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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집회가 <10월항쟁>이라니…》//10월항쟁은 해방후에도 득세하던 친일파의 처단을 요구한 친일청산투쟁이였으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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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10-15 21:49 조회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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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8(2019)년 10월 16일 《우리 민족끼리》

 

《극우집회가 <10월항쟁>이라니…》

 

지난 11일 남조선언론 《민중의 소리》에 보수패당이 벌려놓은 반《정부》집회놀음을 《10월항쟁》이라고 하면서 참다운 정의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대중항쟁을 심히 모독한 《자유한국당》 의원 김진태를 강력히 규탄한 글이 실렸다.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 9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극우단체집회에 참석한 《자유한국당》 의원 김진태는 《이것은 10월항쟁》이라며 《4. 19와 6. 10보다 우리가 훨씬 더 많이 모였다.》고 말했다.

이날 모인 집회참가자의 실제규모를 떠나 《4. 19혁명》, 6월민주항쟁과 비교한것도 참을수 없지만 이날 집회를 《10월항쟁》이라 칭한것은 10월항쟁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발언이다.

실제 10월항쟁은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되여 한강이남 전역으로 번진 민중항쟁으로 당시 미군정과 미군정의 비호아래 살아남은 친일파들을 향해 민중들의 분노가 표출된 사건이였다.

당시 《9월총파업》이 활발히 진행되던 대구에서는 10월 1일 민중들이 대거 파업단에 가세했다. 수천명의 민중들은 대구시청에 몰려가 일제때와 달라진것이 없는 미군정의 식량배급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렸다. 그러던중 대치하고있던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2명이 사망하자 민중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다음날 대구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대규모시위는 항쟁으로 커졌고 민중들은 대구경찰서를 점거하고 친일경찰들을 공격했다. 당시 공무원들도 파업에 참여했으며 의사들도 《경찰은 시민들에게 발포하지 말라.》는 성명서를 내고 동참했다.

대구민중들의 항쟁에 미군정은 계엄령을 내리고 땅크 4대와 경찰력을 대거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경찰은 물론이고 미군, 심지어 우익청년단까지 합세한 야만적인 진압으로 경북지역에서만 수백명이 사망했고 7 000여명이 검거됐다.

무력진압으로 대구에서의 항쟁은 표면적으로 일단락됐으나 불씨는 전역으로 퍼졌다. 경북 대부분지역으로 번진 항쟁은 같은해 12월중순까지 한강이남 모든 지역으로 퍼져나갈 때까지 계속됐다.

항쟁에 참여한 민중들 상당수는 이후 들어선 리승만《정권》의 사면약속을 믿고 국민보도련맹에 이름을 올려 《보도련맹학살사건》의 희생자로 이어졌다.

10월항쟁은 해방후에도 득세하던 친일파의 처단을 요구한 친일청산투쟁이였으며 이를 비호하던 미군정을 비판한 반미투쟁이였다. 항쟁 당시 민중들이 웨친 《왜놈순사들이 어찌 우리를!》이라는 구호는 당시 민중들의 정서를 한마디로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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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0월항쟁72년행사위 결성 기자회견(2018.9.11.대구시청 앞)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 편집입력,카나다동포전국련 

10월항쟁은 그저 10월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니 그 자리에서 박수 한번 받아보자고 함부로 입에 올릴수 있는 력사가 아니다.

해방후 새로운 질서를 원했던 민중들의 소망이 표출된 사건이며 미군정과 폭력으로 많은 민중이 희생된 력사의 상처이다.

그럼에도 《친일정당》이라 비판받는 《자유한국당》의 의원이 성조기가 나붓기는 자리를 두고 《10월항쟁》이라 입에 담다니 희생자와 유가족이 들었다면 통탄할 일이다. 력사에 대한 무지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것이거나 항쟁희생자들을 욕보이려는 의도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자신이 속한 당의 《정치적고향》이라 부르는 대구의 가장 아픈 력사에 대해 정작 무지했다는것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10월항쟁에 무지한 김진태에게 지금이라도 근현대사서적을 읽어보기를 당부하고 싶다. 《국민의 대표》라는 사람이 력사에 무지하다는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아울러 부디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을 새겨 모르면 말을 아끼는 자세를 가지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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