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인 문정인 교수가 지난 16일(현지시각) 미국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해 문재인 대통령의 뜻이라며 "북한이 핵·미사일 활동을 중단한다면 미국과 논의를 통해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축소할 수 있다", "한반도에 있는 미국의 전략무기 배치를 축소할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문정인 교수. ⓒ주권방송
국내 보수 언론들과 야당은 문정인 특사 발언을 맹비난했지만 문정인 특보의 제안은 사실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박지원 국민의당 전 대표조차 "문 특보의 발언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 그리고 미국의 페리 전 국방장관, 어제 한국에서 연설한 하스 미국 외교협회 회장 등 똑같은 내용이다"고 강조하며 시기와 장소는 부적절했지만 내용은 옳았다는 자신의 이전 발언에 대해서도 "시기와 장소가 적절하지 않았다는 제 생각도 틀렸다"고 정정했다.
그렇다면 북한은 이런 제안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일까?
북한의 입장을 예측하기 위해 먼저 북한이 주장하는 '경제건설·핵무력건설 병진노선'(이하 병진노선)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은 2013년 3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해 병진노선을 채택했고 2016년 5월 노동당 제7차 대회에서 당 규약에 명시했다.
당 규약에 명시했다는 것은 당 규약을 수정하기 전까지 북한이 병진노선을 철회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또 같은 시기 열린 당 중앙위원회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보고를 통해 "핵·경제 병진노선은 급변하는 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일시적인 대응책이 아니라 우리 혁명의 최고 이익으로부터 항구적으로 틀어쥐고 나가야 할 전략적 노선"이라고 선언했다.
역시 병진노선이 일시적인 노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 혁명의 최고 이익'이란 노동당의 궁극적 목표, 그러니까 "온 사회를 김일성-김정일주의화하여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완전히 실현"하는 것(2012년 개정 노동당 규약)이다.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완전히 실현"하는 전제조건 중 하나는 미국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며, 이를 위해 핵무장을 하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북한이 이런 노선을 채택한 것은 결국 미국의 체제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핵무장을 통해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유효하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지난해 2월 22일 김원웅 전 의원은 한겨레 기고글을 통해 "미국은 북한을 핵무기로 공격하겠다고 위협해도 되고, 북한은 미국의 핵공격 위협에 맞서 핵억지력을 갖는 것은 안 된다는 주장이 어떻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느냐"고 주장했다.
지난 6월 2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제21차 국제경제포럼(SPIEF)에서 "규모가 작은 국가들도 자립, 안보, 주권 수호를 위해 핵무기 개발 외 다른 대안을 보지 못한다"며 북한의 판단에 공감을 표했다.
이처럼 핵무장을 강화할수록 미국에게서 자신들의 체제를 더 확실히 지킬 수 있다는 북한의 판단은 갈수록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한 지난 4월 13일 열린 평양 려명거리 준공식 사례에서 볼 수 있듯 핵무장에 돌입한 후부터 북한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병진노선에 대한 북한의 확신은 더욱 공고해질 전망이다.
북한이 병진노선을 항구적 노선으로 판단한 이상 북한에게 핵폐기를 요구하는 건 현실성이 없고 대화 국면으로 전환도 불러올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북한에게 핵폐기 대신 핵동결을 요구하는 새로운 협상 목표가 최근 급부상하고 있다.
첫 포문은 미국의 16개 정보기관 총수였던 제임스 클래퍼 전 국가정보국(DNI) 국장이 열었다.
클래퍼 전 국장은 2016년 10월에 있었던 미국외교협회(CFR) 주최 세미나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설득해온 미국의 정책은 사실상 실패했다"며 "그들은 핵을 포기하지 않으리라고 본다"고 주장하면서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은 북한의 핵능력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제시했다.
비슷한 시기 존 케리 당시 국무장관도 즉각 취할 조치로 핵동결을 제시했다.
올해 4월 9일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도 ABC방송과 인터뷰에서 "우리가 바라는 바는, (북한이) 더 이상 실험하지 않음으로써 미사일 프로그램을 더 진전시키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도 6월 13일 조지 워싱턴 대학교 한국학연구소 등이 개최한 행사 기조연설을 통해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 확실한 현 시점에서 미국의 가장 야심적인 목표는 북한의 모든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을 동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가장 최근인 6월 20일 리처드 하스 미국외교협회 회장이 서울에서 열린 특강에서 "북한의 비핵화가 우리가 바라는 바이지만 비현실적인 목표라고 생각한다"며 "북한 핵 능력을 동결하거나 상한선을 그어 놓고 핵 사찰을 하는 것을 두고 외교적 협상이 가능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하스 회장은 지난해 대선 때 트럼프 캠프의 외교 자문을 맡았으며 미국외교협회는 미국의 대외정책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초당적 기구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미국 내 비중있는 인물들이 북핵 동결을 협상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북핵 동결이라는 협상 목표는 북한이 먼저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2015년 1월 9일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미국이 올해에 남조선과 그 주변에서 합동군사연습을 임시중지하는 것으로써 조선반도(한반도)의 긴장완화에 기여할 것을 제기하고 이 경우 우리도 미국이 우려하는 핵실험을 임시중지하는 화답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는 데 대해 밝혔다"고 보도했다.
즉, 북한이 2015년 초에 했던 제안에 대해 2년이 다 지나서야 미국 내에서 수용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반년이 지나 한국 정부도 수용의 뜻을 내비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정인 특보 발언이 논란이 되자 북한이 다시 자신의 제안을 확인하기도 했다.
계춘영 인도 주재 북한 대사가 현지 방송 인터뷰에서 "조건만 충족된다면 우리는 핵과 미사일 실험을 동결할 의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 측이 대규모 군사훈련을 (한반도 주변에서) 잠정 또는 영구적으로 중단한다면 우리도 일시 중단하고 한반도 문제를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대화에 나설 수 있을 겁니다"라고 하였다.
북한이 이 같은 '동결 대 동결' 제안을 한 것은 핵폐기는 불가하다는 병진노선에 저촉되지 않으면서도 협상 상대인 미국이 수긍할 만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렇게 보면 북미 사이에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대화가 시작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흐름도 모르고 국내에서 문정인식 해법을 가지고 정쟁이나 한다면 북미 대화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못하고 한반도 문제의 객체로 전락할 수 있어 우려된다.
문경환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