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인민의 품

 

3중으로 된 적의 보초소들을 성공적으로 통과한 우리가 그 운명적인 밤에 선택한 숙영지는 웃설미가 없고 벽체만 남아있는 다왜즈골안의 불탄 집터자리였다. 그 집터자리에서 전우들은 하루밤과 옹근 하루낮을 내 간병을 위해 바치였다. 간병이라고 해야 특별한것은 없었다. 그저 모닥불을 피우고 여럿이 그 주위에 빙 둘러앉아 순번을 정해놓고 엇바꿔가며 나의 손발을 주물러주는것이였다.

 16명중 일부는 만주국에 호적등록을 하지 않고 산다는 조선사람들의 집을 찾으려고 다음날 아침부터 하루종일 산발을 헤매였다. 그러나 일본군경들과 만주국관헌들의 눈을 피해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은신처를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들은 한밤중에야 잣나무, 봇나무, 분비나무들이 울창한 로야령 산중턱의 태고연한 수림속에서 귀틀집을 한채 발견하였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민들속에 다왜즈의 외딴집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조택주로인네 집이였다. 회상실기 《부디 만년장수하시라!》를 쓴 최일화어머니는 조택주로인의 맏며느리이다.

 산중턱 밀림속에는 자그마한 물도랑을 사이에 두고 크기와 외형이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단간귀틀집이 두채 있었다. 도랑북쪽 산자락밑의 귀틀집에서는 조로인부처가 맏아들 조욱내외와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 아홉식구가 살고있었으며 도랑남쪽 귀틀집에서는 조로인의 둘째아들 조경이네 다섯식구가 거처하고있었다. 추녀가 너무 낮아서 귀틀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땅굴막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림직한 집들이였다. 두 집 지붕에는 흙을 두툼하게 씌우고 잔솔나무들을 여러그루 심었는데 이것은 집의 존재자체를 비밀에 붙여두려는 일종의 위장술이였다. 우리 정찰조가 제때에 집을 찾아내지 못하고 산중에서 고생한것은 위장때문이였다.

 로야령을 오가는 길손들은 다왜즈의 이름 모를 산중턱에 자기네가 살고있다는 자체를 세상에 알리고싶어하지 않는 특이한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의 거처가 있다는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있었다. 이 두 집의 주소를 아는것은 다만 동만과 북만사이를 오가면서 련락임무를 수행한 세사람뿐이라고 한다.

 우리 정찰조성원들이 찾아온 사유를 설명하자 조택주로인은 아들 조욱과 손자 조영선의 등을 떠밀며 김일성대장님께서 병환에 계신다는데 하늘이 무너지면 무너졌지 그분께서 촉한때문에 고생하시다니 될말이냐, 어서 가서 유격대원들을 모셔오라고 불같은 령을 내리였다. 며느리 최일화더러는 물도 끓이고 미음도 쑤라고 하였다.

 조택주로인의 집에서부터 우리가 머물고있는곳까지는 지름길로 20리가 넘었다. 조욱과 조영선이 정찰조성원들과 함께 우리의 숙영지에 당도하였을 때 원정대원들은 모닥불주위에 둘러앉아 혼수상태에 빠진 나를 위해 밥통에 물을 끓이고있었다. 그들은 의식을 잃은 나를 업고 조택주로인네 집으로 향하였다. 왈룡이는 후위에서 솔가지로 발자국을 메꾸었다.

 소시적부터 산전수전을 다 겪어왔다는 조택주로인은 한흥권중대장에게 몇가지 질문을 하고나서 김대장의 병은 과로와 영양실조, 지나친 랭으로부터 생긴 촉한이라는 중병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까지도 좌지우지한다는것과 그러나 몸을 덥게 하고 땀을 많이 내면 사흘안팎에 나을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병을 치료하는데서는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대장이 지금까지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인사불성으로 계시는것은 몸에 혈맥이 잘 통하지 않는데 까닭이 있소다. 혈맥만 잘 통하면 알도리가 있으니 걱정들 말구 우리 둘째네 집에 가서 푹 쉬오다.》

 로인이 며느리와 함께 내 손발과 팔다리를 주무르며 한흥권중대장을 향해 한 말이였다. 며칠째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나를 가운데 두고 우거지상이 되여 앉아있던 원정대원들은 그 한마디말에 힘을 얻었다.

 원정대원들은 로인의 말대로 조영선을 앞세우고 도랑건너편에 있는 조경이네 집으로 갔다. 내곁에는 조택주일가 사람들과 호위병 두명만 남았다.

 조택주로인은 끓는 물에 꿀을 반사발가량 타서 나에게 주고 머리맡에 앉아 이마에 손을 대보면서 이따금씩 내 병세를 가늠해보았다. 조금후에는 꿀물에 탄 미음을 권하였다. 그날밤 로인과 함께 병시중을 들던 호위병들의 말에 의하면 내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한것도 그 미음을 먹은 다음이며 그때부터 내가 꿈인지 생시인지 알수 없는 혼수상태에서 깨여났다고 한다. 화창한 봄대기마냥 머리속이 쩡 열리고 몸과 마음은 솜털같이 우로, 우로만 가볍게 떠가는듯싶었다. 내 주위에는 개가죽을 깐 발구도 민망스러울 정도로 지루하게 이어지던 수림속의 설경도 눈보라도 추위도 귀전을 때리던 추격의 총소리도 없었다. 머리를 아프게 탕치던 동통과 오한, 고열은 더더구나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가. 나를 사지판에 밀어넣고 오만가지 행악을 다하던 병이 이렇게도 깨끗이 사라져 버릴수 있단 말인가?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창문을 스치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였다.붕 하는 문풍지소리는 뒤틀라즈를 떠나던 날 로야령산정에서 맞다들었던 쌍엽비행기의 발동기소리 같기도 하였다. 내 눈은 희슥희슥한 장미밑에서 부드럽게 나를 굽어보는 낯설은 늙은이의 눈과 마주쳤다.

 나의 바른편 손목을 가볍게 잡고있는 장알박인 로인의 손에서는 유년시절의 내 이마와 볼에 곧잘 와닿던 만경대할아버지의 온기가 느껴졌다.

 《이게 어딥니까?》

 나는 나를 굽어보고있는 수수께끼같은 로인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그 한마디의 물음은 로인의 얼굴에서 말이나 글로써는 다 그려낼수 없는 강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였다. 늙은이의 입가에 엇비스듬히 비껴있는 웃음기는 순식간에 볼과 눈가에로 퍼져가 땅과 같이 유순하고 땅과 같이 순박한 주름투성이의 얼굴을 신비스러운 모습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일생에서 그처럼 순결하고 미더운 얼굴을 처음 보는듯하였다.

 로인의 옆에 조각상처럼 앉아있던 왈룡이가 눈물을 왈칵 쏟으면서 원정대원들이 사선을 헤치고 시패린즈의 목재소로부터 이곳 다왜즈의 골짜기에 이를 때까지의 전말을 단숨에 설명해주었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이 댁의 덕분으로 내가 살아났습니다.》

 《아니오다. 김대장은 하늘이 낸 장수이니 이 귀틀집에 와서 소생한건 우리 집 덕이 아니라 천명이오다.》

 조택주로인은 그 순간 내 명이 정말로 하늘에서 떨어지기나 한것처럼 머리를 쳐들고 천정쪽을 쳐다보았다. 로인의 그 말은 내 마음을 매우 송구스럽게 하였다.

 《할아버지, 말씀을 낮춰주십시오. 나를 하늘이 낸 장수에 비기는건 너무 과분한 평가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떨어진 장수가 아니라 이름없는 농사군의 집에서 태여난 인민의 아들이고 손자입니다. 조선의 군사로서 나는 지금까지 해놓은 일이 너무도 적습니다.》

 《그건 안될 소리오다. 김대장이 얼마나 큰 전공을 세웠는가 하는건 온 세상이 다 알고있소다. 내 비록 이름모를 산골짜기에 와서 부대기를 일구며 근근히 살아가는 버러지같은 몸이지만 동북 3성에서 돌아가는 풍문은 다 듣구있소다. 얘들아, 이분이 바로 재작년 가을에 조선군대를 거느리고 오사령네 부대하구 같이 동녕현성을 쳤다는 그 유명한 김대장이시다. 날래 절들을 하거라.》

 로인은 내가 소생했다는 왈룡의 전갈을 받고 새벽잠자리에서 뛰쳐일어난 유격대원들과 함께 부엌문으로 쓸어들어오는 자손들을 보고 열띤 목소리로 분부했다.

 나는 이불밑에서 비스듬히 상체를 일으켜세우고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관청의 호적등본에도 오르지 않고 우체부들도 다니지 않는 심산의 귀틀집에서는 때아닌 웃음소리가 간단없이 울리였다.

 《지금은 이렇게 웃기도 하고 떠들기도 하지만 적의 사면포위속에서 고생할 때는 참말로 앞이 막막했습니다. 다 죽었다고 생각했지요.》

 김택근소대장이 눈물이 글썽해서 하는 말이였다.

 《나때문에 동무들이 많은 고생을 했소. 동무들이나마 죽지 않고 남았으니 그것도 천행이요. 내 백발이 될 때까지 동무들의 은공을 잊지 않겠소.》

 나는 그때 눈물에 젖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전우들의 모습을 깊이 새겨두었다. 지금도 그 얼굴들은 나의 기억속에서 50여년전 그날처럼 선명하게 살아움직이고있다. 그런데 이름만은 절반이상 잊어버리였다. 이름 석자만이라도 후세에 전해주고싶은 욕망이 간절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녹쓴 기억력이 나를 배신하고있다. 그 16명의 이름우에는 반세기이상을 헤아리는 지난날의 로정에서 나와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이러저러하게 인연을 맺은 수천수만의 이름들이 갈래를 찾아낼수 없게 덧놓이였다. 우리 항일혁명사의 심부에 묻혀있는 그 개개의 이름들을 일일이 채취해내자면 력사기록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그런 기록이 없다. 우리는 그 무슨 기록을 남기기 위하여 항일전쟁에 뛰여든 사람들이 아니라 근로인민대중이 주인으로 될 새 시대를 창조하기 위하여 손에 무장을 잡고 싸운 사람들이였다.

 하지만 이런 구실만으로써는 자기를 합리화할수 없을것 같다. 어쨌든 나는 자기를 사지에서 구원해준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전우들의 이름을 반수이상이나 망각한 지난날의 빨찌산대장이 아닌가.

 《할아버지, 고향은 어디인데 이런 막바지까지 쫓겨오셨습니까?》

 나는 피줄이 시퍼렇게 두드러져오른 조택주로인의 갈퀴같은 손등에 손을 얹고 옹근 반세기의 정치사가 고스란히 담겨져있는것 같은 로인의 주글주글한 얼굴을 련민의 정에 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내 고향이야 무산군 삼장면입지요. 일본놈들 등쌀에 견딜수 없어 29살 때 고향땅을 떠나 화룡땅으로 건너왔소다.》

 조로인의 쓸쓸한 대답이였다.

 두만강을 건너온 그해부터 로인은 근 30년동안 꼬박 소작농사를 하였다. 6.10만세사건이 있었다는 다음다음해에 로인의 일가는 로야령을 넘어와 일본도전공사에서 등록해놓은 묵밭을 일구기 시작하였다.

 내 눈앞에는 조선의 망국사와 더불어 령락된 한 농가의 기구한 수난의 력사가 영화화면처럼 방불하게 펼쳐졌다.

 로야령을 넘어온 조택주로인이 처음으로 울짱을 박고 주추돌을 다듬어 세운 마을은 조선사람의 집 세집, 중국사람의 집 다섯집이 사는 다왜즈라는 동네였다. 그후 조선사람의 집은 열집으로 늘어나 이 한적한 벽촌에도 반일자위대, 부녀회, 소년선봉대, 아동단과 같은 조직들이 뿌리를 내리게 되였다. 그러나 9.18사변의 여파는 이 모든 조직들을 한꺼번에 형체도 없이 쓸어버리였다. 《토벌》에 마을은 재더미가 되였다.

 사람들은 불타버린 집터자리에 다시 새 집을 짓고 줄기차게 생활을 꾸려나갔다. 1933년 봄에 두번째 참화가 다왜즈를 휩쓸었다. 집들은 또다시 화염속에 휩싸이고 사람들은 불속에서 재가 되였다.

 1934년 봄에 조택주일가는 다왜즈에서 30리가량 떨어진 로야령의 깊은 산중에 귀틀집을 짓고 그리로 거주지를 옮기였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꿀물에 탄 좁쌀미음을 먹고 원기를 회복한 그 집이였다. 조로인네 아홉식구는 집에서 20리나 되는 골어귀에 내려가 자그마한 농막을 짓고 부대를 일구었다. 일손이 딸리는 농번기에는 시간을 아끼느라고 온 식구가 그 농막에서 침식을 하였다. 곡식이 익는 차제로 잽싸게 거두어들였다가는 등짐으로 져서 산막까지 날라다가 땅굴에 묻어두고 발방아를 찧어 야금야금 먹었다.

 소박하고 원시적인 자급자족의 경제였지만 조택주로인은 거기에 만족하였다. 로인네가 쌀짐을 지고 녕안시가로 가는것은 단지 교환이 필요할 때뿐이였다. 천, 신발, 성냥, 소금, 바느실 따위의 물건들을 구하자면 시장거래를 외면할수 없었다. 그밖에는 외계와의 련계가 없었다. 도시문명은 행길도 없고 차마도 없고 전기도 없는 이 외로운 막바지에 감히 얼굴을 내밀지도 못하였다. 아이들은 교육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여있었다. 여기서는 조로인의 훈계가 교육을 대신하였고 최일화어머니의 옛말과 열손가락에도 채 차지 않는 노래가락이 문학예술을 대신하였다.

 《할아버지, 인적도 없는 이 외진 산중에서 얼마나 적적하시겠습니까?》

 나는 그 어떤 울분에 가까운 격렬한 감정을 체험하면서 로인에게 넌지시 물었다.

 조로인은 그 말을 듣자 쓸쓸하게 웃었다.

 《적적하다는거야 더 이를데가 없지요. 그렇지만 왜놈들 꼬락서니를 보지 않고 사니 살만 푹푹 지는것 같소다. 률도국이면 예보다 더 좋겠소다?》

 그 률도국이라는 말에 내 가슴은 아프게 조여들었다.

 이 궁벽한 막바지를 어떻게 률도국에 비길수 있단 말인가. 그래 조선민족의 리상이 고작 이런 지경에까지 굴러떨어졌단 말인가. 일본은 이민을 보내여 조선의 기름진 땅을 가로타고앉는데 우리 동포들은 황량한 만주땅에 와서까지 이런 쥐구멍같이 답답한 산골짜기에서 살아야 하니 세상에 감옥이 있다면 이보다 더 무서운 감옥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다. 그것은 의심할바없는 감옥이였다. 보통감옥과 다른 점이 있다면 간수가 없고 울타리가 없는것뿐이였다. 이 감옥을 지키는 최대의 간수는 일본과 만주국의 군경들이였으며 울타리는 그 군경들로부터 오는 위험이였다. 조로인이 이 감옥을 률도국으로 보는것은 시대착오적인 자기위안이였다.

 자기를 속박하는 감옥에 갇히여있으면서도 그것을 락원으로 감수하는 로인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저으기 나를 실망케 하였다. 조선사람들이 저마다 조로인식으로 현실을 감수한다면 조선은 영원히 소생의 빛을 보지 못하고말것이라는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 여기를 률도국이라고까지 생각할 지경이 되였으니 조선사람의 신세가 참으로 가긍합니다. 정배살이고장으로 이름난 삼수갑산도 아마 여기보다는 더 적막하지 않을것입니다. 왜놈들이 조선과 만주땅에 둥지를 틀고있는 한 우리에게는 률도국도 태평성대도 있을수 없습니다. 그러니 언제인가는 이 산골에도 〈토벌대〉가 쳐들어올수 있다는걸 각오해야 합니다.》

 나는 로인이 내 말을 듣고 불안해할수 있다는것을 알면서도 속심을 툭 터놓고 말했다.

 조로인은 눈섭을 씰룩거리며 한참동안 절망에 지쳐버린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악귀같은 놈팽이들이 이 산골에까지 달려든다면 이 세상에는 조선사람이 살만한 땅이 없지요. 빌어먹을것, 어느놈들이 백성의 신세를 이꼴로 만들어놓았는지. …나는 새고장에 이사를 갈적마다 매국 5대신을 욕하군했습니다.》

 그날새벽 나와 조택주로인사이에 오간 담화는 대체로 이런것이였다.

 나는 다음날부터 병상에서 일어나 산보도 하고 독서도 하였다. 며칠후부터는 가벼운 손로동도 하였다. 낮에는 군사정치상학을 집행하고 밤에는 대원들과 함께 오락회를 하였다. 오락회가 벌어질 때마다 조택주로인의 집에 거처를 정한 2~3명의 대원들은 나와 함께 물도랑건너편에 있는 조경의 집으로 몰려갔다. 이 비좁고 침침한 피난민들의 산막에서도 유격대의 일과는 왕청에 있을 때처럼 어김없이 집행되였다.

 사흘인가 나흘이 지났을 때 나는 대오에 출발명령을 내리려고 하였다. 14식구나 되는 대가정에 그보다 더 많은 장정들이 얹혀서 화전농의 빈약한 쌀독을 축내며 더부살이를 하는것은 도리에도 맞지 않고 상식에도 어그러지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즉석에서 한흥권중대장의 저항을 받았다. 그는 촉한을 앓고난 후 몸을 차게 구는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데 자기는 그런 모험에 동의할수 없다고 한사코 나를 막아나섰다. 지어 그는 내가 수림속에서 산보를 하는것까지도 반대하였다.

 20명 가까운 장정이 하루 세끼씩 먹는 식량은 사실 적다고 할수 없는것이였다. 지금 식량공급소에서 성인들에게 주는 정량을 가지고 계산하여도 20일이면 4가마니의 쌀을 먹는것으로 된다. 하여튼 그 집에 있는 식량은 우리가 거의다 털어먹었다.

 그러나 조택주로인은 우리가 끼치는 부담때문에 난색을 짓거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페를 끼쳐서 미안하다고 하면 제 나라군대를 잘 섬기는것은 백성의 응당한 도리이고 직분인데 페는 무슨 페인가고 하면서 입도 벌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 로인이 참말 대범한 늙은이였다.

 최일화어머니도 마음씨가 무던히 고운 녀자였다. 화전농사여서 흰쌀은 없었지만 조, 콩, 보리, 귀밀, 감자와 같은 잡곡으로 하루 세끼씩 우리 구미에 맞게 밥을 맛있게 해주었다. 때로는 비지도 해주고 밥상에 막두부장도 놓아주었다.

 최일화어머니는 병으로 쇠약해진 나에게 고기를 먹이지 못하는데 대하여 못내 가슴아파하였다.

 《거처가 드러난다구 집짐승을 한마리두 치지 않았더니 요새는 얼매나 아쉬운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때 닭 같은게 한마리라도 있으면 얼른 튀를 해서 장군님께 대접하는건데… 100리밖에 나가서라두 고기점을 사다가 대접할 생각은 간절하지만 〈토벌대〉미치광이들에게 혼쌀이 날가봐 가지 못합니다. 에구, 세상두…》

 어머니의 텁텁하고 거칠거칠한 말투에서 풍기는 인정미는 유난히 따뜻하고 웅숭깊었다.

 《어머니, 그런 말씀을 하시면 오히려 내가 송구스럽습니다. 나도 어려서부터 푸성귀와 시래기국을 먹으면서 자라난 평백성의 자식입니다. 그러니 고기를 먹이지 못한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머니는 서슬이 없어 두부를 못하고 막두부장만 대접해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시지만 나는 그 막두부장과 비지덕에 살이 오르는것 같습니다.》

 《평안도 남정네들은 성미가 왈가당뎅가당하다더니만 대장님은 마음씨가 비단같습니다. 집에 딸자식이래두 하나 있으면 평안도에 시집을 보낼 생각이 다 납니다. 그저 찬새가 없는 밥이지만 푹푹 많이 들고 이 집지붕밑에서 병을 뚝 떼십시오.》

 내가 식사를 할 때마다 최일화어머니는 부뚜막앞에 쭈그리고 앉아 가슴을 조이군하였다. 밥을 다 들지 않고 중도에서 수저를 놓으면 어쩌나 해서였다.

 나는 입맛이 없을 때에도 어머니의 정성을 생각하여 개다리소반의 밥과 찬을 억지로 다 들군하였다. 그럴 때마다 최일화어머니의 입가에는 느슨한 웃음기가 내비치군하였다.

 인민이 우리에게 바치는 정이란 참말로 깨끗하고 구김살이 없었다.만일 그 정을 강물이나 시내물에 비길수 있다면 나는 거기에 《청류》나 《옥류》라는 이름을 붙이고싶다. 그 정은 길이로써도 잴수 없고 무게로써도 가늠할수 없는 무한대한것이다.

 인민의 사랑속에 사는 사람은 행복하고 인민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이것은 나의 일생을 관통하고있는 행복에 대한 가치관이다. 지난날에도 그러하였지만 지금도 나는 인민의 사랑을 받는데서 최대의 보람과 행복을 느끼고있다. 인생의 첫째가는 진미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가. 이 진미를 아는 사람만이 인민의 참된 아들이 되고 충복이 될수 있다.

 조택주일가의 꾸준한 지성으로 내 건강은 빨리 회복되였다. 나는 한흥권의 반대를 무릅쓰고 산책을 자주 하였다. 어떤 날은 이 집 식구들을 도와 나무도 패주고 발방아도 찧어주었다.

 우리가 다왜즈골안에 들어와 조로인일가의 지성어린 간호를 받은 때로부터 어언 10여일이라는 시일이 지나갔다. 나는 유격구로 돌아갈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왕청을 떠난것이 아득한 옛일처럼 느껴졌다. 달수로 따지면 불과 석달전의 일이였는데 그 사이에 유격구에서 무슨 사변들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원정대가 왕청으로 돌아갈 때는 유격구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게 되겠는지 나로서는 그것이 몹시 궁금하였다. 장래를 생각하면 어쩐지 미심쩍은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팔도하자일대에서 활동하고있을 때 동만에서 온 통신원들은 숙반공작바람에 간도지방민심이 매우 소연해졌다고 여러번 암시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반《민생단》몽둥이에 혁명진지가 다 녹아난다고 푸념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숙청사업이 좀더 본격화되면 유격근거지가 한두해안팎에 거덜날것같다고 하였다.

 유격구에 돌아가 극좌적인 반《민생단》투쟁으로 하여 빚어진 후과를 하루빨리 수습해야겠다는 결심은 내 마음속에서 나날이 굳어져갔다.

 어느날 수림속에서 가벼운 산책을 하던 나는 한흥권중대장에게 그 결심을 알리려고 조경이네 집으로 발길을 돌리였다.

 중대장은 조경이네 집근처에 있는 나무등걸우에 앉아 북녘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앞가슴에 두팔을 엇가로 모아붙이고 목조품과 같이 뚝뚝한 자세로 앉아있는 그의 체취에서는 누구도 감히 범접해서는 안될 그 어떤 강렬하고도 애달픈 감회가 느껴졌다. 내가 가까이에 다가가자 한흥권은 급히 눈굽을 문지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중대장의 눈언저리가 불그레해진것을 보고 섬찍한 생각이 들었다. 밤사이에 혹시 무슨 변고가 생긴것이나 아닐가. 아니면 저 억대우같은 사나이에게 누구에게도 터놓지 못할 그 어떤 고뇌라도 있는게 아닐가.

 《중대장, 한흥권이답지 않게 아침부터 웬일이요?》

 나는 한흥권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나서 그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흥권은 웬일인지 나를 침울하게 지켜보고있었다.

 중대장은 물기어린 눈을 슴벅이고나서 한숨을 크게 몰아쉬였다. 그리고는 뜨직뜨직 말했다.

 《수십명이나 북만에 갔다가 16명밖에 살아남지 못했으니…그게 어떻게 꾸린 중댑니까!》

 나는 그와 함께 5중대를 꾸리던 나날들을 뜨겁게 회고하였다.

 5중대는 십리평에 주둔하고있던 왕청 2중대에서 갈라져나온 신설중대였다.

 나는 2중대의 일부 대원들을 데리고 라자구지방에 가서 새로운 청년들로 대오를 확대하였는데 이런 공정을 거쳐 꾸려진것이 바로 한흥권이 지휘하는 5중대였다.

 왕청 5중대는 나의 친솔중대이기도 하였다. 나는 대대와 련대를 지휘하던 나날에도 항상 이 5중대를 데리고 다니면서 적구교란작전을 진행하였다. 왕청 5중대는 동만의 모든 유격부대들가운데서도 전투력이 제일 강하고 전투경험이 가장 풍부한 정예부대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 중대가 적지 않은 희생을 내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유격구에 돌아가게 되였으니 한흥권이 머리를 움켜잡고 고통에 몸부림치는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5중대가 당한 손실을 생각하면 나역시 가슴이 찢어질것 같은 심정이요. 하지만 나는 북만동무들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하였다는데서 큰 위안을 받고있소. 하기야 소득도 컸지. 흥권동무, 피는 헛되지 않는 법이요. 이제 다시 대오를 늘이고 전우들이 흘린 피값을 천백배로 받아냅시다!》

 내가 한흥권에게 한 이 말은 사실 나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하였다.

 한흥권은 입술을 꾹 다물고 북쪽하늘을 그냥 고집스럽게 바라보았다. 한두마디의 위로로 아물릴 상처가 아니였다. 깊이와 농도를 가늠할수 없는것이 아마도 사나이들의 비애인것 같다. 한흥권의 침묵은 나를 실망케 하거나 노엽게 한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대한 나의 믿음을 배가해주었다.

 며칠후 나는 조택주로인의 만류를 무릅쓰고 대오에 출발명령을 내리였다.

 로인에게 작별인사를 드리려고 귀틀집앞에 정렬해선 일행의 표정은 자못 근엄하였다.

 《할아버지, 나는 업혀서 이 댁에 왔다가 두발로 걸어서 유격구로 돌아가게 됩니다. 댁이 아니였더라면 병도 고치지 못하고 살아나지도 못했을것입니다. 내 언제든지 이 신세를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조로인일가에 대한 고마움을 그보다 더 절절한 말로 표시할수 없는것이 안타까왔다. 격정의 크기와 언어의 무력은 서로 정비례하는지도 모르겠다.

 조로인은 내 말을 매우 송구스럽게 받아들이였다.

 《고기 한점도 대접해드리지 못한 백성인데 칭찬이 너무 과하오다. 김대장을 더 오래 모시지 못하고 떠나보내는것이 한스럽소다. 그렇지만 조선을 위해서 빨리 가야 할 걸음이니 굳이 막지는 않겠소다. 나라가 독립되면 우리두 이 산골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는 김대장만 믿소다.》

 《살길을 찾아온 이국땅에서까지 해빛을 보지 못하고 숨어 살아야 하니 조선의 아들들의 죄가 큽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 이제 해빛을 보면서 살게 될 날은 꼭 옵니다. 봄이 되면 놈들의 〈토벌〉이 심해지고 이골안에서도 총소리가 잦아지겠는데 고생스럽겠지만 라자구쪽으로 이사를 가십시오. 혁명바람이 센곳이니 여기보다는 거기가 안전할겁니다.》

 나는 이런 부탁을 남기고 다왜즈의 골안을 떠났다.

 최일화어머니는 그때 우리의 배낭속에 밤새워 조와 보리를 찧고 쓿어서 마련한 3일분의 길량식을 넣어주었고 봇나무껍질에 고추장과 줴기밥을 싸서 도중식사까지 갖추어주었다. 어머니의 맏아들 조영선은 로야령눈무지를 헤치며 우리를 팔인구까지 안내해주었다.

 그후 조로인의 집근처에서는 《토벌대》의 총소리가 자주 울리였다. 우리의 예언이 맞아떨어진것이다. 밤중에 식량과 헌옷가지들을 대충 싸가지고 은밀히 다왜즈를 떠난 조로인일가는 태평구로 이사하여 거기서 소작살이를 시작하였다.

 나는 그해(1935년) 6월 태평구에서 이 일가사람들을 다시 만나보았다. 로흑산에서 악질적인 정안군부대를 괴멸시킨 동만의 원정부대는 그때 태평구 건너편마을인 신툰자에 머물러있으면서 맹렬한 군중공작을 벌리고있었다. 우리는 태평구마을에도 유능한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였다. 그들은 나와 함께 다왜즈골안에서 조로인일가의 신세를 많이 진사람들이였다. 이 사람들이 길가에서 우연히 조택주로인을 만나보고 나에게 그 사연을 보고하였다.

 나는 그날로 조택주로인의 집을 방문하였다. 반년전에는 인사불성이된 상태로 업혀서 로인의 집에 갔던 나였다. 내 곁에는 북만의 광야에서 지칠대로 지친 16명의 대원들밖에 없었었다. 하지만 그날은 16명이 아니라 대부대를 거느리고 원기왕성한 몸으로 로인을 찾아갔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사람이 바칠수 있는 최고의 지성으로 나를 구원해주고 살틀히 돌봐준 생명의 은인들, 그런 은인들한테로 가는 걸음치고는 우리의 행장이 너무나도 초라하고 홀가분하였다. 내 수중에는 몇근의 고기와 한두달동안의 농량을 보탤만한 얼마간의 돈밖에 없었다. 그 몇근의 고기가 몇십마리의 가축이 되고 그 몇푼의 돈이 한달구지의 금화가 될수 있다면 얼마나 내 마음이 흐뭇하겠는가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덕을 덕으로 풍족하게 갚지 못할 때의 그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심정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가슴을 쭉 펴고 활기있게 걸음을 재촉했다. 보따리는 빈약해도 우리는 살아서 다시 만나게 되는 행운을 지니지 않았는가. 나도 무사하고 조로인일가도 죄다 건재하다니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행복인가.

 가난의 자취가 력력한 초라한 사랑방, 그 사랑방에서 헌누데기를 걸치고 비비닥거리는 여라문명의 대식구, 궁상은 극에 이르렀건만 나를 맞이하는 이 일가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떨기떨기 피여났다. 나는 토방돌우에 걸터앉아 로인과 함께 회포를 나누었다. 로인의 호기심은 정안군을 요정낸 혁명군의 전과에 쏠리였고 나의 관심은 조로인일가의 경제적궁핍에 쏠리였다.

 《할아버지, 소도 없이 농사는 어떻게 짓고 땔나무는 어떻게 해옵니까?》

 이것은 내가 다왜즈에 머물러있을 때부터 걱정하던 문제였다.

 《인력으로 해내오다. 14명 모두가 소가 되고 말이 되여 가대기도 끌구 나무짐도 집지요.》

 60평생 등에 짊어지고 다닌 가난을 덜지도 보태지도 않고 례사롭게 말하는 조로인의 모습은 그날따라 유난히도 대범해보이였다.

 《이 많은 식구를 먹여살리느라고 고생이 오죽하시겠습니까.》

 《고생이야 막심합지요. 그렇지만 땅을 뚜지는 고생이 아무리 큰들 김장군이 겪는 간난신고보다야 더 크겠습니까. 요새는 못먹구 못살아두 어깨가 으쓱해서 다닙니다.》

 《무슨 경사라도 생겼습니까?》

 《김장군군대가 왜놈들을 연거퍼 답새기니 부자가 된것 같아서 그럽지요. 혁명군이 자꾸 이긴다는 소문에 배고픔 같은것쯤은 꿈만해지오다. 다왜즈에서 김장군을 바래줄 때만 해두 난 눈앞이 캄캄했소다. 우리 집식구만큼밖에 안되는 군대를 가지구 무슨 일을 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런데 어제 로흑산에서 개선하는것을 보니 김장군의 군사가 몇백명이나 되더란말이오다. 그래서 난 속으로 〈이제는 됐다. 조선이 이겼다!〉고 무릎을 쳤소다.》

 다왜즈에서 살 때만 해도 민생문제를 많이 론하던 조로인이 그날은 놀랍게도 혁명군의 전과와 관련된 한가지 화제에만 관심을 표시하였다. 세월은 그를 반년사이에 딴사람처럼 변모시키였다. 그는 세상을 향해 침을 뱉고 돌아선 무기력하고 무저항적인 은둔자로부터 자기가 결별하고 떠나간 생활의 한복판에 다시 돌아와 래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웃으면서 살아가는 락천가로 변하였다.

 (군대가 싸움을 잘하면 인민의 배짱이 커지는구나!)

 이것은 그날 조로인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받아안았던 충격이였다.

 나는 로인의 집을 떠날 때 살림에 보태쓸수 있는 용돈을 얼마간 남기고 다음날에는 대원들을 파견하여 로흑산전투에서 로획한 백마 한필을 보내주었다. 좀 여윈 말이기는 하지만 살을 잘 찌워서 역축으로 쓰게 하자는것이였다. 조로인일가가 나에게 바친 정성에 비기면 너무나도 빈약한 보상이였다. 돈이나 재물 같은것만으로는 이 일가에 진 빚을 후히 갚을수 없었다.

 파란많은 운명의 숨박곡질은 그후 나와 조택주일가를 련결시켜주고있던 혈연의 실마리를 끊어놓았다. 그 당시의 나의 주되는 활동무대는 백두산지구였다. 백두산지구에 나온 후로는 태평구마을에 한번도 가보지 못하였다. 내가 조로인일가의 행방을 알게 된것은 1959년 가을이였다.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되였던 항일무장투쟁전적지답사단이 녕안땅에서 최일화어머니를 찾아냈다는 보고가 나에게로 날아왔다.

 수십년동안 행처를 몰라 안타깝게 수소문하던 은인중의 은인들이 비록 지구의 다른 지경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 살아서 건재하고있는것이다. 국경을 넘어 당장이라도 녕안땅에 뛰여가 은인들에게 절을 드리고싶은 마음, 선렬들의 꿈이 꽃피고있는 조국에서 그들과 더불어 세월의 이끼에 뒤덮인 지난날의 발자취들을 뒤돌아보며 쌓이고쌓였던 그리움을 한껏 터치고싶은 마음!

 그러나 나와 그 일가사이에는 국경이라는 장벽이 가로놓여있었다. 복잡한 절차와 수속을 통해서만 이루어질수 있는 상봉! 하지만 이런 장애도 그 상봉을 일구월심으로 기다리는 나의 열정에 찬바람을 끼얹지는 못하였다. 나는 단 몇달동안만이라도 보통려권을 가진 평민이 되여 빨찌산시절처럼 지하족을 신고 행전을 치고 배낭을 메고 줴기밥을 먹으면서 때로는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고 무릎을 치는 강하도 건느면서 초목에 묻힌 지난날의 격전장도 돌아보고 전우들의 무덤에 잔디도 떠옮기고 나를 목숨으로 도와주고 보호해준 은인들과 인사도 나누고싶었다.

 평민생활에 대한 동경과 향수는 어떤 정객에게나 다 있는 모양이다. 국가관리를 책임진 수반이 평민생활을 부러워한다고해서 이상할것은 조금도 없다.

 해방후 나는 여러차례에 걸쳐 중국과 쏘련을 방문할 기회를 가지였다. 만주와 쏘련의 중앙아세아지방에는 내가 만나보아야 할 전우들과 은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국가수반이라는 공식적직무는 매번 나로 하여금 방문일정에 사사로운것을 포함시킬수 없게 하였다. 나의 온 신경은 항일, 항미의두 대전에서 파괴되고 령락된 조국을 재건하는데로만 쏠리였었다.

 내가 만일 보통공민의 자격으로 쏘련이나 중국을 방문하였더라면 항일전쟁시기의 연고자들을 그닥 어렵지 않게 만나보았을수도 있을것이다. 우리가 이따금씩 평민생활을 동경하는 리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나라를 령도하는 국가수반이 일상생활에서 구속을 느낀다고 하면 사람들은 아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수 있는가?》고 하면서 고개를 기웃거릴것이다. 내가 어느 지방에 현지지도를 가려고 하면 어떤 일군들은 《수령님, 그 지방 날씨가 좋지 않습니다.》라고 하며 내가 아무아무데 가서 사람들을 만나보겠다고 하면 《수령님, 그쪽은 진펄이니 자동차가 다닐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물론 나를 위한 걱정이고 념려이지만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일정한 구속으로 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이듬해 최일화어머니는 가족들을 데리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조택주로인의 화룡행으로부터 시작되였던 이 일가의 지긋지긋한 방랑생활이 마침내 60풍상의 피어린 곡절을 거쳐 그 후손들의 평양행으로 막을 내리게 된것이다. 독립된 조국, 자유의 조국, 페허속에서 자립의 기발을 들고 우람하게 일떠서는 조국의 모습을 바라보는 조씨일가사람들의 심정이 과연 어떠했으랴. 최일화어머니가 조국으로 돌아온것은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세계가 명명한 재일동포들의 귀국실현으로 온 나라가 들끓던 력사적인 격동기였다. 이 격동적인 흐름을 타고 조씨일가사람들도 귀국의 길에 올랐다.

 그 당시 최일화어머니의 년세는 67살이였다. 다왜즈골안의 음달에 쌓여있던 장설이 그대로 얹혀졌는가, 어머니의 머리칼은 희끗희끗한 백설로 덮여있었다. 량세봉의 부인처럼 그도 처음에는 내 손을 붙잡고 울기만하였다.

 《어머니, 이 기쁜날 왜 우십니까. 우리는 살아서 이렇게 다시 만나지 않았습니까!》

 내가 눈물을 훔쳐드리려고 손수건을 꺼내자 최일화어머니는 눈언저리에 옷고름을 가져다댔다.

 《수상님께서 촉한때문에 고생하시던 생각이 나서 그럽니다.》

 《내 고생이야 고생이랄게 있습니까. 진짜고생이야 어머니하구 조택주할아버지가 했지요. 나는 그 은혜를 잊을수 없어 조국이 해방된 다음 만주에 사람들을 보내서 일가분들을 그냥 찾았습니다. 우리가 태평구에서 헤여진게 아마 1935년 여름이였지요? 〈토벌〉이 심해서 녕안으로 가셨다는데 그 다음엔 어떻게 살았습니까?》

 《백마를 가지고 나무를 해다 팔아서 그것으로 명줄을 이었습지요. 수상님께서 주신 그 백마가 아니였더라면 우리는 다 굶어죽을번했습니다.》

 《백마가 은을 냈다니 나도 기쁩니다. 조택주할아버지가 1953년에 세상을 떠나셨다는게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우리 아버님은 생전에 내내 수상님 말만 했습니다. 미국비행기들이 평양을 폭격했다는 소문을 들은 날이면 〈김일성장군님께서 무고하셔야겠는데.〉, 〈장군님 고생이 말이 아니구나.〉하면서 잠도 못주무셨습니다.》

 조택주로인이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나를 잊지 않고 나의 건강을 축원했다는 최일화어머니의 말은 내 가슴을 크게 울려주었다.

 변하지 않는것은 인민의 정이였다. 이 세상 모든것이 다 변해도 우리에게 바치는 인민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그 사랑은 어제에서 오늘로 이어지고 오늘에서 래일로 승화되며 그 어떤 역경이나 환난속에서도 퇴색하지 않고 보석처럼 빛을 뿌리는 영원한것이였다.

 《7년만 더 살아계셨으면 조국에 오시는건데 조택주할아버지가 정말 애석하게 됐습니다. 나는 지금도 이따금씩 다왜즈의 그 귀틀집을 생각하군합니다. 거기에 더러 가보셨습니까?》

 《가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그 산골에 다시 가서 살것 같지 못합니다.》

 《그 산골에야 왜 다시 가겠습니까. 일평생 고생도 많이 하셨는데 이제는 자식들 덕도 보면서 편안히 여생을 보내야지요. 내가 어머니의 집을 잡아주겠습니다.》

 1961년 4월 15일 나의 생일 49돐을 축하하려고 우리 집에 찾아온 최일화어머니는 나에게 만년필 한대를 선물하였다. 그때 그는 몹시 수집어하면서 자기가 마련한 기념품에 이런 주석을 달았다.

 《수상님, 수상님께서 우리 집에 주신 그 백마가 이 만년필이 되였습니다. 수상님 분부대로 백마를 살찌워 농사를 지었는데 놈들이 군마로 끌어갈가봐 소와 바꾸었습니다. 그 소덕분에 온 집안이 먹고살았습니다. 해방후에는 그 소를 합작사에 넣었습니다. 조국으로 나올 때 소값을 찾아서 이 만년필을 샀습니다. 수상님께서 보시는 일이 잘되고 부디 만년장수하시라고 만년필을 드리오니 저의 성의로 아시고 받아주십시오.》

 나는 백마가 만년필로 되기까지 조택주일가가 걸어온 로정우에 압축되여있는 우리 인민의 수난많은 민족사에 대하여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더듬어보았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내 어머니의 부탁대로 오래오래 살면서 인민을 위해 복무하겠습니다.》

 그해 8월 15일 온 나라 가정들이 광복절 16돐을 기념하고 있을 때 나는 대동강기슭에 자리잡은 최일화어머니의 집을 찾았다.

 신접살림의 청신한 기운이 강하게 풍기는 방들에서는 명절을 즐기는 이 일가 아이들의 방울을 굴리는것 같은 웃음소리가 넘쳐흐르고있었다. 그 집은 작가들과 항일혁명투사들을 위해 내가 직접 터를 잡아주고 설계도면까지 보아준 아빠트였다. 당시까지만 하여도 평양에는 이보다 더 훌륭한 아빠트가 없었다.

 평양사람들은 최일화어머니의 집이 자리잡고있는 이 경상동 일대를 닭알노란자위에 비기고있다.

 《어머니, 집이 마음에 듭니까?》

 《마음에 들구말구요. 내 평생에 이런 좋은 집은 처음입니다.》

 최일화어머니는 새 집의 전망을 자랑하고싶어서인지 대동강쪽으로 면한 창문을 활짝 열어제끼였다. 강바람이 서느럽게 불어들어와 고생속에 세여버린 어머니의 흰머리오리들을 가볍게 들추어놓았다.

 《한평생 두메산골에서만 살아오신 어머니이기에 강기슭에 집을 잡아주었는데 혹시 산이 그립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저 대동강을 보는것이 더 좋습니다. 강변살림에 살이 푹푹 지는것같습니다.》

 《그래도 산이 그리워질 때가 있을지 알겠습니까. 다왜즈가 사람 못살 막바지이긴 했지만 공기야 좋았지요. 산공기가 그리워질 때면 모란봉에랑 올라가십시오. 산을 그리워할것 같아서 모란봉가까이에 집을 정했으니 산보랑 많이 하십시오. 앞으로 더 좋은 집을 지으면 어머니를 새집에 또 모시겠습니다.》

 《수상님,  저희들은 이 집으로 만족합니다. 그저 수상님가까이에서 살면 됩니다.》

 최일화어머니는 현관밖까지 따라나와 나를 바래주었다. 내가 작별인사를 하려고 손을 내밀자 어머니는 나의 손을 꼭 붙잡고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수상님, 수상님곁에 용한 의원들이 있습니까?》

 나는 아무런 맥락도 없는 그 물음에 어리둥절한 생각이 들었다.

 《의사들이야 많지요. 왜 그러십니까?》

 《수상님께서 촉한때문에 고생하시던 생각이 나서 그럽니다. 그런 몹쓸 병이 다시 오면 어떻게 합니까.》

 《어머니, 걱정마십시오. 나는 건강합니다. 설사 그런 중병이 다시 온대도 두렵지 않습니다. 촉한을 잘 고치는 최일화어머니가 내곁에 있지 않습니까.》

 최일화어머니와 헤여진 나는 명상에 잠겨 명절분위기로 흥성거리는 수도의 중심거리들을 오래오래 돌아보았다. 2만세대운동의 봉화가 타올랐던 승리거리, 인민군거리와 함께 평양의 중심거리들은 풍격있는 공공건물들과 다층아빠트들로 자기의 면모를 완성해가고있었다. 전후 여덟해동안 수만명의 수도시민들이 토굴집에서 나와 복구건설의 교향곡속에서 새롭게 태여난 아빠트들로 이사하였다.

 그러나 건설은 아직 첫 시작을 뗀데 불과하였다. 수도시민의 과반수는 그때까지만 해도 문명이전의 초라한 움집들과 단간집들에서 살고있었다. 그들은 모두 항일, 항미의 불바다속에서 이 세상 그 어느 민족도 겪어보지 못한 참담한 희생과 고통을 강요당해온 사람들이다. 세상에 우리 인민처럼 피를 많이 흘리고 찬바람을 많이 맞고 끼니를 많이 굶어본 인민이 또 어데 있겠는가. 저사람들을 위해 좋은 집들을 더 많이 짓고 좋은 천을 더 많이 짜내고 좋은 학교들과 휴양소들과 병원들을 더 많이 건설하자. 그리고 이국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는 동포들을 더 많이 데려오자. 이것이 나를 촉한에서 구원해주고 사지에서 건져준 인민을 위해 내가 할 한생의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최일화어머니는 여러해전에 이미 고인이 되여 애국렬사릉에 묻히였다. 우리를 팔인구까지 안내해주던 어머니의 아들 조영선과 물심부름을 해주던 딸은 벌써 70대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였다. 그들이 광복된 조국에서 후반생을 보내고있는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평양에서 다왜즈까지는 수천리이다. 장설로 덮이였던 그 한적한 골짜기에 작별인사를 남기고 떠난 때로부터 어언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사나운 설한풍으로부터 조로인의 외로운 산막을 보호해주던 밀림의 설레임소리는 오늘도 내 귀전에서 쉬임없이 울리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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