지 고된 로동을 하였다. 그런후에 학교도서관에서 몇시간씩 책을 읽다가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와 한두시간 쪽잠에 들었다가는 다시 학교로 가군하였다.

이처럼 우리 가정은 그 당시 조선의 어느 농촌, 어느 고을에서나 흔히 볼수 있는 소박하고 평범한 가정이였다. 남들보다 별로 표가 나는것도 없고 특이한 점도 찾아볼수 없는 가난한 가정이였다.

그렇지만 조국과 겨레를 위한 일이라면 누구나 아낌없이 몸을 내대였다.

증조할아버지는 남의 묘를 봐주는 산당지기였으나 나라와 향토를 열렬히 사랑하는분이였다.

미제침략선 《샤만》호가 대동강을 거슬러올라와 두루섬에 정박하고있을 때 증조할아버지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집집에 있는 바줄을 다 모아 강건너 곤유섬과 만경봉사이에 겹겹이 건너지르고 돌을 굴리면서 해적선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샤만》호가 양각도밑에까지 기여들어 대포와 총을 쏘아대면서 시민들을 살해하고 재물들을 략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마을사람들을 데리고 그달음으로 평양성에 들어갔다. 그때 성안사람들은 관군과 함께 나무단을 가득 실은 매생이 여러척을 련결시켜 불을 지르고 《샤만》호쪽으로 띄워내려보내여 배도 해적들도 모조리 수장해버리였는데 증조할아버지도 여기서 한몫 단단히 하였다고 한다.

《샤만》호가 격침된 다음에는 미제침략자들이 또 군함 《쉐난도아》호를 끌고 대동강하구에까지 기여들어 살인, 방화, 략탈을 감행하였다. 만경대인민들은 《쉐난도아》호가 침입하였을 때에도 의병을 뭇고 조국방위에 한사람같이 궐기하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늘 《남자는 전장에서 적과 싸우다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면서 집안식구들이 모두 나라를 위해 떳떳이 살도록 교양하였으며 자손들을 혁명투쟁에 아낌없이 내세웠다.

할머니도 자식들에게 대바르고 굳세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었다.

한때 일본사람들이 나에 대한 《귀순》공작을 하느라고 엄동설한에 할머니를 데려다가 만주산야로 끌고 다니면서 별고생을 다 시킨적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할머니는 적들을 노복처럼 호령하면서 혁명가의 어머니, 혁명가의 할머니답게 굳세고 당당하게 처신하였다.

나의 외할아버지(강돈욱)는 고향마을에 사립학교를 세우고 청소년들을 공부시키면서 일생을 후대교육과 독립운동에 바쳐온 열렬한 애국자, 교육자의 한사람이였으며 맏외삼촌(강진석)도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나선 애국자였다.

아버지는 내가 어려서부터 애국의 넋을 깊이 간직하도록 꾸준히 교양하였으며 그런 지향과 념원으로부터 내 이름도 나라의 기둥이 되라는 의미에서 《성주》라고 지어주었다.

아버지는 숭실중학교에 다닐 때 두 동생을 데리고 집오래에 삼형제를 상징하여 백양나무 세그루를 심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만경대에는 백양나무라는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날 두 동생에게 백양나무는 빨리 자라는 나무라고 하면서 우리 형제들도 그와 같이 씩씩하게 자라 나라를 독립시키고 잘 살아보자고 말씀하였다.

그후에 아버지는 혁명을 위하여 만경대를 떠났고 뒤따라 작은삼촌(김형권)도 싸움의 길에 나섰다.

만경대고향집에는 큰삼촌 한분만 남았지만 백양나무는 세 그루 다 잘 자라 큰 나무가 되였다. 그 그늘이 지경을 넘어 지주의 밭에까지 드리워지게 되였다. 지주는 밭에 그늘이 지면 소출이 떨어진다고 하면서 남의 집 백양나무를 사정없이 찍어버리였다. 그래도 말 한마디 할수 없는 무모한 세월이였다.

나라가 해방된 다음 집에 와서 그 말을 들으니 돌아가신 아버지의 깨끗한 꿈이 생각나서 참으로 분하였다.

분한 일이 어찌 그뿐이였겠는가.

우리 고향집앞에는 내가 어린 시절에 동무들을 데리고 자주 올라가 놀던 들메나무가 여러그루 있었다. 역시 20년만에 집에 돌아와보니 그중 집 가까이 있던 들메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큰삼촌이 그 나무를 찍어버렸다고 하였다. 듣고보니 거기에도 기막힌 사연이 있었다.

내가 산에서 싸울 때 아마 경찰놈들이 무던히도 우리 집 식구들을 못살게 굴었던 모양이다.

우리 집을 감시하느라고 대평주재소 순사들이 늘 당번을 섰다. 대평과 만경대는 좀 떨어져있었으므로 여름에는 그 들메나무밑이 그자들의 출장소 같이 되였다. 그 그늘에 앉아 심심하면 동네사람들을 불러다 문초도 하고 부채질을 하며 낮잠도 잤다. 어떤 때에는 닭을 잡아다가 술추렴도 하고 할아버지나 큰삼촌에게 행패질도 하였다.

하루는 그렇게도 무던하던 큰삼촌이 도끼를 둘러메고 나와 단숨에 그 나무를 찍어버렸는데 할아버지는 말릴 생각도 나지 않더라고 하였다.

《삼간집이 다 타도 빈대죽는걸 보니 씨원하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할아버지의 말씀에 나도 쓸쓸하게 웃었다.

혁명하는 자손들을 두다나니 우리 조부모님들이 고생을 많이 하였다. 하지만 그처럼 모진 시련과 박해속에서도 할아버지, 할머니는 절개를 굽히지 않고 꿋꿋하게 잘 싸웠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왜정말기에 창씨개명을 강요하였지만 나의 조부모님들은 거기에도 응하지 않았다. 우리 고향에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지 않고 끝까지 버티여낸것은 우리 집 하나밖에 없었다.

그밖의 사람들은 다 성을 고치였다. 성을 고치지 않으면 일본관청이 도시에서 배급조차 주지 않았기때문에 살아나가기가 곤난하였다.

형록삼촌은 창씨개명에 응하지 않는다고 매도 여러번 맞았고 주재소의 호출도 여러번 받았다.

순사가 나서서 《오늘부터 너는 김형록이 아니다. 네 이름이 뭐냐?》하고 물으면 삼촌은 《김형록이외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순사가 달려들어 귀뺨을 때리였다.

《다시 말해봐. 이름이 뭐야?》하고 또 물어도 변함없이 《김형록이외다.》하고 대답하였다.

순사는 처음보다 더 아프게 따귀를 쳤다. 김형록이라는 대답 한마디에 주먹이 한대씩 안겨졌지만 삼촌은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그때 할아버지는 삼촌에게 이름을 일본말로 고치지 않은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지금 성주가 왜놈들과 싸우고있는데 네가 이름을 일본말로 고치면 되겠느냐, 맞아죽으면 맞아죽었지 절대로 이름을 일본말로 고쳐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였다.

이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하직하고 고향을 떠날 때에는 모두들 나라를 찾고서야 돌아오겠다면서 씩씩하게 사립문을 나섰다.

그러나 그들가운데서 조국으로 돌아온것은 나 하나뿐이였다.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쳐온 아버지는 이역에서 32살에 세상을 떠났다. 남자의 나이 32살이면 한창시절이다. 장례가 끝난 다음 고향에서 할머니가 들어와 무송 양지촌에 있는 아버지의 묘앞에서 목놓아울던 일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6년후에는 또 어머니가 안도에서 독립의 날을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후에는 유격대에 들어가 총을 잡고 싸우던 동생 철주마저 전사하였다. 전장에서 싸우다 죽었으므로 동생은 유해조차 건지지 못하였다.

몇해후에는 마포형무소에서 장기형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던 작은삼촌이 모진 고문끝에 옥사하였다. 그때 우리 집에서는 시신을 찾아가라는 통지를 받고도 돈이 없어 찾아오지 못하였다. 그래서 작은삼촌의 유골은 마포형무소 공동묘지에 묻히였다.

끌끌하던 자손들이 스무해사이에 다들 이렇게 낯선 산천에 한줌 흙으로 뿔뿔이 흩어져 널리였다.

해방이 되여 고향에 돌아왔을 때 할머니는 사립문밖에서 나를 부둥켜안고 《아버지, 어머니는 어데다 두고 이렇게 혼자 왔느냐, … 같이 오면 못쓴다더냐!》 하며 내 가슴을 두드리였다.

할머니의 심정이 그처럼 비통할진대 만리타향에 무주고혼이 되여 누워있는 선친들의 유해마저 모시지 못하고 고향집 사립문에 홀몸으로 들어선 내 마음이야 어떠했겠는가. (3부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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