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10회) 1권 2장-2 / 환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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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776회 작성일 20-06-05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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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카나다동포전국련합회)

전략... 애숭이신입생으로서 나이많은 사람들의 짐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여겼던 내가 학습과 교련에서 남들에게 뒤지지 않고 또 일상생활에서도 ...

중략... ​화성의숙에서 배워주는것은 민족주의사상과 구한국냄새가 나는 낡은 군사훈련뿐이였다... / 나를 제일 실망케 한것은 화성의숙의 사상적락후성이였다.​.. / 화성의숙의 정치과목수업에서는 조선독립과 조선의 민중이라는 산 현실에 대한 고찰이 전혀 없었다...  /  봉건왕조를 되살리겠다는것도 그렇고 자본주의길로 나가야 한다는것도 그렇고 다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답답해졌다.​..  /  일제는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조선사람들이 나라의 독립을 원한다면 정치적으로 일본의 통치를 반대하여나설것이 아니라 그에 협력하여야 하며 일본의 식민지통치밑에서의 자치권을 얻기 위해 힘써야 하며 문화를 향상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며 민족성을 개량해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이 설교를  통채로 받아문것이 바로 자산계급출신의 민족운동지도자들이였다.../ 

이와 같은 개량주의의 바람이 화성의숙에도 불어왔다.​ (본문중에서)

 

                                                                                                        2.환 멸

 

나는 인차 화성의숙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두어주일가량 공부해보니 학과목들도 별로 어려운것이 없었다.

의숙학생들이 제일 골치아파하는 과목은 수학이였다. 어느날 수업시간에 여럿이 지명을 받고도 풀지 못한 길다란 사칙문제를 내가 별로 어렵지 않게 풀어냈더니 그들은 몹시 신기해하였다. 여러해동안 정규교육에서 떨어져나와 독립군생활을 해온 사람들이였으므로 그럴수밖에 없었다.

그후부터 나는 수학때문에 단련을 받았다. 머리를 쓰기 싫어하는 몇몇 수염쟁이청년들이 수학숙제를 할 때마다 찾아와서는 성화를 먹이였다.

그 대가라고 할지 그들은 나에게 여러가지 체험담을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들가운데는 들을만한것이 많았다.

강한 육체적부담을 요구하는 군사훈련이 있을 때에도 그들은 나를 도와주려고 여러모로 애를 썼다.

그러는 과정에 우리는 서로 마음속 깊은 사연까지도 서슴없이 헤쳐보이는 다정한 벗들이 되였다. 애숭이신입생으로서 나이많은 사람들의 짐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여겼던 내가 학습과 교련에서 남들에게 뒤지지 않고 또 일상생활에서도 네것내것이 따로없이 학우들과 잘 섭쓸려돌아갔기때문에 그들도 년령의 층하를 두지 않고 나를 가까이 대해주었다.

그만하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좋았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그후 얼마 안되여 화성의숙의 교육은 점차 나의 마음에 들지 않게 되였다. 아버지의 친구들이 세운 학교이고 아버지의 연고자들이 주관하고 운영하는 학교이지만 나는 여기서 전 세대가 남긴 사상과 방법에서의 낡은 잔재를 발견하게 되였다.

부르죠아민족주의운동의 력사가 수십년 되지만 의숙의 교육에는 그것을 집대성하고 비판적으로 분석총화하는 리론이 없었다. 부르죠아민족주의자들은 수십년동안이나 민족주의운동을 지도해오면서도 그 운동의 지침이 되고 교훈이 될만한 론문이나 교과서 하나 똑똑히 만들어놓지 않았다. 화성의숙에 찾아오는 독립군의 거두들이나 애국지사들도 그저 막연하게 연탁을 두드리며 독립하자고만 부르짖었다. 혁명력량은 어떻게 편성하고 대중은 어떻게 동원시키며 독립운동대렬의 통일단결은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가 하는 방법도 없었고 무장투쟁의 교범이나 전술 같은것도 변변치 못하였다. 조선력사과목은 왕조사본위로 엮어져있었고 세계혁명사도 부르죠아혁명사가 기본을 이루고있었다.

화성의숙에서 배워주는것은 민족주의사상과 구한국냄새가 나는 낡은 군사훈련뿐이였다.

민족주의사상에 깊이 물젖은 선생들이 비록 반일과 민족적독립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하고있었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투쟁방법은 뒤떨어진것이였다. 학교당국은 전투경험이 있는 독립군대원들을 데려다가 무훈담을 자주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 무훈담을 통해서 고취하는것은 안중근, 장인환, 강우규, 리재명, 라석주와 같은 렬사들이 적용하였던 개인테로의 방법이였다.

학생들은 독립군의 간부들을 키워내는 군관학교라는것이 말뿐이지 실탄사격에 쓸 탄알마저 없어 늘 나무총이나 가지고 훈련해서야 무슨수로 왜놈들을 내쫓겠는가고 하면서 불평을 터놓군하였다.

한번은 어떤 학생이 언제면 우리도 신식총을 다루어볼수 있는가고 군사교관에게 물은적이 있었다. 교관은 몹시 난처해하면서 지금 독립군간부들이 군자금을 해결해가지고 미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 무기를 사올 계획으로 맹활동을 하고있으니 인차 해결될것이라고 얼버무리였다. 총 몇자루를 얻지 못해 이렇게 몇만리밖에 있는 서양나라들을 쳐다보는 형편이였다.

나는 군사훈련시간에 아래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달릴 때마다 이렇게 해서 왜놈들을 타승할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지난날 수천수만명을 헤아리는 전봉준의 동학군은 우금치라는 고개에서 천명의 일본군을 당해내지 못해 지리멸렬되였다. 그때 일본군은 신식총으로 무장하고있었다. 동학군은 100명이 한놈씩만 제껴도 공주를 치고 서울까지 내처 달려갈수 있는 유리한 형세였는데 무장이 약하고 군세가 약하여 참패하고말았다.

의병의 무장도 동학군보다는 별로 나은것이 없었다. 의병들에게도 얼마간 신식총이 있었지만 그 량은 한정되여있었고 대부분의 성원들은 도창무기가 아니면 화승대를 사용하였다. 의병투쟁을 화승대와 38식보총의 싸움이라고 력사가들이 말하는것도 이런 리유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총탄 한방을 쏠 때마다 매번 손으로 불을 붙이지 않으면 안되는 화승총으로 분당 10발 이상씩 쏠수 있는 38식보총을 제압하려면 얼마나 비참한 인내를 체험해야 하며 얼마나 간고한 싸움을 해야 하는가 하는것은 그다지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을것이다.

화승대의 성능이 아직 의병들만 아는 비밀로 남아있을 때까지는 일본군대가 이 화승대의 총성만 듣고도 겁에 질려 달아났는데 성능을 안 다음부터는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우습게 여기였다니 그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되였겠는가. 량반도덕과 계률에 밝은 유생출신의 의병들은 전투중에도 대관을 쓰고 거치장스러운 도포차림으로 싸움을 했다고 한다.

이런 의병들을 일본군대는 대포와 기관총으로 짓뭉개놓았다.

일본의 국력이 그때보다는 어방없이 강대해졌는데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니는 훈련이나 해가지고 과연 땅크, 대포, 군함, 비행기와 같은 현대적무기와 중장비들을 계렬식으로 만들어내는 제국주의강군을 꺼꾸러뜨릴수 있겠는가.

나를 제일 실망케 한것은 화성의숙의 사상적락후성이였다.

학교당국이 민족주의외통길로만 나가면서 다른 사상은 다 경계하다나니 학생들도 자연히 그 흐름을 따라가지 않을수 없었다.

화성의숙에는 왕조정치에 미련을 가지거나 미국식민주주의에 환상을 가지는 청년들도 있었다.

그런 경향은 세계혁명사과목의 학과토론시간에 제일 우심하게 나타났다. 선생의 지명을 받은 학생들은 강의시간에 취급된 내용을 그대로 되풀이해 옮기면서 자본주의발전에 대하여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들의 그 교조적인 학습태도에 나는 불만을 금할수 없었다. 화성의숙의 정치과목수업에서는 조선독립과 조선의 민중이라는 산 현실에 대한 고찰이 전혀 없었다. 그저 교과서나 교수요강에 제시된 내용들을 기계적으로 배워주고 받아낼뿐이였다.

토론을 실천문제, 조선의 장래와 관련된 문제를 놓고 하는것이 옳다고 생각한 나는 방금 토론을 한 학생에게 우리 나라에서는 독립후 어떤 사회를 세워야 하겠는가고 물어보았다.

질문을 받은 학생은 자본주의길로 나가야 한다고 서슴없이 대답하였다. 우리 민족이 왜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긴것은 다른 나라들이 자본주의길로 나갈 때 우리 나라에서는 봉건통치배들이 음풍영월로 허송세월하였기때문인데 그런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도 자본주의사회를 세워야 한다는것이였다.

어떤 학생들은 봉건왕조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민주주의사회를 세워야 한다거나 근로인민이 주인된 사회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생들은 없었다. 민족해방운동이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전환을 할 때인데 이런 시대사조를 전혀 념두에 두는것 같지도 않았다.

독립후 어떤 나라를 세우는가 하는것은 그때에 가서 볼일이지 독립도 되기전에 자본주의냐, 왕조복귀냐 하는것은 싱거운 일이라고 하면서 팔짱을 지르고 앉아있는 학생들도 있었다.

나는 그런 토론을 들으면서 화성의숙에서 실시하는 민족주의교육이 시대에 뒤떨어진것이라는것을 더욱 통절하게 느끼였다. 봉건왕조를 되살리겠다는것도 그렇고 자본주의길로 나가야 한다는것도 그렇고 다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는 참다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나라는 구라파나라들처럼 부르죠아혁명을 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낡은 봉건통치기구를 그대로 되살려도 안된다고 말하였다.

자본주의나 봉건사회는 다같이 돈많은놈들이 근로대중을 착취하여 호강하는 사회이다, 독립된후 조선에 이런 불공평한 사회를 세울수는 없다, 기계문명의 발전만 보고 자본주의의 병집을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봉건왕조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것도 당치않은 소리이다, 나라를 외세에 팔아먹은 왕조정치에 그 누가 미련을 품겠는가, 도대체 왕들이 해놓은것이 무엇인가, 백성들의 등껍질을 벗기고 바른 말을 하는 충신들을 목자르고 귀양보낸것밖에 더 있는가,

우리는 조선을 독립시킨후 조국땅에 착취와 압박이 없는 사회,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대중이 잘 사는 그런 사회를 세워야 한다.…

많은 학생들이 나의 주장에 공감을 표시하였다. 착취와 압박이 없는 만민평등의 부강한 사회를 세우자고 하는데 누가 반대하겠는가.

최창걸이도 수업이 끝난 다음 내 손을 꽉 그러잡고 좋은 토론을 했다고 하면서 나를 지지해주었다. 내가 공산주의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공산주의사상을 멋있게 들이먹이더라고 하면서 몹시 통쾌해하였다.

화성의숙의 제한성은 민족주의운동자체의 제한성을 그대로 말해주고있었다. 나는 화성의숙을 통하여 민족주의운동의 전모를 살펴볼수 있었다.

이 시기에 와서는 독립군들도 맥을 못추고 세력다툼만 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에 국내와 압록강연안에서 종종 벌리던것과 같은 실제적인 군사활동은 거의나 하지 않고 관할구역에 틀고앉아 군자금이나 거두며 돌아다니는 형편이였다.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거국적인 정부》라고 자칭하던 상해림시정부의 인사들도 《자치파》니, 《독립파》니 하는 파벌을 이루고 서로 치렬한 감투싸움을 벌리였다. 림시정부의 수뇌자리가 번번히 교체된것도 그때문이였다. 지어는 한해에 두번씩 내각개조놀음이 벌어진 때도 있었다.

림시정부의 요인들은 빠리강화회의때 《조선독립청원서》가 미국을 비롯한 협상국대표들의 악랄한 방해책동으로 회의의정에 상정되지조차도 못했던 사실에서 응당한 교훈을 찾을 대신 민족의 존엄을 훼손시키면서까지 비굴하기 짝이 없는 《청원》놀음을 계속하였다.

심지어 《미국회의원동양시찰단》이라는것이 상해를 거쳐 서울로 들어왔을 때에는 국내에 있는 친미사대주의자들을 부추겨 미국회의원들에게 인삼과 은제품을 비롯한 여러가지 값비싼 물건들을 섬겨바치게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런 림시정부조차도 자금난으로 1920년대중엽에 와서는 그 허울마저 유지하기 어렵게 되였으며 나중에는 장개석의 중경정부에 얹혀다니면서 구차스럽게 지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정치적동요성이 많은 자산계급출신의 민족운동지도자들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근로인민대중의 혁명적진출에 겁을 먹은 나머지 원쑤들에게 투항변절하고말았다. 그들은 《애국지사》로부터 일제의 앞잡이로, 민족개량주의자로 굴러떨어져 민족해방운동을 저애하는 길에 들어섰다.

일제는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조선사람들이 나라의 독립을 원한다면 정치적으로 일본의 통치를 반대하여나설것이 아니라 그에 협력하여야 하며 일본의 식민지통치밑에서의 자치권을 얻기 위해 힘써야 하며 문화를 향상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며 민족성을 개량해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이 설교를 통채로 받아문것이 바로 자산계급출신의 민족운동지도자들이였다. 그들은 《민족개량》과 《실력양성》의 보자기를 쓰고 교육과 산업의 《진흥》을 떠들었고 각 개인의 《자아수양》을 떠들었으며 《계급협조》와 《대동단결》, 《민족자치》를 떠들었다.

이와 같은 개량주의의 바람이 화성의숙에도 불어왔다.

김시우네 집 웃방은 항상 나와 정치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싶어 찾아오는 청년들로 흥성거리였다. 내가 김시우의 서재에 있는 맑스ㅡ레닌주의서적들을 열심히 탐독하고있을 때였으므로 화제는 자연히 정치문제에 쏠리였다.

나는 무송에 있을적에도 《레닌의 일생기》나 《사회주의대의》와 같은 책을 몇권 읽었지만 화전에 와서는 그보다 많은 책을 읽었다. 이전에는 그저 책의 내용을 파악하는데 그쳤다면 화성의숙에 온 다음부터는 책을 읽으면서도 항상 고전에 나오는 혁명의 원리들을 조선의 현실과 결부시켜 생각해보게 되였다. 조선혁명의 실천과 관련해서는 알고싶은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일제를 타도하고 나라를 찾아야겠는데 어떤 방법으로 그 목적을 실현하겠는가, 조국을 광복하는 투쟁에서는 어떤 대상을 적으로 규정하고 어떤 계층과 손을 잡아야 하는가, 나라를 독립시킨 다음에는 어떤 로정을 거쳐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해야 하는가, … 나한테는 이 모든것이 미지수였다.

그런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손에 책을 잡으면 비슷한 대목이 나올 때까지 근기있게 파고들었다. 특히 식민지에 대한 문제가 언급된 대목은 열번스무번 곱씹어읽었다. 그러다나니 동무들이 찾아와도 화제거리가 많았다.

우리는 새 사조에 대한 이야기와 쏘련에 대한 이야기를 제일 많이 하였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날에는 학생들이 저마다 착취와 압박이 없는 새 세계를 눈앞에 그리며 좀처럼 자리를 뜨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왕조복귀나 자본주의나 민족개조를 주장하는 리론보다 그런 이야기들이 훨씬 더 재미난다고 하였다. 그날그날을 되는대로 보내던 학생들속에서는 점차 새것에 대한 동경심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학교에 나가서는 레닌에 대한 이야기나 10월혁명에 대한 이야기도 마음대로 할수 없었다. 학교당국이 그것을 금지시키고있었다.

내 마음속에서는 점차 화성의숙에 대한 기대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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