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 평전2 “그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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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봄호수
댓글 0건 조회 7,257회 작성일 16-03-17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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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 <이현상 평전 2> “그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올 1월에 쓴 <이현상 평전>과 이어지는 글입니다

北이 버리고 南이 저주한 최후전선 빨치산 항전대.

고독한 혁명가, 외로운 파르티잔(빨치산)의 영웅 火山 이현상 [한국의산천]

 

젊은 나이에 사망한 작가나 시인, 예술가에 대해서 대중은 말한다. 천재시인. 천부적인 기질을 가진 예술가의 안타까운 죽음이라고... 그렇다고 천수를 누린 예술가의 실력과 삶을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다. 여기 이곳에 젊은 나이는 아니지만 예순이 되기 직전에 원치 않는 죽음을 당한이가 있으니 나 역시 그분의 삶에 대해 안타까운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다.

  

파르티잔(빨치산) 이현상

라틴아메리카 혁명가 체 게바라(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쿠바에서 혁명활동을 한 사회주의자)에 대해서는 알아도 우리 한국의 민중혁명가 이현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부분이 많다. 쉽게 들은 바로는 빨치산 두목정도.... 

 

이현상(1905-1953)은 한국 현대사의 격류를 건너 갈 때 반드시 딛고 가야 할 전설적인 민중혁명가이다. 그는 우리 현대사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해 왔지만 일제 치하 모진 고문과 회유 그리고 12년간의 옥살이에도 어느 한순간 변절하지 않았으며, 해방 후 더욱 가혹해진 탄압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조차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민족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던 진정한 휴머니스트이자 사회주의자였다. 외로운 투쟁 빨치산의 영웅 이현상.

 

이데올로기는 반드시 적대되는 이데올로기를 낳기 마련이다. 악착같은 공산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이에 못지 않은 투철한 반공(反共)이데올로기를 낳으며 서로간에 총부리를 겨누며 쫓고 쫓기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무서운 것이다. 누구라도 자신의 이념과 반대되는 세력에 대해서는 폭력적이고 전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땅에 전쟁이 없어야 한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사라지지 않는 것이 역사라는 이름의 장강대하일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니, 기억 또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이 그 기억을 적어두는 기록이다 -이현상 평전 발문(김성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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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부군(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 ⓒ 2008 한국의산천

 

말단 대원이던 나로서는 그와 대화할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진회색 인조털을 입힌 반코트를 입고 눈보라치는 산마루에 서서 첩첩 연봉을 바라보고 있던 이현상의 어딘가 우수에 잠긴 듯하던 옆 모습은 지금도 선명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소설 <남부군>저자 이태-  

 

 이현상은 투철한 항일 독립운동가, 공산주의 혁명가,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지도자임에 분명하다. 먼저 그는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견디며 끝까지 투쟁한 독립운동가였다. 그와 함께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던 이승엽등이 한때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거나 협조하는 모습을 보인데 반해 그는 일제와의 싸움에서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의지를 보여주었다. 명확하게 드러나는 면은 아니지만, 그는 상당히 민족적 정서를 가진 공산주의자였으며, 그에게 있어 진정한 해방은 일제로부터의 조국독립과 계급해방이 함께 하는 것이었다.

 

또, 그는 조선공산당, 후에는 남로당이라는 해방전후의 한국 공산주의 운동을 이끈 혁명가였다. 당시 공산당에는 남로당과 북로당, 해외파와 국내파등 수많은 계파간의 갈등이 존재했고, 이들 계파들은 수많은 희생을 치르며 변화해갔다. 이런 환경속에서 이현상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내며 지리산으로 찾아들었고 지리산에서 죽어갔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많은 이견들이 있지만, 그는 죽기전에 '제5지구당 위원장'직을 박탈당하고, 평당원으로 강등되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또 그는 이런 결정을 수용하였으며 조선공산당 내부의 갈등속에서 정해진 길을 걸어간 것이다. 

 

1953년 7월 그 민족적 비극을 마무리하는 휴전협정문서에는 각 상대방 후방에 남겨진 물자와 장비의 철거, 심지어 전사자의 시체발굴과 반출에 관한 조문까지 있지만 그 무렵 남한의 험준한 산악에는 아직도 수백명의 인간들이 일체의 정보도 차단된채 절망적인 항전이 계속되며 쓰러져기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北이 버리고 南이 저주한 최후전선 빨치산 항전대.  

 

智異風雲當鴻動 지리산에 풍운일어 기러기떼 흩어지니
伏劍千里南走越 남쪽으로 천리길 검을 품고 달려왔네
一念何時非祖國 오직 한뜻 한시도 조국을 잊은적 없고
胞有萬甲心有血 가슴에는 철의 각오 마음속엔 끓는 피 있네  -火山 이현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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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이 버리고 南이 저주한 최후전선 빨치산 항전대. 

한동안 금기시 되어있던 빨치산에 관한 책들이 한두권 나오기 시작하였다. 벌써 20년전의 이야기다. 

 

남부군 상하권이 1988년 7월 11일 나오고 행림출판사에서 '빨치산'이 1988년 8월 20일 출간되었다. 1988년은 이데올로기 해금시대인가.... 그리고 이번 2007년 7월 출판된 이현상 평전(評傳) 을 구입하고 숨가쁘게 읽었다.

 

이현상 평전을 읽으며 지리산을 생각했고 지리산에서 스러져간 불쌍한 영혼 수많은 빨치산을 떠올렸습니다.  

 

 

빨치산

 

러시아어 파르티잔(Partizan)에서 나온 말로 적의 배후에서 비정규전(게릴라전술)을 펼치며 통신,교통 시설을 파괴하거나 무기나 물자를 탈취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별동대 비정규군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6·25 전쟁 전후에 각지에서 활동했던 공산 게릴라를 이른다.  

 

빨치산은 당시 토벌당국에 의해 남부군, 남부군단 또는 이현상부대 또는 나팔부대로 불리워지던 게릴라부대의 명칭이며 그 정식호칭는 독립제 4지대였다. 남한 최초의 조직적 좌익 게릴라 부대였으며 순수 유격부대였고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이현상이 총사령관으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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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이태 著 남부군 소개 기사를 보고 스크랩한다음 서점에 가서 구입하였다. 꼭 20년전의 일이다.  ⓒ 2008 한국의산천 

 

민족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던 휴머니스트이자 사회주의가 火山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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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6·10만세운동에 앞장섰다가 첫 감옥살이에 들어간 젊은 이현상  

 

이현상 (공산주의 운동가)
출생지 : 충남 금산(錦山)
1906년 충남(당시는 전북) 금산(錦山)에서 태어났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때인 1925년 조선공산당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7년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한 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산하 학생부원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반일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일제의 대규모 공산당 검거 때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출옥 후 박현영(朴憲永) 김삼룡(金三龍) 등과 함께 경성콤그룹을 결성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지리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고, 8 15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하였다. 공산당이 남조선노동당으로 개편된 뒤 연락부장 등의 요직을 맡아 활동하다가 남한에서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되자 월북하였다.


1948년 북조선노동당의 결정에 따라 다시 남한으로 내려왔다. 지리산으로 들어가 6· 25 전쟁을 거치면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였다.

1951년 북한당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남한 빨치산의 조직인 남부군(南部軍)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각 도당 유격대를 남부군 사령부에 소속시키는 등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하다가 1953년 휴전 이후 군경 합동으로 실시된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때 사살당하였다.

 

이현상은 그가 살아있던 51년, 이미 북한에서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고, 52년에는 자유독립훈장 제1급을, 53년 2월에는 영웅칭호를 받았다. 김일성은 지리산에 있는 이현상에게 영웅훈장 약장을 보내기도 했다. 그후 이현상이 죽은후인 68년, 북한은 '혁명 애국열사'로 정식으로 선정되었다. 이때 이현상은 열사증 000001번으로 첫 열사증을 추서받아 혁명열사릉에 안장(가묘)되었다. 또 이현상은 90년 8월 조국통일상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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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의 아침 ⓒ 2008 한국의산천 

  

연보 (연보는 "이현상 평전"에서 어설프게 자판을 치며 옮겨 왔습니다)

1905년 9월 27일 (1세)

충청남도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 116번지에서 사백석지기양반집 육남매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이면배와 두 형 이형기, 이현석이 차례로 군북면 면장을 지냈다.

 

1910년 6세

8월 22일 한일합방 조약으로 조선은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다.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기 시작

 

1920년 16세

2월 전북 무주군 무풍면 출신의 최문기와 결혼

 

1921년 17세

금산 읍내 금산 보통학교 사학년에 편입

 

1923년 19세

전북 고창군의 사립 고창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일학년 때 평균 91점으로 48명중 1등. 2학년 때는 평균 85점으로 3등을 하였다. 담임선생은 학적부 성적란에 '침착하며 약간 집요한 데가 있다'고 기록. 말수가 적고 차분한 성격이면서도 한번 시작한 생각이나 일을 포기하지 않아 고집불통이라 불렀다. 

큰딸 무영 출생

    

1926년 22세

순종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6월10일 오전 8시 15분 종로 3가 단성사 앞에서 태극기를 펼쳐들고 맨먼저 뛰쳐나가 만세를 불러 6·10 만세 운동에 불을 붙였다. 구속 6개월 만인 11월 17일 기소유예로 석방되나 중앙고보에서 퇴학당한다.

 

1927년 23세 4월에 중국 상하이로 밀항. 한인 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해외운동의 분파성과 안일함에 회의를 느껴 3개월 만인 7월에 귀국. 금산 집에 머물며 금산청년동맹, 금산학우회, 금산학생친목회 등에서 활동한다.

외아들 극출생

 

1928년 24세

서울의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 조선공산당의 청년단체인 고려공산청년연맹에 가입. 학생 야체이카를 조직하고 책임을 맡음. 학생과학연구회 서무부장을 맡는 동시에 개인적으로는 보성전문과 연희전문, 제일고보 학생들을 조직하여 투쟁을 지도하는 임무를 맡음. 양정고보와 경신고보 동맹휴학을 지도.

활동 4개월만인 9월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 3개월간의 가혹한 고문 끝에 징역 4년형을 언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됨. 감옥에서 이재유, 김삼룡 등을 만나 장차 노동운동을 함께 하기로 약속.

 

1932년 28세

11월에 만기 출소 후 이듬해 1월 김삼룡, 이재유 등과 '조산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 트로이카' 결성. 동대문과 용산을 중심으로 한 서울지역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담당.

 

1933년 29세

경성트로이카 최고지도부의 일원으로서 동덕여고보, 조선중앙기독교 청년학교, 숙명여고보, 경성제대 등 십여 개 학교의 동맹휴학을 지도하는 한편, 8월부터 9월까지 별표고무, 종연방직 등 여덟개 공장의 연쇄파업을 지도. 12월에 체포되어 징역 4년을 언도 받고 서대문형무소와 함흥형무소를 전전.

 

1934년 30세

둘째 딸 문영 출생.

 

1938년34세

6월에 만기 출소하여 이관술, 김삼룡, 이순금, 정태식 등과함께 조직재건에 나서 십여 개 공장에 노동자 조직을 선설하는한편, 12월에 화요회 계열의 지도자 박헌영을 영입해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콤그룹'을 결성. 인민전선부와 선전부를 맡아 국내의 항일무장투쟁을 준비.

 

1940년 36세

10월에 체포되어 재판을 기다리던 중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폐병으로 건강악화.

셋째딸 상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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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금수강산'에 공개된 이현상의 막내딸 이상진 ⓒ 2008 한국의산천

 

북한에서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일등서기관이 되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방문 당시, 평양의 만수대의사당을 안내했다.

이현상은 최문기와 결혼, 1남3녀를 두었다 큰딸은 무영(茂永.23년생), 둘째는 외아들 극(剋.27년생) 둘째딸 문영(文永.34년생), 셋째딸이 상진(尙鎭.40년생)이다. 한때 남한에 그의 딸이 살고 있다는 설이 있었으나, 확인된 바로는 이현상의 가족은 월북하여, 북한에 정착하였다.

 

1942년 38세

10월들어 이십일간의 단식투쟁으로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병보석으로 석방됨. 3개월 후의 재수감을 거부하고 도주, 덕유산 단지봉 아래 암자에서 건강을 회복한 후 이주상과 함께 경상도 지역에 내려가 활동하다가 경찰에 발각되자 대전으로 올라와 이관술, 김봉한 등과 활동. 가까운 금산과 대전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음.

 

1945년 41세

9월 19일 명륜동 김해균 집에서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 재건모임에 참여.

9월 19일, 정식으로 '통일재건 조선공산당'이 출범되자 박헌영, 김삼룡, 김형선과 함께 조직국 정치위원으로 선출됨.

11월,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회장에서 조선공산당을 대표해 축사.

12월, 국군준비대 전국대회에서 인민의 군대가 되라는 내용의연설.

 

1946년 42세

11월 23일 남조선노동당 결성. 중앙위원으로서 노동부장에 선출됨.

얼마 후 남로당 간부부장과 기관지 노력인민의 인사부장을 겸임함.

 

1947년 43세

2월 7일, 영등포 조선피혁에서 좌우익 노동자들 사이에 폭력사태가 벌어지자 남로당 노동부자응로서 관여하다가 체포됨. 일제 아래 악명높은 고문전문가이던 노덕술 등으로부터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두달만에 불기소로 석방됨, '고문강자'라는 별명이 붙음.

6월 25일, 기관지 노력인민에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이던 약산 김원봉에 대한 기고문을 게재하는 등 무력투쟁으로의 방향전환 시사.

7월, 남로당 내에 군사부를신설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함.

 

1948년 44세

3월 하순, 철원의 노동당 루트를 따라 38선을 넘어 월북.

4월 14일, 평양에서 열기로한 남북연석회의에 남로당 대표로 참석.

5월부터 3개월간 해주의 강동정치학원에서 군사훈련을 받음.

8월초 평양에 올라와 김일성과 면담한 후 이주하와 함께 남한으로 돌아옴.

10월 22일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남 여수의 국방경비대 제 14연대를 지도하기 위해 순천역에 도착, 반란 주동자들로부터 지휘권을 인수받아 본격적인 무장유격전 시작.

11월 중순, 600여명의 반군을 규합, 정식으로 지리산유격대를 결성하고 로명선이란 이름으로 사령관에 취임, 지리산 일대에서 군경과충돌을 계속.

 

1949년 45세

1월 중순, 반란 주모자 지창수 체포, 부유한 가족들의 구명운동으로 사형을 면했으나 이듬해 한국전쟁 발발 직후 처형당함.

2월 28일 남로당 문화부장 김태준이 인솔하는 시인 유진오 등 일곱명의 문화공작대 조우. 문화공연을 하고 이틀만에 귀경하던 공작대 전원 남원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함.

4월 8일 한달 간의 삼일절 기념투쟁 중 거창에서 국군 대병력을 만나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지리산으로 돌아오던중 본부대 일행, 뱀사골 반선리에서 반공주민들의 유인작전에 넘어가 술 마시고 자다가 몰살됨. 김지희. 홍순석 등 본부대 지휘자 열일곱 명이 사망하고 이현상은 잔여 인원 150여명을 이끌고 피아골 구례군당에 합류.

5워르 남로당 지도부로부터 지리산에 인접한 여수,순천,광양, 구례,곡성의 다섯 개 지구당을 통합해 이현상이 위원장을 맡아 지도하라는 지령 도착, 이에 따라 구례군당 유격대 등을 통합해 300여 명 규모의 유격대로 전열을 재정비하고 박종하를 참모장으로 함.

6월 25일, 평양에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 결성되고 30일에는 조선노동당 창당. 김일성과 박헌영, 소련으로 부터 전쟁 물자를 공급받는 한편 800여 명의 유격대를 남파. 이현상의 지리산 부대는 제2병단으로 명명됨.

9월들어 9·9투쟁에총력, 수백건에 이르는 크고작은 전투와 시설물 파괴 감행. 9월 16일 광양에서 국군 15연대 기습, 600여명을 살상하고 700여명의 포로를 잡았다가 교육 후 방면함.

 

1950년 46세

1월, 군경토벌대의 대대적인 동계공세로 북한에서 내려운 1,3 병단 괴멸과 함께 이현상의 제 2병단도 큰 타격을 입음.

3월 서울의 남로당 지도부 김삼룡 이주하 정태식이 체포되면서 지리산유격대 고립심화.

6월 중순, 칠십여명의 잔존대원을 이끌고 지리산을 떠나 북상 시작.

연락두절로 한국전쟁 발발 사실을 모르는 채 한달여 전투를 계속하던 중 무주 근방에서 전쟁 발발 사실 확인.

7월 하순 무주에 진주해 인민군과 조우, 대전의 인민군 전선사령부로 부터 낙동강전선을 넘어 대구 팔공산을 점거하고 유격투쟁을 하라는 지시를 받음.

8월 1일 90여명의 유격대를 이끌고 낙동강을 도하, 두 달간 미군부대를 습격, 수백 명 이상을 사살하고 수많은 군수물자를 파괴하고 백명이상의 포로를 잡았다 풀어주는 등 대구 주변 미군지역을 휩쓸고 다님.

10월초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선이 끊기면서 북으로 후퇴 시작. 인민군 낙오병, 인공 부역자 등 이천여명의 피난민을 호위해 한 달 만에 북강원도 후평에 도착. 이승엽으로부터 남한유격대 총지휘권을 받음.

11월 10일 860명 대원을 남부군 창설, 총사령으로 취임. 참모장 박종하, 정치위원 차일평 등을 선임. 15일 아침 남쪽으로 출발함.

12월 중순 인민군 총사령부에서 남한 유격대를 6개 독립지대로 나누고 이현상을 제 4지대장으로 임명하는 새로운 명령을 내렸으나 남부군에는 전달되지 못함.

 

1951년 47세

1월 중순, 소백산에 자리 잡고 이웃한 문경군과 단양군 도시들을 공격, 십일간 죽령을 점거해 미군의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힘.

2월 미군 공습에 밀려 남하 중 세균전에 노출, 백여명의 대원을 재귀열로 잃고 속리산에 들어감.

3월 속리산 남부 지역의 갈평 등 5개 산간 마을을 점거하고 주변도시들을 공격, 삼개월간 연전연승을거둠. 기관지 '승리의 길'창간.

5월 26일 충북도청 소재지 청주 기습,  여러 관공서를 불태우고 청주형무소의 좌익수 백사십이명 석방시킴.

6월초 민주지산에 자리 잡고 인근 도시와 경부선의 군용열차를 습격함. 두 갈래로 나뉘어 남하하면서 덕유산 일대와 경상북도 내륙의 도시들을 기습, 막대한 피해 입힘.

6월 중순 덕유산 송치골에서 남한 6개 도당 위원장을 소집해 남한유격대를 하나로 묶는 남부군 결성에 합의, 총사령관으로 취임함.

이후 수개월간 덕유산과 지리산 일대에서남부군의 공격으로 군경이 막대한 피해를 입음.

8월 14일 참모장 박종하, 가회전투 도중 사망. 남부군은 지리산으로 들어감.

8월 31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남한을 5개 지구로 나누고 이현상을 전남과 전북,충남과 경남 등 남한 남부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제5지구당  위원장으로  임명하나 연락 두절로 일 년 후에야 지리산에 도착하게됨.

11월 중순, 북한의 밀사가 도착 1950년 12월 인민군  총사령부에서 내린 독립지대령을 전달, 이미 무효화된 명령에 따라 남부군을 해산하고 독립지대4로 재편성함.

11월말, 군경토벌대의 제1차 동계공세시작됨. 중부전선에서 내려온 국군 3개 사단과 경찰 등 사만병력이 지리산을 포위하고한번에 이주일씩 세차례에 거쳐 총공격 감행.

 

1952년 48세

1월 18일 대규모 군경토별대에 쫓기던 지리산 일대 유격대와 좌익피난민 등 이천여명 대성리 골짜기에서 포위됨.미군의 네이팜탄과 폭격으로 천명이상 죽거나 체포됨. 독립 4지대도 한달 전 사백명이던 대원이 백오십명으로 줄어듦.

8월 1일 조선노동당 제 94호 결정서 '미 해방지구에 있어서의 우리당사업과 조직에 대하여'가 남하 도중 체포되어 전향한 북한 연락원에의해 도차됨. 이현상, 지리산 일대 남부 전역을 지도하는 제 5지구당위원장으로 취임. 명령서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상선연락대 보내나 속리산에서 전멸.

12월부터 군경토벌대 2차 동계공세시작, 삼개월간 제5지구당 산하유격대 전체에 치명적 타격입힘.

 

1953년 49세

3월 하순 북한에서 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 출신들에 대한 체포 시작 일제시대부터 전향해 일본과  미국의 간첩으로서 남한의 혁명역량을 고의로 파괴시킨 혐의로 조사 받음.

7월 27일 미국과 북한 사이의 휴전협정이 타결. 산중의 도당 소속당원들 하산 지시. 무장유격대원 일부도 하산 지시.  이현상 자신의아이를 임신한 간호요원 하수복을 하산시키나 화개장터에서 체포됨.

8월 3일 이승엽등 여덟 명의 남로당 지도부, 미제의 간첩이라는 명목으로 처형되고 연금 상태에 있던 박헌영도 정식으로구속됨.

8월 26일 제5지구당 조직위원회 개최, 남로당의 종파주의 잔재를 청산하기위한 자아비판 시작. 이현상 미제간첩 이승엽의 지령에 따라 남부군 결성하고 정규군식 부대 운영으로 대원들을 소모했으며 당 간부로서 모범을 보이지 않고 하수복과 연애했다는 등의 비판을 받음.

제5지구당 해체되고 이현상은평당원으로 하산하여 지하에서 활동하라는 결정이 내려짐. 수십명의 직할 유격대도 도당 부대로 흡수, 분산됨.

9월 18일 경찰 수색대, 오전 열한시 빗점골 합수내 옆에서 이현상의 시신 발견. 국군 수색대, 전날 저녁인 17일밤 여덟시에 자신들이 사살했다고 주장.

이현상의 시신, 이십일간 서울 창경원 등지에서 전시된 후 10월 8일 화개장터 근처 섬진강 백사장에서 경찰토벌대장 차일혁에 의해 화장되어 섬진강에뿌려짐.

 

1968년 사후 15년

평양신미동에 조성된 애국열사릉에 만들어진 가묘에 안장. 제 1호 열사증 추서 받음.

 

1990년 사후 37년

8월, 북한 정부로부터 조국통일상에 추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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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의 아침 ⓒ 2008 한국의산천  

 

빨치산 해체 과정(위키백과 참고)
 
조선인민유격대는 1953년 1월 박영발의 죽음에 이어 1953년 9월 제5지구당 해체와 이현상 사망, 1954년 1월 방준표의 자살로 지도부를 거의 잃고 사실상 해체 상태에 있었다. 1954년 4월 5일에 전남총사령부 사령관 김선우가 백운산에서 사망하여 전남총사령부가 붕괴한 시점에서는 공식 해체에 가깝게 되었다.

이 무렵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유격대원들은 대부분 소탕되어 잔존 세력은 남은 공비라는 의미로 '잔비'로 불렸고, 1955년 4월 1일부터는 지리산에 대한 입산통제 조치도 해제되었다. 민간인이 지리산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대한민국 영역에 남아 있던 유격대원의 수는 59명으로 파악되었으며, 1956년 12월 31일에는 43명으로 줄어들었다.

1963년 11월 12일에 경상남도 산청군의 지리산 기슭에서 마지막 남은 유격대원인 이홍이가 사살되고 정순덕은 생포되어 완전히 소멸했다.

 

얼마전 작고하신 박경리 선생의 사위이자 시인이신 김지하선생의 詩를 읊으며 마무리 합니다

 

지리산
            -김지하-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숲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저 대 밑에
저 산 밑에
지금도 흐를 붉은 피

 

지금도 저 벌판
저 산맥 굽이굽이
가득히 흘러
울부짖는 것이여
깃발이여
타는 눈동자 떠나던 흰옷들의 그 눈부심

 

한 자루의 녹슨 낫과 울며 껴안던 그 오랜 가난과
돌아오마던 덧없는 약속 남기고
가버린 것들이여
지금도 내 가슴에 울부짓는 것들이여

 

얼어붙은 겨울 밑
시냇물 흐름처럼 갔고
시냇물 흐름처럼 지금도 살아 돌아와
이렇게 나를 못살게 두드리는 소리여
옛 노래여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숲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아아 지금도 살아서 내 가슴에 굽이친다
지리산이여
지리산이여.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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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천왕봉의 아침 ⓒ 2008 한국의산천 

 

국립공원 제1호 지리산

철쭉꽃 지천으로 피어나는 봄부터 계절마다 울긋불긋한 복장의 등산객으로 온산이 붐비는 지리산

지리산 이 능선 저 계곡에서 영하 20도가 넘는 추위를 참아가며 쫓고 쫓기는 전쟁. 반백년전에 이산 구석 구석의 능선과 계곡에서 원치않은 전쟁에 운명처럼 차출되어 피를 흘리며 죽어간 젊은 나이 또래들의 빨치산의 존재는 점점 뇌리에서 잊혀지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49년 이래 5년여에 걸친 소백·지리지구 공비토벌전에서 교전회수 실로 10,717회 전몰 군경의 수 6,333 명, 빨치산측 사망자수 줄잡아 1만 수천명등 피아 2만 여명의 생명이 희생된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데올로기, 이념이란 각자의 종교적 신념과 같은 것이다. 이데올로기에 대해 좋고 나쁘다를 평하는것은 종교적인 싸움과 다를바 없는것이다. 문제는 이데올로기를 실현코자 하는 행위가 얼마나 올바른길을 택하는냐에 따라 문제는 달라진다.

다시는 이땅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통탄스러운 민족의 비극이다.

 

 

시간을 내어 그의 고향인 충청남도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를 찾아가봐

 

출처:  http://blog.daum.net/hk2027/758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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