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수 이준원(李俊源) 선생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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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386회 작성일 17-08-09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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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수 이준원(李俊源) 선생 타계

 

 

 

김병길 자주시보 대표 icon_mail.gif  

 

기사입력: 2017/08/10 [02:32]  최종편집: ⓒ 자주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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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북 출신 장기수 이준원 선생     © 자주시보, 김병길 대표

 

지난 7일 오후 2시 30분 대구에서, 이북출신 장기수 이준원 선생이 노환으로 입원치료 중, 불행히도 향년 83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고인은 1935년 1월 16일 함경남도 함주군 하기천면 은봉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이낙선, 어머니는 김병녀이며, 8남매 중 장남이다. 어머니 김병녀는 일제 치하에서 반일지하운동을 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새나라 건설에 적극 참가한, 인근지역의 여성 활동가였다. 

 

  고인의 생애는 분단조국의 현대사와 더불어 판란만장하였다.  

 

  11살 때 해방을 맞이한 고인은, 함주상통중학교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도왔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 1월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서해방어부대에서 복무하였다. 1958년 군대에서 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성실하게 당생활을 하였으며, 지도적 위치에서 민청사업도 하다가, 1959년에 제대하였다. 

 

  제대 후 1963년, 인민군 특수정찰활동 중, 분계선 남쪽 노고산에서 민간인에게 적발되어, 이남 방첩대에 체포되었다. 

 

  이후 재판에서, 반공법 위반으로 1심 2심 사형 판결, 3심에서 15년으로 감형, 확정되었다. 서울구치소에서, 1965년 5월에 대전교도소로 이감되고, 1973년 말에 대구교도소 이감 복역하가가, 1979년 1월에 만기출소하였다.

 

  출소 후 대구시와 달성군으로 주거가 제한된 상태에서, 갱생보호소에 주거를 정하고, 교도소에서 익힌 목공노동으로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대구교도소 생활 때 후원을 해준 교회의 권사 소개로, 그 해 8월에 도봉순과 가정을 이루었다. 

 

  고인은, 그로부터 근 40년 대구에서 목공노동으로 살면서, 6.10항쟁 이후, 대구경북 양심수후원회, 민족자주평화통일 대구경북회의, 범민련 대경연합, ‘평화와 통일을 사랑하는 사람들’, 대구경북 진보연대 등에 몸을 담그고, 사회의 진보와 통일운동에 적극 참가하여 열성적으로 활동하였다.   

 

  고인은 원만하고 소탈한 성품에, 진실하고 성실하며 근면하고 검박한 생활, 그리고 통일에 대한 불타는 열정과 강인한 신념으로 하여, 만 사람의 신뢰와 사랑, 존경을 받았다. 

 

  고인은 20대에 떠나온 고향과 가족을 다시는 보지 못하고, 그렇게도 갈망하던 조국통일의 한을 남기고, 쓸쓸한 병실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장례는, 대구경북 양심수후원회 주관으로, 고인이 입원치료한 드림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렀으며, 8일 7시 30분에, 대구를 비롯하여 전국 각처에서 온 많은 조객들의 애도 속에 추도식이 엄수되었다. 

 

  고인에게,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한 공로를 평가하여 <민족통일열사>의 칭호를 수여되었다.  

 

  9일 8시에 발인하여, 대구 명복공원에서 화장, 12시 칠곡군 현대공원묘원 장기수합동묘소에 합장하였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도봉순 여사와, 아들 이종훈 내외, 그리고 손자 둘이 있다. 떠나올 때 북에 부모형제와 임신 중의 부인(강금녀)이 있었으나, 이후 소식을 모른다. (2017. 8. 9.)

(기사출처/자주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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