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25회) 2권 제 4 장 - 2.준엄한 봄(후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819회 작성일 20-12-06 15:49

본문

(전편에 이어) 

그러나 리립삼의 좌경모험주의의 여독은 그후에도 완전히 청산되지 않고 여러해동안 동북일대의 혁명투쟁에 영향을 주었다.

사도황구에 모여온 청년들은 《조선민족의 피가 아깝다.》고 통탄하였고 《우리 혁명이 언제까지나 이런 혼돈속을 헤매야 하겠는가.》고 가슴을 치며 안타까와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힘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폭동의 후과가 큰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후과가 크다고 한탄만 해서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한탄은 그만하고 각지에 나가서 조직을 복구하며 뒤수습을 해야겠다. 중요한것은 종파분자들의 야욕을 발가내고 군중을 그들의 영향에서 떼내는것이다. 그러자면 그들에게 조선혁명의 진로를 가르쳐주어야 한다. 폭동은 비록 류혈로 끝났지만 군중은 그 과정을 통해 크게 단련되고 각성되였을것이다. 조선민족은 이번 폭동을 통해 전투력과 혁명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나는 우리 민족의 그 위대하고 헌신적인 투쟁정신에서 크나큰 힘을 얻었다. 이런 인민에게 과학적인 투쟁방법과 전술을 가르쳐주고 민족이 나아갈 진로를 밝혀준다면 우리 혁명에서 새로운 전환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동무들은 이런 호소를 듣고도 별로 큰 자극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한별동무의 말이 옳다. 그런데 대중을 공감시킬만한 새 진로가 어디 있는가?》 고 하면서 답답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로선은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것도 아니고 누가 만들어서 섬겨바치는것도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주인이 되여 만들어야 한다. 내가 옥중에서 생각해둔것이 있는데 동무들의 의견을 듣고싶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여 차광수, 김혁, 박소심 등과 이미 토론한바 있는 조선혁명의 로선상 문제를 내걸고 장시간에 걸치는 토론을 진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사도황구회의이다. 이 회의에서도 내가 제출한 안은 동무들의 지지를 받았다.

동만의 방방곡곡에서 빚어진 참혹한 류혈은 나를 다시한번 흥분시키고 각성시키였다. 나는 이 동란의 한복판에서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눈앞에 그리며 어떻게 하면 조선의 혁명군중을 피바다속에서 구원해낼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조선의 민족해방투쟁을 역경속에서 건져내고 승승장구하는 혁명에로 인도할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줄곧 하였다.

혁명은 무장을 기다리고있었다. 잘 조직되고 훈련된 혁명군대와 인민을  기다리고있었으며2천만을 승리의 길로 향도할수 있는 강령과 그 강령을 집행할수 있는 정치적참모부를 기다리고있었다 

내외의 정세는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조국과 민족을 해방하기 위한 성전에서 전환을 일으킬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전환이 없다면 우리 민족이 더 많은 류혈과 참화를 당할수 있었다.

나는 우리가 이 전환의 돌파구를 열어야 하며 1930년 여름에 바로 이런 전환을 마련해야 한다는 결심을 가지고 머리속에 떠오르는 사색의 알맹이들을 목책에 쉬임없이 정리해두었다.

우리는 사도황구를 떠나는 조직성원들과 공작원들에게 맡은 임무를 시급히 끝낸후 6월하순에 카륜에서 다시 만날것을 굳게 약속하였다.

그후 돈화에서 길동지구당회의가 열리였다.

회의에서는 폭동에 대한 문제가 론의되였다. 파쟁분자들은 5.30폭동과 같은 폭동을 또 일으키려고 계획하였다.

나는 5.30폭동은 무모한 폭동이였다는것을 비판하고 그들의 계획을 반대하였다.

그해 봄 나는 옥중생활에 이어 5.30폭동까지 겪으면서 많은것을 체험하였다.

참으로 나의 일생에서 1930년의 봄은 잊을수 없는 성장의 봄, 시련의 봄이였다. 이 봄에 우리 혁명은 새로운 전환을 준비하였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2016-2017 KCNCC(Korean Canada National Coordinating Council). All rights reserved

E-mail : kcncc1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