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만으로

 

유격대활동의 합법화가 실현되고 항일유격대가 정식 창건된 다음 우리 동무들속에서는 그 활동의 첫 시작을 어떻게 떼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론의되였다.

성시에 가서 열병행진을 하고 소사하에 다시 돌아온 우리는 농촌집 웃방에 대원들을 3~4명씩 분숙시킨 다음 그들을 며칠동안 휴식시키면서 유격대의 행동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토의를 하였다. 이 토의과정도 역시 카륜이나 명월구에서처럼 격렬한 론쟁을 동반하였다.

모여서 입씨름을 하는 광경을 보면 그야말로 개개명창이였다.

유격전에 대한 개념도 각이하였거니와 그 전술에 대한 주장이나 해석도 십인십색이였다. 지식정도와 생활경로, 소속단체가 서로 다른 100여명의 청년들이 모인 집단인것만큼 목소리도 여러가지일수밖에 없었다.

그 목소리들을 종합해보면 크게 세가지 부류로 나눌수 있다.

첫번째 부류의 주장은 소조론이였다. 소조론이란 중대요, 대대요, 련대요, 사단이요, 하는 판에 박힌 부대편성방법을 따르지 말고 간편하고 기동성이 높은 무장소조들을 많이 조직하여 끊임없는 소모전으로 적들을 타승하자는 주장이였다. 삼삼오오의 소조로 유격대력량을 세분하여 참모부의 유일적작전에 따라 수십수백의 소조가 도처에서 활동하게 되면 능히 일본제국주의자들을 굴복시킬수 있다는것이였다.

이 론리의 제창자들은 무장소조를 기본단위로 하는 유격전이 식민지민족해방투쟁의 새로운 형식을 하나 창조해내는 과정으로 될수도 있다고 하였다.

돈화와 연길에서 온 청년들가운데 특히 이 소조론을 주장하는 동무들이 많았다. 이 두 고장의 청년들은 리립삼의 좌경적인 모험주의로선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아온 사람들이였다. 그 여독이 아직도 그들의 사고방식에 남아있었다.

차광수는 이 무장소조론에 대하여 현대판프랑끼주의라고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차광수의 견해에 대해서는 나도 동감이였다.

일제의 군사력이 엄청나게 강하기때문에 대부대에 의한 전면적인 무장대결은 피하고 몇사람씩 패를 지어 돌아다니면서 라석주나 강우규처럼 적의 우두머리들에게 폭탄도 던지고 통치기관들에 방화도 하고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에게 철추도 내리자는것이 무장소조론의 본질이였다.

무장소조론은 유격전의 외피를 쓴 테로주의의 변종이였다.

이 주장대로만 한다면 우리는 사실상 대부대에 의한 유격전을 포기하는것으로 된다. 이것은 투쟁방법에서의 후퇴를 의미하는것이였다. 우리는 이런 후퇴를 용인할수 없었다.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을 전후한 시기 일본과 중국에서는 우리 나라 애국자들에 의하여 두가지의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중 하나는 도꾜 궁성 앵전문밖에서 일본천황이 탄 쌍두마차를 향해 폭발탄을 던진 리봉창렬사의 의거이며 다른 하나는 그해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렬사가 단행한 폭탄투척사건이다. 리봉창은 폭탄의 불명중으로 천황을 처단하려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윤봉길은 거사에 성공하여 상해주둔 일본사령관 시라가와대장과 무라이 상해총령사, 가와하시 거류민단장을 즉사시키고 주중공사, 제9사단장, 해군대장을 비롯하여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려고 홍구공원에 모여온 여러명의 두목급군정요인들에게 중상을 입힘으로써 내외에 큰 파문을 던지였다.

리봉창이 천황행렬에 폭탄을 던지고 체포된 다음날인 1932년 1월 9일 중국국민당기관지 《국민일보》는 특호활자로 《한인 리봉창 저격 일본천황 불행부중》이라는 글을 실었으며 그밖의 여러 신문들도 리봉창의 의거를 특종기사로 널리 소개하였다. 이 보도가 얼마나 큰 자극을 주었던지 현지의 일본군대와 경찰은 《국민일보》신문사를 습격하고 파괴하기까지 하였다. 불행(不幸)자를 쓴 신문사들은 모조리 페쇄되였다.

윤봉길의 의거에 대해서도 조중인민들은 다같이 격찬하였다. 홍구공원사건이 있은후 중국사회계의 명사들이 련이어 이 사건의 조직자이며 배후조종자인 김구에게 면회를 청하였다. 일본의 침략에 투항주의로 대처하고있던 중국국민당 반동정부의 우두머리들까지도 조선민족의 투철한 저항정신과 영웅성에 감동되여 재중조선인들에 대한 경제협력을 약속하였다.

리봉창과 윤봉길은 다같이 김구의 부하들이였으며 김구가 주관한 한인애국단의 성원들이였다. 한인애국단의 기본적인 항일투쟁방법은 테로였다.

리봉창, 윤봉길의 의거에 뒤이어 대련에서는 김구가 파견한 애국단원들이 관동군사령관 암살미수혐의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들은 국제련맹 릿든조사단이 봉천으로부터 대련에 도착할 때 일본군정요인들이 역으로 나오는 기회를 타서 관동군사령관과 만철총재, 신임외사부장을 암살하려고 하였다. 김구는 부하들을 파견하여 조선총독까지 처단하려고 하였다.

이등박문을 격살한 안중근이 민족적영웅으로 찬양되고 리봉창, 윤봉길의 의거로 국내는 물론 미주, 연해주, 만주 등지에 산재한 온 교포사회가 법석 끓고있던 시대적분위기를 타고 테로주의는 적개심에 불타는 조선의 많은 청년들을 현혹시키였다. 이런 시기에 무장소조론과 같은 주장이 대두하여 반일인민유격대의 활동방향을 결정하는 론의에까지 상정된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무장소조론의 제창자들은 조선과 일본, 중국각지에서 윤봉길의 거사와 같은 의거가 련속적으로 일어나게 되면 일제통치의 아성이 흔들리게 될것이라고 력설하였다.

다른 하나의 부류는 전면적인 무장공격에로 당장 넘어가야 한다는 주장이였다. 김일룡과 같은 사람들이 무장소조론에 흥미를 느끼고있었다면 박훈, 김철(김철희)과 같은 사람들은 즉시적인 무장대결론에 미련을 가지고있었다. 대도시에서 수천수만명의 정규군과 폭동군중이 와와 소리를 지르며 밀려다니는 광경만을 보아 온 박훈이 무장소조론을 시답지 않게 대하면서 전면적인 무장공격을 즉시에 개시해야 한다고 고집하는것은 어느 정도 리해할수 있는 일이였지만 남의 집에서 데릴사위로 있던 김철이 그 고분고분한 성미에 어울리지 않게 처음부터 판을 크게 벌려야 한다고 하면서 열변을 토할 때에는 참으로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면적무장공격에로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다 일정한 론거는 가지고있었다. 일본은 9.18사변으로 만주강점의 목적을 손쉽게 달성하고 상해를 비롯한 관내의 여러 요충지들을 점령하였다. 동3성에는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가 새로 태여나 기발을 걸었다, 다음 목표는 어디인가? 중국본토와 쏘련이다, 지금 일본군대가 정세의 추리를 관망하면서 공격속도를 늦추고있지만 무슨 트집을 또 하나 잡아서 중국을 들이 치고 쏘련을 공격하리라는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때문에 현재 조직된 무장부대들로 전면적인 군사작전을 개시하는것은 전쟁의 수렁창에 깊이 끌려들어가고있는 일제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것으로 될것이다, 우리 유격대가 적극적공격자세를 취하는것은 력사가 부르는 명령이다, 이것이 그들의 론거였다.

김일룡은 이 급진적인 주장에 대하여 《이불깃을 보고 발을 펴라.》는 속담으로 간단히 무시해버리였다. 사실 그것은 반일인민유격대의 준비정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모하고 주관적인 견해였다.

물론 우리가 카륜에서 제기한 무장투쟁로선은 일제와의 전면적무장대결을 예견한것이였다. 항일무장투쟁의 기본양상이 조직적이고 전면적인 무장대결로 되리라는것은 의심할바 없었다. 그러나 방금 첫걸음을 뗀데 불과한 유격대가 아무런 자체준비도 없이 처음부터 그런 길을 걷는다는것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다.

이외에 다른 부류의 견해가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적을 알고 자기도 알면 백전백승이요, 적도 자기도 다 모르면 백전백패한다는 리치를 내대는 신중론이였다.

신중론의 제창자들은 말하였다. 우리의 적은 강적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수에 있어서나 질에 있어서 갓 태여난 어린 싹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앞으로 막강해지리라는것은 의심할바 없지만 지금은 은밀히 활동하면서 량적으로나 질적으로 힘을 꾸준히 키워야 한다, 우리의 투쟁이 장기성을 띠는것만큼 근기있게 력량을 축적했다가 적이 약해지는 기회를 노려 일격에 쳐서 꺼꾸러뜨려야 한다고.

이 견해는 매우 미온적이고 시간을 가늠할수 없는 막연한것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우리는 이런 론의를 소사하에서 처음 한것이 아니였다. 고유수에서 혁명군을 조직할 때에도 그와 류사한 론의를 한적이 있었고 카륜에서 무장투쟁로선을 확정하고 명월구회의에서 조직적인 유격전쟁을 전개할데 대한 결정을 채택할 때에도 그와 비슷한 론의를 한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미전부터 우리와 조직생활을 같이해온 동무들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의도를 원만히 파악할수 없었다.

대오안에서 중요한 로선상문제를 놓고 이 처럼 각이한 목소리가 울려나온것은 반일인민유격대의 청소한 면모를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실례라고 할수 있다. 우리 부대는 직업과 지식정도, 출신지역과 출신조직이 각이한 사람들로 구성되여있었다. 《동아일보》,《조선일보》와 같은 출판물들과 중학강의록같은것을 정기적으로 받아보면서 꾸준히 눈을 틔워온 청년들이 있는가 하면 장광자의 《소년방랑자》나 최서해의 《탈출기》와 같은 소설작품을 읽고 사회개조의 푸른 꿈을 키워오다가 유격대에 입대한 청년들도 있었으며 학교물은 조금도 먹어보지 못했지만 적위대나 소년선봉대와 같은 혁명조직들에서 몇해동안 정치적수련을 쌓아오다가 총을 한자루씩 얻어가지고 무장대오에 들어선 청년들도 있었다. 그러므로 사물현상을 리해하는데서 자연히 수준상 층하가 생기기마련이였다.

이런 실태는 우리로 하여금 부대내에서 사상의 유일성, 행동의 일치성, 관습의 통일성을 보장하기 위한 조직정치사업에 특별한 관심을 돌리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 첫 공정으로 유격대의 전술적원칙과 중요한 로선상문제에 대한 리해에서 일치성을 보장하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것과 이 공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갓 태여난 반일인민유격대가 첫 걸음에서부터 조난의 위기에 처할수 있다는것을 인정하였다.

나는 차광수와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며 우리의 전술적의도를 잘 리해하지 못하는 동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장소조론은 안중근의 전철을 밟겠다는 사상이다. 테로로써 일제를 굴복시키겠다는것은 망상이다. 이등박문은 죽었지만 일본의 통치는 그대로 살아서 오히려 〈만주국〉의 조작까지 보고 지금은 중국본토에까지 촉수를 뻗치고있지 않는가. 경우에 따라서 반일인민유격대가 소조활동을 할 때도 있겠지만 소조가 기본적인 전투단위로 되여서는 안된다.》

《전면적무장공격으로 즉시에 이행하자는 주장도 비현실적이다. 100명 남짓한 부대를 가지고 수십수백만을 헤아리는 일본의 대군과 정면으로 맞붙어싸우겠다는것은 언어도단이다. 100명의 돌격전으로 수십만대군을 누를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경솔한 판단이겠는가. 동무들, 제발 적을 과소평가하지 말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당분간은 중대를 기본단위로 하여 유격전을 벌리자. 소조단위로 활동해가지고서는 큰 일을 치르지 못한다. 앞으로 부대가 커지면 더 큰 단위로 활동할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중대단위로 움직이는것이 가장 리상적이다. 처음부터 대부대를 무을형편이 못된다는것이야 동무들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항일전쟁은 몇번의 전투로 끝나는 단기전이 될수 없다. 그러므로 적은 력량으로 시작을 뗀 다음 전쟁과정에 무력을 끊임없이 축적하고 확대하였다가 때가 되면 전인민적무장봉기와 배합된 결전으로써 최후승리를 달성해야 한다. 우리는 경편한 무장을 갖추고 령활하게 기동하면서 집중된 적을 분산시키고 분산된 적은 각개격파하며 큰 적은 피하고 작은 적은 먹어치우는 방법으로 시종일관 대방에 대한 전략전술적우세를 보장하며 부단한 소모전으로 일제를 타승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유격전이며 여기에 바로 유격전의 묘미가 있다. 싸움은 하지 않고 력량만 살금살금 축적하면서 때를 기다렸다가 일격에 적을 때려부시자고 주장하는 신중론자동무들, 투쟁과 희생이 없이 그리고 류혈이 없이 때가 저절로 온다고 생각하는가. 그 누구도 우리에게 독립할 기회를 선사하지 않는다는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 기회는 우리가 투쟁으로써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나는 이런 말로써 대원들에게 우리의 의도를 납득시키였다.

물론 모든 대원들이 즉석에서 내 말을 다 리해한것은 아니였다. 개중에는 자기 주장을 철회하지 않고 완강하게 고집하는 청년들도 있었다.

나는 실천투쟁만이 십인십색으로 벌어지는 우리의 론쟁에 아퀴를 짓고 진리가 어느쪽에 있는가를 판정할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유격대의 활동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연구에 시간을 아낌없이 바치였다.

항일전쟁의 길에 나선 우리 부대앞에는 그 당시 아래와 같은 과업들이 제기되고있었다. 첫째로, 반일인민유격대를 실천투쟁속에서 단련시켜야 하였다. 둘째로, 부대를 질량적으로 급속히 확대강화해야 하였다. 셋째로, 혁명군대가 의거할 대중적지반을 튼튼히 축성하고 유격대의 주위에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을 묶어세워야 하였다.

우리는 이상의 과업을 해결하기 위한 돌파구를 남만원정에서 찾고 그것을 1932년 한해동안의 주되는 전략으로 설정하였다.

우리가 안도에서 조직한 무장부대는 다른 현이나 구에서 조직한 무장부대들과는 다른 특이한 점을 가지고있었다. 다른 현의 유격대가 해당 현의 출신들로 조직되였다면 안도 유격대는 동만, 남만의 여러 현에서 선발된 전위분자들과 국내에서 들어온 선각자들로 구성되여있었다. 다른 지방의 유격대가 자기 지방에 정착하여 활동하는것을 원칙으로 삼았다면 우리 부대는 판도를 한두고장에 국한시키지 않고 백두산지구와 압록강, 두만강연안의 전반적지역에서 활동하는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안도는 지역적으로 볼 때 유격전에 매우 유리한 고장이였지만 우리는 거기에만 머물러있을수 없었다. 방금 껍질을 터치고 태여난 우리 유격대는 광활한 대지에 나가 비바람을 맞으면서 줄기와 가지를 자래우고 인민들속에 뿌리를 내려야 하였다. 성급하게 투쟁일면에만 치우치는것도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자기 보존만을 생각하면서 한자리에 앉아 어물어물 시간을 보내는것도 용납할수 없었다.

우리가 반일인민유격대의 첫 출발을 원정으로 선택한 하나의 중요한 리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남만원정의 주되는 당면목적은 압록강연안에서 활동하는 독립군부대들과의 련계를 맺는것이였다. 남만의 통화지방에는 량세봉사령이 지휘하는 독립군부대가 주둔하고있었는데 우리는 그들과 공동전선을 맺으려고 하였다.

량세봉의 관할하에 있는 독립군력량이 수백명이나 되였다. 그 부대를 조선혁명군이라고도 하였다.

안도에서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던 당시는 량세봉이 당취오의 자위군과 합작하여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성과적으로 타승하고있던 시기였다. 그 전과보도가 소사하골짜기에까지 날아와 우리를 기쁘게 해주었다.

박훈은 량세봉이 반공이 골수에까지 사무친 국민부계통의 민족주의자인데 공산주의자들과의 합작을 달가와 하겠는가고 하면서 머리를 기웃거리였지만 나는 중국의 구국군과도 공동전선을 맺었는데 반일이라는 공동의 경륜을 두고 한 피줄을 가진 사람들끼리야 손을 잡지 못할 리유가 무엇인가고 하면서 독립군부대와의 통일전선을 어떻게 하나 성사시켜야 한다고 말하였다.

내가 량세봉과의 합작이 성공할 여지가 있다고 본것은 그가 우리 아버지와 깊은 친교관계를 맺어온 사람으로서 나를 몹시 사랑해주었다는 지난날의 정의와 인맥관계를 중시한데도 있었다. 김시우와 량세봉이 화전에서 우리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고 사진까지 찍었다는 말을 나는 벌써 어린시절에 들었다. 량사령과 우리 아버지사이의 친분이 이만저만 두텁지 않았다. 그런 관계가 아니라면 그가 나를 위해 화성의숙에 보내는 소개신도 써주지 않았을것이며 길림에 나타날 때마다 육문중학교에 찾아와 내 손에 돈도 쥐여주지 않았을것이다. 학비난때문에 남들이 다 사먹는 호떡조차 입에 넣어보지 못하고 푼전을 아껴가던 그 시절에 그가 준 돈을 얼마나 요긴하게 썼는지 모른다.

왕청문사건이 있은후 국민부일반에 대한 환멸로 하여 량세봉과의 관계도 자연히 소원해졌지만 나는 그에 대한 고마운 정을 마음속에서 조금도 지우지 않고있었다.

유격대를 창건해놓고도 그 출로를 찾지 못해 안타깝게 모대길 때 량세봉을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맨 처음으로 떠오른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통일전선도 통일전선이지만 여러해동안의 실전경험을 가지고있는 그에게서 필요한 조언도 듣고 고무도 받고싶은 욕망이 그만 못지 않게 간절하였다.

총알맛은 한번도 보지 못하고 출정의 기쁨에 들떠있던 우리들에 비하면 량세봉사령은 백전로장이라고 할수 있었다. 우리가 민족운동자들앞에서 독립군의 방식대로 싸우지 않겠다는 결의를 여러차례 표명하였지만 그것은 인민의 힘에 의거하지 않는 나쁜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것이지 그들의 군사경험이나 기술까지도 무시해버리겠다는 의미가 아니였다.

왕청문에서 국민부에 의한 백색테로를 체험할 때 다시는 독립군령감들과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피눈물을 머금고 결심하였지만 민족해방의 공동성업이라는 경륜을 앞에 두고 우리는 과거의 허물을 들추지 않기로 하였다. 과거를 계산하게 되면 합작을 이룩할수 없었다.

남만에는 량세봉부대외에도 리홍광, 리동광과 같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지도하는 항일무장부대들이 있었다. 리홍광이 1932년 5월에 조직한 유격대를 반석공농의용군이라고 하였다. 이 부대는 후날 중국공농홍군 제32군 남만유격대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으로 개편되였다.

리홍광이 유명한 인물로 된것은 그가 뛰여난 지략과 령군술을 가지고 부대를 능숙하게 지휘한데도 있지만 관동군신문, 만주국신문과 같은 적의 출판물들이 그를 《녀장군》이라고 오보한데도 있었다.

리홍광이 《녀장군》으로 불리워지게 된데는 만사람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희극적인 사연이 있었다. 동흥습격전투를 끝내고 근거지로 돌아온후 리홍광은 자기의 휘하에 있던 한 녀성유격대원을 시켜 포로들을 심문하게 하였다. 그 녀대원은 신문에 앞서 《나는 리홍광이다.》하고 자기를 소개한 다음 포로들에게 경찰의 병력배치와 《토벌》계획을 진술할것을 요구하였다.

그 포로들이 돌아가서 《리홍광은 20살쯤 난 미인이더라.》는 소문을 퍼뜨려놓았다. 이렇게 되여 일본군인들속에서는 리홍광이 《녀장군》이라는 말이 떠돌기 시작하였다.

리홍광이 무장투쟁을 통하여 군사가로서의 기지와 담력을 남김없이 발휘한 사람이라면 리동광은 당건설과 대중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데서 특출한 솜씨를 보여준 유능한 정치일군이였다. 그의 이름은 벌써 1920년대 후반기부터 동만지방에 널리 알려져있었다.

나에게 리동광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김준, 서철, 송무선이였다. 리동광은 룡정에서 동흥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벌써 학생운동의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룡정에서 리동광이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였다가 감옥에서 탈출하였다는 소식이 길림에까지 날아왔다.

나는 1930년 여름에 할빈에서 서철동무를 만난 일이 있는데 그가 지나가는 말로 얼핏 리동광이 나를 알고있더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안창호선생이 길림에 와서 강연을 할 때 리동광이 나를 보았고 그후에는 오리하자에서 반석지구농민대표회의를 할 때 나를 본적이 있다고 하더라는것이였다. 그래서 나는 서철에게 리동광을 만나면 우리의 투쟁전략을 전하라는것과 언제인가는 서로 만나 인사도 나누고 같은 전호에서 손잡고 싸우게 될것이라는 나의 말도 전하도록 하였다.

후에는 리동광이 남만특위서기, 동남만성위 조직부장을 력임하였지만 우리가 남만원정을 준비하던 당시는 반석현에서 구위서기로 활동하고있었다.

동만과 마찬가지로 남만지방에서도 조선공산주의자들은 항일무장력량의 골간을 이루고있었다.

우리는 남만에 나가면 그들과도 련계를 가지려고하였다. 유년기에 있는 부대들이 서로 만나 경험도 나누고 투쟁대책을 공동으로 모색하는것은 반일인민유격대의 발전을 위해서 매우 유익한 일이라고 나는 간주하였다. 실지로 우리는 항일무장투쟁의 전행정에서 남만지방의 유격부대들과 긴밀한 련계를 가지고 활동하였다. 그런 과정에 나는 리홍광, 리동광, 양정우와 뗄래야 뗄수 없는 인연을 맺었다.

류하, 흥경, 반석을 비롯한 남만일대는 우리의 조직이 많이 들어가있었다. 우리는 중부 만주일대에서 활동할 때 이 지역들에 공청과 반제청년동맹의 우수한 일군들을 많이 파견하여 조직공작을 시키였다. 최창걸과 김원우도 거기에 보냈다. 그런데 그들의 노력에 의하여 태여난 조직들이 9.18사변후 혹심하게 파괴되였다.

우리가 남만에 나가면 이런 조직들을 복구하고 위축된 혁명가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주는데서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수 있었다.

어떤 력사가들은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된 다음 우리의 모든 활동이 아무런 장애와 곡절이 없이 일사천리로 순조롭게 진행된것처럼 서술하고있는데 혁명이란 그렇게 단순한것이 아니다.

방금 창건된 유격대의 첫 로정을 남만원정으로 잡고 그것을 실천에 옳기기까지에는 실로 많은 심리적고충과 곡절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우리는 1932년 5월에 구당본부가 자리잡고있는 김정룡의 집에서 동만의 각 현들에서 활동하는 당과 공청의 지도핵심들이 참가하는 회의를 열고 남만원정문제와 근거지창설문제를 토의하였다. 우리가 제기한 남만원정안은 회의참가자들의 일치한 지지찬동을 받았다. 부대안에서 두세갈래로 갈라져 격렬한 론쟁을 벌리던 청년들도 이 원정방침을 흔연히 받아들이였다.

우리가 원정준비에 열을 올리던 어느날 부대참모장으로 임명된 차광수가 문득 심각한 얼굴로 내앞에 나타나 이런 말을 하였다.

《대장동무, 원정을 갈바엔 며칠안으로 이 소사하를 빨리 뜨는것이 어떻겠소? 근처에 신작로가 있어 적수송대가 자꾸 지나다니는것도 재미 없구. 식량사정두 매우 곤난한 형편이요. 농가는 40호정도밖에 안되는데 100명이 넘는 식솔이 모여서 먹어대니 소사하가 아무리 인심후한 동네라고 한들 어떻게 견디여내겠소.》

봄부터 기근이 들어 춘황폭동을 일으켰던 실정이기때문에 식량사정에 대한 하소연은 그의 설명이상으로 나를 충분히 설득시키였다.

그러나 적수송대의 래왕이 잦기때문에 빨리 소사하를 떠나야 한다는 문제설정에는 동의할수 없었다.

나는 안도땅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리자는 차광수의 제의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참모장동무, 기왕 우리가 총을 들고 일어난 이상 한번 싸워보는것이 어떻소?》

《전투를 하자는거요?》

《그렇소, 부대를 무었으니 이제는 싸움을 시작해야지. 적이 코앞에서 왔다갔다 하는데 팔짱을 지르고 구경만 하구 있을 멋이야 없지 않소. 떠날 때는 떠나더라도 안도땅에서 한번 총소리를 내봅시다. 전투가 없이야 대원들을 단련시킨다고 말할수 없지. 잘만 하면 원정에 필요한 물자들도 해결할수 있을것 같소.》

차광수는 그 제의에 쾌히 동의하였다. 그날로 그는 박훈을 데리고 신작로에 나가 지형정찰을 해왔다. 매복전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한 정찰이였다. 그들은 소영자령에서 길목을 지키고있다가 지나가는 수송대를 들이치자는 안을 제기하였다. 그들이 내놓은 안은 나의 구상과 일치하였다.    나는 유격대의 전투형식중에서 가장 적합하고 보편적인 형식을 매복전이라고 간주하고있었다.

소영자령은 안도에서 명월구로 넘어가는 중간지점에 있었다. 대전자에서 대사하로 빠지는 지름길인데 소사하에서는 직선거리로 약 40리 남짓하였다. 산세가 험하지는 않지만 골짜기를 따라 우마차길이 오불꼬불 나있어 매복전투를 하기에는 아주 적당한 고장이였다. 적들은 이 도로를 리용하여 안도지구에 투입된 병력들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보급하고있었다.

때마침 무기와 후방물자를 실은 위만군의 마차수송대가 명월구에서 안도방향으로 떠났다는 지방조직의 통보가 우리에게 전달되였다. 나는 남만에 가기로 예정되여있는 대원들을 데리고 민속한 야간행군으로 소영자령에 도착한 다음 그들을 길목 량쪽에 매복시키였다.

야간에 매복전을 하는것은 원래 합리적인 전법이라고 말할수 없다. 적아를 잘 구별할수 없는 야간에는 매복전보다도 습격전을 하는것이 더 능률적이였다. 항일전쟁의 전기간을 거쳐 우리가 밤중에 매복전을 한 실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초행길에 방금 오른 우리로서는 그때 이런 리치를 타산할수 없었다. 다행히도 보름달이 환히 밝아서 아군끼리 혼전을 벌리는것과 같은 불상사는 피할수 있었다.

수송대는 밤이 깊어갈 무렵에야 소영자령에 나타났다. 100메터 전방에 매복한 제1진의 대원들이 적이 출현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적의 수송대는 모두 12대의 말파리로 편성되여있었다.

나는 자기 심장의 박동을 느낄수 있으리만치 몹시 긴장되고 흥분되였다. 처음으로 다닥치는 일이란 무엇이나 큰 충격과 불안과 위구를 자아낸다는것을 나는 그때 절실히 체험하였다. 옆에 엎드린 박훈을 보니 그도 어지간히 긴장되여있었다.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초연맛까지 본 그가 이런 형편이니 다른 대원들의 경우는 능히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첫번째 매복조는 마차행렬을 그대로 통과시키였다. 그 행렬이 두번째 매복조앞으로 한절반 들어섰을 때 나는 바위우에 올라서면서 권총을 발사하였다. 골짜기가 깨져나갈듯이 총소리가 울리고 함성이 터졌다.

우리는 팔에 흰 수건을 감아서 적아를 쉽게 구별하였지만 급습을 당한 수송대원들은 적아를 가려보지 못하고 눈먼총질을 하였다. 10여명의 호송병들이 마차에 의지하여 발악적인 응전을 하였다. 시간을 더 끌면 정황이 우리에게 불리해질수 있었다.

우리는 10분쯤 사격을 계속하다가 돌격에로 이행하여 전투를 단숨에 결속지었다. 적들은 1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투항하였다. 포로된 인원수도 사상자만큼 되였다. 전부가 위만군병사들이였는데 그중 하나가 일본하사관이였다.

나는 투항한 적들앞에서 짤막한 반일연설을 하였다.

그날밤 우리는 10대의 마차에 전리품을 싣고 무주(목조)툰으로 돌아왔다. 보총 17정과 권총 1정, 그밖에 100명이 한달가량 먹을수 있는 많은 량의 밀가루와 천, 군화… 첫 전리품으로서는 대단히 푸짐한 량이였다.

밤 12시가 넘어 우등불을 피워놓고 마당에 빙 둘러앉아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국을 먹었다. 첫 전투의 승리를 축하하는 소박한 연회였다.

나는 수제비국을 먹으면서도 후둑후둑 뛰는 심장의 고동을 가라앉힐수 없었다. 음식맛도 좋았지만 기분상태는 그보다 더 좋았다. 나는 그날밤에 체험했던 첫 전승의 희열과 가슴이 터져나갈것 같던 흥분을 6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생생히 간직하고있다.

근시경밑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우등불을 들여다보고있던 차광수는 갑자기 내 손을 덥석 틀어잡고 목멘소리로 말했다.

《이것 보, 성주! 겪어보니 별게 아니구만.》

이것이 첫 전투에 대한 참모장의 소감이였다.

나의 소감도 한마디로 집약하면 그런것이였다. 싸움이란 별게 아니다, 총이 있고 담만 있으면 누구나 할수 있는것이다, 적은 결코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온것처럼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다, 보라, 그들이 우리앞에 손을 들고 투항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신심을 가지고 더 큰 싸움을 준비하자, 우리는 이길수 있다, 우리는 승리할수 있다 하는것이 나의 심정이였다.

《이런 때에 김혁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김혁이만 있으면 벌써 즉흥시가 쏟아져나오는건데. 사람두 그렇게 빨리 가다니. 김혁이, 신한이, 리갑이, 제우, 공영이,… 모두 어디에 가고 없단 말인가!》

차광수는 넉두리라도 하듯 혼자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그는 반일인민유격대의 탄생을 보지 못하고 우리의 대오에서 먼저 떠나간 동지들을 생각하고있었던것이다.

나도 역시 한목숨을 다바쳐 반일인민유격대의 초석을 쌓다가 희생된 동지들을 생각하였다. 이날을 보지 못하고 돌아간 전우들의 얼굴이 삼삼히 떠올라 애달픈 심회를 달래일수 없었다. 그들이 모두 살아있다면 우리의 대오는 얼마나 강하겠는가.

차광수는 안경을 벗어들고 손세를 써가며 우등불앞에서 연설을 하였다.

《동무들! 우리는 첫 걸음을 떼였소. 우리는 첫 승리를 쟁취하였소. 누구들이 하였는가. 바로 여기에 앉아있는 우리들이요.》

그는 두 팔을 벌려 대원들을 한아름으로 안아올리는 시늉을 하였다.

《총을 들었으면 그 총은 발사되여야 하고 총이 발사되였으면 승리해야 하오. 안그렇소? 오늘 저녁에 우리는 마차수송대를 하나 소멸하였소. 이것은 하나의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소. 그러나 이것은 우리 위업의 시작이요. 자그마한 내물이 심산유곡을 떠나 망망대해를 향해 첫 흐름을 시작했단 말이요.》

나는 차광수가 이렇게 흥분한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날밤 그는 참으로 훌륭한 연설을 하였다. 내가 지금 기억을 더듬어가며 적어내려가는 이 글의 기록보다도 그의 연설은 훨씬 더 생동하고 호소적이였다. 그 연설을 여기에 그대로 재생시키지 못하는것이 유감스럽다.

《동무들, 싸우니까 얼마나 좋은가. 총이 생기고 식량이 생기고 피복과 신발이 생기고… 나는 오늘저녁에 위대하고 심오한 변증법을 배웠소. 이제 우리는 로획한 총을 나누어가집시다. 그래서 그 총으로 또 새 적을 쏴눕힙시다. 그러면 더 많은 총이 생길것이고 식량이 생길것이요. 기관총과 대포도 생길것이요. 로획한 량식으로 미대를 채웁시다. 그것을 먹으면서 기운차게 행군해갑시다. 일제가 완전히 소멸되는 그날까지 우리는 오늘처럼 무기와 식량을 그들에게서 받아냅시다. 이것이 우리의 생존방식이고 투쟁방식이 아니겠소.》

그가 연설을 끝내자 나는 맨 선참으로 박수를 쳐주었다. 온 장내가 열렬한 박수갈채로써 그의 연설에 대답하였다.

그다음 누구인가 일어나서 노래를 불렀다. 조덕화였던지, 박훈이였던지 기억이 삭막하지만 아주 감흥이 넘치는 노래였다.

우리는 이렇게 신심에 넘쳐 첫 걸음을 내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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