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중항쟁의 넋을 기리며…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726회 작성일 17-05-17 13:15

본문

 

5.18 광주민중항쟁의 넋을 기리며…

 

3a7bb516de8eeed510366cd8ed692096_1495041098_054.jpg
​광주시민들을 짓밟고 있는 남한의 폭도군인들 (편집입력/재캐나다동포전국연합회) 

 

 

박한균 수습기자 icon_mail.gif  

 

기사입력: 2017/05/17 [20:08]  최종편집: ⓒ 자주시보

 

 

 

▲ 5월 16일 전남도청앞 광장에서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2만여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열고 대대적인 횃불행진을 벌였다.<사진-518기념재단>    

 

▲ 1980년 5월 29일 망월동에서 일제히 진행된 1백29구의 장례식(좌) 독일'슈피겔'지에 실린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든 아이 사진은 죽은자와 살아남은 자를 절묘하게 대비함으로써 광주의 아픔을 전세계인에게 전해준 5•18의 상징적인 사진중 하나이다.(우)<사진-518기념재단>    

 

https://www.youtube.com/watch?v=4iJ2acuwMhg

 

 

그 해, 서울의 봄은 길지 않았다.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암살되면서 민주화의 바람을 억누르던 유신체제는 사실상 종언을 고하게 된다. 마침내 찾아온 ‘서울의 봄’. 하지만 그해 봄은 길지 않았다. 국가 지휘권 부재를 틈타 전두환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학생운동의 지휘부와 김대중을 비롯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 구속하며 자유로의 희망을 총칼로 짓밟은 것이다.

 


신군부에 저항하며 들불처럼 일어난 광주

 

계엄확대와 함께 대학가에도 군이 진주하면서 광주에서도 수십 명의 대학생이 연행된다. 18일 아침 전남대학교 앞에는 학생들이 모여들며 계엄군과 학생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였고 이후 흩어진 학생들은 광주역 앞에서 재집결, 시외버스 공용터미널과 금남로 일대에서 '김대중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파출소에 투석하는 등 경찰과 대치, 충돌한다.

 

군과 경찰은 시위를 한 학생들을 골목까지 뒤쫓아가 무자비하게 곤봉으로 구타하고 차에 태워 어디론가 싣고 가버린다. 이는 학생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분노하게 만들어 광주의 시위는 강경진압에도 불구하고 더욱 확산되기에 이른다.

 


시민에게 총을 겨눈 전두환 신군부

 

시민까지 합세한 시위대는 강경진압에 맞서 군경과 대치하였고 20일 밤에는 시외전화가 두절되어 광주는 철저히 외부와 고립되게 된다. 
 
5월 21일, 석가탄신일로 공휴일이었던 이날, 광주시민들은 계엄군의 만행에 항의하기 위해 아침부터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전남도청 앞에서 군과 시민이 대치하는 가운데 오후 1시 계엄군은 시민을 향하여 사격을 강행했다. 군은 철저히 시민을 적으로 여긴 것이다.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민 중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이때부터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느꼈고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하기 시작하였다. 총격에도 굴하지 않은 시민들의 거센 저항에 밀린 계엄군은 퇴각하면서 무차별 발포하여 사상자를 내고 조선대 뒷산을 넘어 화순의 길목인 주남마을로 철수하며 광주에서 화순으로 이어지는 외곽도로를 차단하기에 이른다. 광주는 고립되었다.
 


고립된 채 항쟁을 이어나간 광주 시민  

 

계엄군의 철수로 광주는 정부의 힘이 미치지 않는 상태가 되었지만 결코 무질서하지 않았다. 시민군은 자발적인 지도부를 형성하여 무기조작법과 무기관리 등 무기소지자의 통제 아래 훈련을 실시하였고 일반차량을 통제하는 등 일사불란하게 항쟁을 준비해 나갔다.

 

5월 22일에는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고 어지러운 거리를 자발적으로 청소하는 등 질서를 회복해가기 시작하였다. 시장과 상점들도 문을 열고 전기, 수도 등은 관련 공무원의 지원으로 해결되었다. 많은 부상자들 때문에 혈액이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헌혈자가 잇따르는가 하면, 치안력이 없는 상황에서도 은행 같은 금융기관에 대한 사고는 한 건도 없었으며 금은방 등 일반 상점에도 별다른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시민군과 항쟁지도부의 식사도 시민들의 자발적인 도움으로 해결될 수 있었다. 항쟁에 임하는 시민들의 이런 질서정연함은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시민군은 오직 폭군 신군부로부터 광주를 지키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싸운 것이다.

 


죽을 각오로 끝까지 항쟁한 광주 시민

 

한편, 5월 18일에 발발한 일들은 언론보도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전남일원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5월 21일의 집단발포 소식은 전남도민을 분노케 했다. 이에 화순 나주 영암 강진 무안 해남 목포 등 전남 일원으로 민주화운동이 확산되었다. 
 
상황 수습을 위하여 신부, 목사, 변호사, 교수 등 20여명이 나선 『5·18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지만, 신군부가 장악한 계엄사의 무성의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무기회수 문제도 수습대책위원회의 의견 불일치로 결국 무기반납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는 새로운 항쟁지도부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마지막 요새, 도청을 향한 총소리

 

한편 강제진압의 뜻을 굳힌 계엄군은 결국 5월 26일 새벽, 탱크 등 중화기를 앞세우고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하자 수습대책위원들은 일명 '죽음의 행진'을 감행하여 무력진압을 저지 만류하였다.

 

저녁 7시 계엄군의 침공이 감지되는 가운데 학생지도부에서는 시민군에 참여하고 있던 고등학생이나 여성의 귀가를 종용하고, 27일 새벽 1시 30분을 전후로 조선대학교 뒷산에서 최종점검을 마친 뒤 군이  시내 주요지점을 향해 잠입, 침투하기 시작했다.

 

새벽 4시가 지나면서 도청표적은 탱크와 중무장 헬기, 자동화기와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시민군 말살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어 작전개시 1시간 30분 만에 도청진압이 완료되면서 광주 시민의 피로 얼룩진 열흘간의 5.18 민주화운동도 막을 내리게 된다.

 


끝나지 않은 항쟁의 역사

 

광주민중항쟁이 있은 지 2년 뒤인 1982년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서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총격에 희생되었던 윤상원, 그리고 그와 함께 들불 야학을 하다 연탄가스로 먼저 숨졌던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기리기 위해 백기완 선생의 시를 기초로 황석영과 대학가요제 출신 김종률 등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었다. 이 노래는 훗날 민주화운동의 상징곡이 되었으며 매해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불리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며 박근혜 정권이 탄핵으로 막을 내리기까지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는 이 노래가 금기시 되며 시민사회의 공분을 샀다. 더욱이 학살자 전두환은 수많은 꽃다운 이들의 가슴에 총질을 해댄 처벌은 커녕 자신의 자서전에서 자신이 광주항쟁의 희생자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국민들을 분노케 했다. 나아가 광주민중항쟁의 씨앗이었던 유신 독재자 박정희의 딸은 국정교과서를 추진하며 광주민중항쟁의 의미를 왜곡하려 하기도 했으니 지난 9년은 참으로 가혹하고 한탄스러운 시간이었다.

 


다시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

 

그러나 국민은 다시 역사를 만들었다. 기나긴 근현대사에 축적되어온 반민중 적폐 세력을 촛불 국민의 손으로 응징하고 비로소 다시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켰으며, 이윽고 문재인 정부는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 제창하는 것으로 선포한 것이다.

 

비단 노래의 문제이겠는가. 우리에게는 광주항쟁으로부터 배운 역사를 다시 잊지 않은 것이 가장 중요한 숙제일 것이다.

 

다시 봄, 5월이 왔다. 다시는 이 봄을 빼앗기지 않으리라.


그날 오후 광주의 어느 거리에서, 그날 밤 어두운 도청의 귀퉁이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이름 없이 쓰러져 간 넋들에게 이 노래를 바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 임을 위한 행진곡

 

추천 0 비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2016-2017 KCNCC(Korean Canada National Coordinating Council). All rights reserved

E-mail : kcncc1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