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마 미제와 리승만, 다카키 마사오가 만들어 놓은 분단의 설움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375회 작성일 16-02-09 12:08

본문

출처 ; 자주시보

 

[설 특별 기고] 백년도 길지 않은 절절한 통일염원
 
<<의지와 신념의 화신 장기수 선생님>> 새해 축하드립니다.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icon_mail.gif  
 
기사입력: 2016/02/08 [11:20]  최종편집: ⓒ 자주시보
 
 

 <<의지와 신념의 화신 장기수 선생님>> 새해 축하드립니다.
새해 설날에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 회장님의 특별 기고문을 자주시보에 싣습니다.
이 글은 양심수후원회 소식지에 기고되었던 글 입니다.

 

● 출소 장기수를 찾아서


                          백 년도 길지 않는 절절한 통일염원
 

                                                       권오헌_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통일 보고 죽을 거야."

 

▲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이 2016년 1월 1일 우리 나이로 백 살을 사신 우리시대의 통일할머니이시고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이신 비전향 장기수 박정숙 선생님과 "자주통일을 위하여" 새해 축배를 하였다.     © 양심수후원회 제공


 2016년 1월 1일 우리 나이로 백 살을 사신 우리시대의 통일할머니이시고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이신 비전향 장기수 박정숙 선생님의 새해 덕담이셨습니다. 과연 통일 일꾼들에게 엄중하게 던지시는 조국사랑 정신의 실천적 노익장이셨습니다.

 언젠가부터 시력이 떨어지고 무릎관절에 허리통증 그리고 시린 이를 보철하는 등 나이 들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었지만, 어찌 선생님의 이 절절한 통일 염원 앞에 나이 타령을 감히 할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참으로 존경스럽고 감사합니다!
 강북구 번3동으로 박정숙 선생님께 새해 인사를 갔습니다. 노익장이라 했지만, 선생님께서 그 어떤 힘자랑을 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딱 20살 아래인 사람보다 눈은 더 밝으시고 옆 사람이 귓속말하는 것까지 알아들으시는 그 놀라운 청력에 백 살 나이가 그 무슨 문제인가. 통일운동에는 세월마저 잡아매 두시려는 철벽 의지! 참으로 ‘내 나이가 어때서’를 말씀하시는 그 정신력 때문이었습니다.

 한결같이 선생님 곁에서 지극정성을 다하고 있는 손녀보다 더 친손녀 같은 박윤경 회원이 부침개, 신선한 채소 등 갖가지 맛있는 반찬들을 챙겨와 상차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1월 1일) 강인옥 범민련 일꾼이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전화를 통해 ‘돼지갈비가 연해서 삼겹살보다 잘 잡수신다’며 선생님 댁 인근 슈퍼마켓에서 양념 절임 돼지갈비를 팔고 있다는 것까지 알려주었기에 가게에 들르고 ‘백세주’ 한 병을 더하여 15층 선생님 댁을 들어섰습니다.
 “선생님 제가 왔습니다!”
 “이게 누구야 권 선생 아니야!”
 선생님 손은 따뜻했습니다. 군살 한 점 없이 가벼운 몸이지만 너무 해맑은 눈동자와 인자하신 웃음으로 방안은 말 그대로 화기애애했습니다. 굳이 세배해야겠다고 했지만, 굳이 받지 않겠다는 겨룸을 윤경 회원이 “세배는 ‘설’때 하고 오늘은 ‘새해 축배’를 하자”는 중재 하에 곧바로 푸짐한 밥상 앞에 함께 했습니다. 고기를 굽고 ‘백세주’를 땄습니다. 선생님의 ‘백 세’를 축하하고 선생님 평생 염원 ‘자주통일을 위하여’ 세 잔이 부딪혔습니다.
 그러나 노익장만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듯이 선생님께선 심한 기억력장애를 겪고 계셨습니다. 식사를 다 하기까지 스무 번도 넘게 ‘동생 어디 갔어?’라고 옥중동지로 만나 60년을 동고동락하셨던 지금은 먼 나라에 가신 김선분 선생님을 찾으셨습니다. ‘병원에 가셨어요!’ 줄기차게 묻고 계신 선생님께 참으로 ‘인내력’을 십분 발휘하는 윤경회원의 한결같은 대답이었습니다. 아직도 병원에 계신 것으로 알고 계시면서도 그러한 생각조차 곧 잊고 계시는 안타까움이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더욱 건강하시고 통일세상 보시면서 통일할머니로 오래오래 사시길 기원했습니다.


 지난해 그믐 오랜 옥고를 치르셨던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과 통일원로 50여 명에게 전화로 새해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 15명이 넘는 선생님들이 전화를 받지 않거나 수화기를 들었지만, 귀가 어두워 통화가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불굴의 의지로 폭압에 맞서 싸우셨던 역전의 통일애국 투사였지만 세월의 무게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 또한 안타까움이었습니다.

 그렇게 전화기를 들었으나 통화가 되지 않았던 정관호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김재선 8.15 산악회 총대장님이 함께 했습니다. 누구보다 독서량이 많고 그래서 풍부한 지식, 명쾌한 정세판단과 세계관을 가진 김재선 대장은 정관호 선생님의 장편소설 ‘남도 빨치산’ 전 6권을 아마도 가장 먼저 독파하고 그 많은 소설 속 주인공들까지 거의 외우고 있을 정도였었지요.

정관호 선생님께서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특히 ‘후원회 소식’을 열심히 보시는 선생님께서는 김재선 6.15 산악회 총대장을 금방 알아보셨습니다. 새해 첫날이 되면서 선생님은 92살이 되셨고 같은 나이이신 류기진 선생님께서 그 많은 산을, 정상을 밟는 것을 부러워하셨습니다. 산 이야기라면 정관호 선생님이야말로 ‘산사람’이셨지요. 장편소설 ‘남도 빨치산’의 가제목도 바로 ‘산사람’이었고 바로 선생님이 유격대 장본인이셨습니다.

 정관호 선생님은 지난해 8월 낙상하셔서 오랫동안 입원치료를 하셨고 그 후유증으로 아직 실내에서도 보조기구에 의지하여 거동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식사, 청소, 빨래 등 모든 살림살이를 혼자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가장 중요한 일과는 역시 독서와 집필이셨습니다. 앞서 말한 장편소설 말고도 ‘전남유격투쟁사’, ‘영원의 소리, 하늘의 소리’ 등 에세이집, ‘풀 친구, 나무 친구’ 등 여러 권의 시집, 최근에는 단편소설 ‘산울림’ ‘사모곡’(시집)과 ‘시선집’을 내시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함경남도 북천에서 태어나시어 평양 노어대학을 졸업하셨고 원산 교원대학 교원(교수)으로 계시다가 전쟁 시기 전남 강진에 오시어 교육사업을 하셨습니다. 9.28 이후 퇴로가 차단되어 곧바로 입산, 전남도당 유격활동을 하시면서 ‘전남노동신문’ 주필을 하셨으며 1954년 전남 백운산에서 체포되어 오랜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그리고 출소 후 감시와 통제를 받으면서도 옛날 그 피어린 전쟁터 구석구석을 답사하시면서 온몸을 다해 이룩하신 작품들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만약 다시 태어나도 조국이 외세에 신음하고 인민들이 고통받고 있다면 다시 빨치산이 되었을 겁니다. 역사가 묻거든요. ‘조국이 위태로울 때 너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더냐? 그 변혁기에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그 물음에 떳떳이 답할 수 있다는 자랑과 긍지가 제겐 남아 있습니다. 우리같이 고생하고 핍박당하는 일들은 다시는 없어야 해요. 무엇보다도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평화의 기본은 자주·자결입니다. 그것이 짓밟힌다면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죠. 반전평화가 가장 중요한 목적이지만 자주가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자주의 세상, 평화의 세상, 통일의 세상을 빨리 앞당겨 고향과 가족을 찾으시길 열심히 빌어봅니다.


 그런데 자주통일이란 평생 염원을 안고 부끄럼 없는 역사를 살아오셨던 많은 선생님이 지난 한 해 동안에도 여덟 분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선생님들 주소록을 보며 새해 인사를 드릴 때 자꾸 지워지는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송세용(84세, 4월 28일 별세) 김기찬(96세, 7월 8일 별세) 김선분(90세, 8월 4일 별세) 최동원(8월 16일 별세) 나경운(87세, 9월 26일 별세) 안신옥(86세, 10월 3일 별세) 민범식(95세, 10월 5일 별세) 이학돌(88세, 12월 14일 별세) 선생님이셨습니다. 이분들 가운데는 자주통일 염원 말고도 오랜 세월 인위적으로 갈라진 사무치게 기다리고 있는 가족과 신념의 고향으로 송환을 요구하고 있던 김기찬 선생님과 민범식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바로 2차 송환 희망 비전향 장기수들이셨습니다.

 다 알려졌듯이 2000년 9월 2일 63명이 비전향 장기수들이 신념의 고향으로 송환돼 가셨습니다. 이들 1차 송환 장기수들은 사회안전법 폐기로 청주감호소에서 풀려난(1989) 비전향 장기수들, 수십 년 감옥을 살면서도 정치적 신념과 양심을 지켜오던, 1999년에 특별사면으로 출소한 비전향 장기수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전향 장기수 송환 대상자는 1차 송환으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전쟁포로 출신을 포함한 33명이 새로 2001년 2월 6일 북녘 고향으로의 송환을 요구하고 나선 것입니다. 당연히 <<비전향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는 이분들의 정당한 요구를 받아 안아 송환운동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호주의론’(이른바 국군포로와 납북자와 교환하자는 주장) 등으로 진전이 안 되었고 특히 이명박 박근혜 정부 들어 반북대결정책으로 2차 송환은 아직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송환이 늦어지고 있는 동안 20명이 넘는 희망자가 세상을 떠나셨고 추가 희망자를 포함, 이제는 20여 명이 고향 가기만을 기다리며 노구와 오랜 옥고의 후유증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익산지역 요양소에서 투병하시던 유영쇠 선생님의 부고를 받고 이 글을 마치는 대로 익산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 왼쪽부터 강 담(함경남도 홍원군. 84세.), 양원진(전라남도 무안. 88세), 김련희(평양 출생), 필자, 김영식(강원도 이천, 마식령 인근. 84세), 박희성(평양북도 박천군. 82세) 2016년 1월 북녁이 보이는 강원도 바다에서.     © 양심수후원회 제공


 2016년 1월 2일 이른 아침, 강원도 동해안을 향한 승합차가 강변도로를 거쳐 경춘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이 차에 타신 분들은 새해 희망을 품고 북녘땅 먼 모습이라도 보고 싶어 하시는 2차 송환희망 비전향 장기수들이셨습니다. 낙성대 ‘만남의 집’ 공동체 성원이신 김영식, 박희성 선생님과 어떤 모임들에서도 늘 함께하시는 양원진, 강담 선생님이셨습니다.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님이 차량과 운전까지 맡아 주셨습니다.

 한겨울이었지만 춥지도 않고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습니다. 홍천을 지나 인제읍에 들어섰을 대 양원진 선생님께서 옛 옥중동지 이성희 박사(이른바 울릉도 간첩사건으로 옥고-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음)님께 전화하셨습니다. 사실은 필자도 지난해 12월 30일 전화로 새해 인사를 드렸는데 청력이 썩 좋지 않으시어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설악산 미시령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승합차는 진부령을 향해 오르막길을 달립니다. 56~7년 전 이 지역에서 군 복무를 했을 때 길이 좁아 일방통행만을 했던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이윽고 우리가 탄 차는 진부령을 넘어 속초-거진-화진포 쪽으로 검푸른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휴전선과 최동쪽 동해 통일전망대에 올랐습니다. 결코 식을 수 없는 통일 열망, 그 빛난 눈망울들이 멀리 보이는 북녘땅을 보고 계십니다. 마치 망부석처럼 그 숱한 역사의 잔해들을 지켜보는 듯했습니다.

 여기서 과정과 조건은 다르지만, 고향과 가족을 그리고 조국으로의 송환을 요구해 오고 있는 평양 주민 김련희씨 이야기를 보태야겠습니다. 장기수 선생님들의 연초 동해안 여정소식을 들은 김련희씨가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면서 이날 일행이 되었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이나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자유권규약)에는 누구든지 어떤 나라로부터도 떠날 수 있으며 또한 자국으로 돌아갈 권리’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에도 ‘거주이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비전향 장기수 송환은 6.15공동선언의 합의 정신이고, 본인의사에 반하여 억지로 남쪽으로 끌려온 김련희씨는 마땅히 본인들이 요구하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해야 합니다.

 비록 이날 먼 하늘가 금강산 자락과 해금강 물결만을 보고 왔지만 이분들이 하루속히 북녘고향으로 돌아가실 수 있기를 손 모아 기원합니다.


imgt_sns.gif트위터페이스북
 
광고

​ 

추천 0 비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2016-2017 KCNCC(Korean Canada National Coordinating Council). All rights reserved

E-mail : kcncc1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