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소탕하에서의 일행천리

 

만강부근에서 여러차례의 격전을 치른 다음 우리는 부대를 이끌고 양목정자밀영으로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양목정자는 시난차에서 로령으로 올라가는 산중턱에 있었다. 이 지명은 버들이 많은 고장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였다고 한다. 령으로 올라가는 오솔길 좌우에 밀영이 각각 하나씩 있었는데 한쪽 밀영을 동양목정자밀영이라 하였고 다른쪽 밀영을 서양목정자밀영이라 하였다. 우리가 먼저 간 밀영은 서양목정자밀영이였다. 그 밀영에 바로 유참모부대가 있었다. 동양목정자밀영에서 남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어가면 얼마 멀지 않은곳에 고력보자밀영이 있었다. 로령을 중심으로 하여 삼각으로 놓여있는 이 세 밀영을 통칭하여 사람들은 양목정자밀영이라고 한다.

양목정자밀영은 창설후 여러해동안 리용해오다가 림수산이 《토벌대》를 끌고와서 대규모적인 습격을 감행한 1940년 3월에 페영되였다. 그 《토벌》로 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밀영은 불타버렸다.

양목정자는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고장이다. 여기서 나의 전우이며 믿음직한 조언자인 리동백이 희생되였다. 경위중대의 중대장으로 있던 리달경이 중상당한 몸으로 담가에 실려왔다가 희생된곳도 이 밀영이였다. 우리가 《서광》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라는 론문을 발표한 고장도 다름아닌 양목정자였다. 우리는 이 밀영에서 위증민을 비롯한 군부간부들과 여러번 만나 련합작전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가지고 론의하였다.

나는 양목정자밀영에서 1937년 여름의 조국진군과 관련된 작전적구상을 무르익혔고 그 준비를 다그치였다.

국내진공을 준비하는데서 중요한 한 고리가 후방물자를 마련하는것이였다.

나는 양목정자에서 오중흡을 책임자로 하는 소부대를 편성한 다음 그들을 김주현이 기다리고있는 장백으로 파견하였다. 이 소부대에는 재봉대의 녀대원들과 동상자들, 허약자들도 포함되여있었다. 한사람당 하루에 강낭죽 한그릇도 차례지지 못하는 고달픈 설상행군에 비하면 그래도 장백에 나가서 후방물자를 마련하는 일이 한결 헐할수도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후방물자공작을 위한 소부대와 함께 서간도일대와 국내에 침투하여 활동하게 될 정치공작원들도 파견하였다.

그후 원정부대는 적들을 유인분산시키고 식량을 해결하기 위하여 양목정자를 떠나 소탕하의 밀림속에 있는 4사후방밀영으로 찾아갔다. 그 밀영에는 술통, 귤상자, 사과상자 같은것도 있었다. 4사의 전우들은 정안군을 치고 빼앗은 전리품이라고 자랑하였다. 그 전리품중에는 기관총도 3정이나 있었다.

4사동무들은 우리에게 이틀분의 식량으로 될만한 강냉이를 퍼주었다. 부대가 4사밀영을 떠날 때 몇동무들이 비로까데를 구슬려서 술통도 하나 메왔다.

나는 술통을 보자 금주령을 내리였다. 우리는 원래 술과 담배를 장려하지 않았다. 그 두가지가 다 군사활동에 지장을 주는 때가 많았기때문이였다.

어느해였던지 잘 기억되지 않으나 행군을 하다가 혼란에 빠진 일이 있었다. 쉴참에 인원을 점검해보니 2명이 행방불명이였다. 그래서 그들을 찾기 시작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두 대원은 행군도중에 슬그머니 음식점에 새여들어가서 술을 마시였던것이다. 물론 그들은 비판을 되게 받았다.

술통을 보자 능구렝이들은 날씨도 추운데 한대포 하자고 리동학중대장을 구슬리기 시작하였다.

리동학은 자기 둘레를 맴돌며 검질기게 달라붙는 그들의 간청을 막아낼수 없었다. 그는 통에서 술을 뽑아 대원들에게 한잔씩 골고루 권하였다.

《사령관동지 모르게 한모금씩만 마시자. 한모금쯤이야 일없겠지.》

이렇게 되여 그날 경위대원들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전원 술을 마시게 되였다. 다른 중대들에서도 다 술을 마시였다. 어쨌든 이 황당한 평균분배로 하여 우리는 소탕하전투에서 큰 랑패를 볼번하였다.

리동학의 경력가운데서 과오가 있었다면 아마 그날의 과오가 제일 엄중한것이였으리라고 생각한다.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사람들이 술을 마셨으니 취기가 심해질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다가 그날은 보초병도 규정을 어기고 경솔하게 행동하였다. 그날아침 숙영지어귀에서 보초임무를 수행한것은 8련대 대원이였다. 그가 보초를 서고있을 때 숙영지로는 수백명의 위만군들이 포위해들어오고있었다. 보초는 인기척소리를 듣고 《누구얏?》하고 소리쳤다.

그런데 그 보초에게 걸려든 위만군이 능청스러웠다. 그가 《우리는 4사부대이다. 너희들은 김사령부대가 아니냐?》하고 말하는 바람에 얼떨떨해진 보초는 그들을 4사부대라고 속단하고 《그렇다. 너희들은 어디서 오는 길이냐?》 하고 묻기까지 하였다. 이러는 사이에 위만군《토벌대》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포위환을 바싹 조이였다.

위만군은 보초에게 너희가 정말 김사령부대라면 대표를 보내라고 하였다. 인민혁명군이 린접부대를 만날 때 대표를 보내는것은 원래 규정에도 없는것이였다. 그러나 8련대 보초는 위만군측에 자의로 대표를 한사람 보냈다. 릉선을 다 차지한 적들은 그 대표를 체포하고 무장해제까지 시킨 다음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렇게 되여 얼마동안 우리는 피동에 빠지게 되였다.

이런 상태에서 전투정황을 유리하게 역전시킨다는것은 조련치 않았다. 적들은 벌써 사령부가 자리잡고있는 릉선뒤에까지 기여오르고있었다. 나는 전부대에 고지를 차지하라고 명령하였다.

리동학이 대원들에게 술을 먹인 후과가 나타난것이 이때였다. 나는 명령이 떨어진 다음에도 인차 고지에 오르지 못하고 기슭에서 어물거리는 대원들을 여러명 보았다. 후에 알아보니 그들은 다 술을 마실줄 모르면서도 무턱대고 받아마신 사람들이였다. 경위중대 기관총수였던 강위룡도 그들중의 한사람이였다. 내가 고지를 빨리 차지하라고 여러번 고함을 쳤지만 그는 계속 아래에서 뭉개고만 있었다. 후날 그가 고백한데 의하면 술기운때문에 다리가 떨리고 눈앞이 어질어질해서 도무지 발을 옮겨놓을수 없더라는것이였다. 기관총수가 그 지경이니 나도 어지간히 당황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적과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나니 고지우에서는 혼전이 벌어졌다. 리동학의 배낭은 적의 몰사격에 여러군데 찢기우고 한 대원은 적탄에 한쪽귀가 떨어져나갔다.

설상가상으로 김택환이 지휘하는 7련대 2중대는 아직 포위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있었다.

그래도 경위중대 기관총수들이 그날 은을 내였다. 기관총수들은 위치를 자주 옮기면서 적들에게 맹사격을 들이대였다. 그러는 사이에 8련대가 포위에서 빠져나왔다. 김택환이네 중대도 한개 분대를 잃기는 하였으나 혼전속에서 구출되였다.

전투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였다. 이 전투에서 우리는 수백명의 적을 살상하고 많은 전리품들을 로획하였다. 싸움에서 이기기는 하였으나 그 전투는 우리모두의 가슴에 아픈 상처를 남기였다. 우리측에서도 손실이 적지 않았다. 김산호는 대원들을 구출하느라고 사방으로 뛰여다니다가 여러발의 적탄을 맞았다.

그는 마지막순간에 창격전의 명수인 김학률을 불러 돌격로를 개척하라고 명령하였다.

김학률은 신창동에서 한태룡과 함께 입대한 힘장사였다. 기운도 세지만 대바르고 용감한 사람이였다. 그는 성시습격전투를 할 때마다 앞장에서 돌격로를 개척하였으며 전투가 끝난 다음에는 쌀창고나 후방물자창고를 헤치고 선참으로 무거운 짐짝들을 메내군하였다. 언제인가는 100키로그람짜리 쌀포대를 단꺼번에 2개나 메고 나와 전우들을 놀라게 한 일까지 있었다. 눈속에 굴을 뚫고 전진할 때에도 선두에는 언제나 그가 서있었다.

명령을 받은 김학률은 적들의 무리속에 뛰여들어 육박전을 벌리였다. 그는 총창으로 여라문명이나 되는 적병들을 찔러눕히였다. 그러는 과정에 여덟군데나 부상을 당하였다. 참으로 불사신같은 사람이였다. 김학률은 창격전을 할수 없게 되자 수류탄으로 적들을 족치였다. 그러다가 마지막 한발의 수류탄을 안고 적들의 무리속으로 굴러들어갔다. 요란한 폭음이 고지를 흔들어놓았다. 전우들은 모두 입술을 깨물며 비통한 심정으로 그와 영결하였다.

가장 큰 손실은 8련대 정치위원 김산호를 잃은것이였다. 김산호는 오가자시절부터 나와 여러해동안 고락을 같이해온 사람이였다. 우리는 보통사람들이 혁명을 통해 얼마나 비약적으로 발전하는가를 말할 때마다 그 전형적인 실례로 김산호를 들군하였다. 그리하여 《머슴군으로부터 련대정치위원으로!》라는 말은 혁명이 보통사람들의 발전과정을 얼마나 강력하게 추동하며 로동자, 농민 출신의 평범한 근로청년들이 혁명의 와중에서 정치사상적으로나 군사기술적으로나 문화도덕적으로 얼마나 빨리 성장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도표와도 같이 되여왔었다.

김산호의 죽음때문에 나는 그날 저녁식사를 하지 못하였다.

대원들이 우등불을 피워놓고 《사령관동지!》, 《사령관동지!》하면서 나를 찾았으나 나는 불곁에도 다가가지 않았다. 온몸이 그대로 얼음덩어리가 되여 눈속에 묻혀있을 김산호를 생각하니 불을 보는것만으로도 죄를 짓는것 같은 심정이였다.

8련대장 전영림도 그날은 나처럼 저녁식사를 하지 못하였다. 김산호가 조선사람이고 전영림이 중국사람이였지만 국적의 차이가 그들의 혁명적우정을 방해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전영림은 언제나 김산호의 의사를 존중하였고 김산호는 항상 뒤에서 전영림의 일을 성심성의로 떠밀어주었다.

전영림이 김산호의 죽음을 두고 얼마나 슬퍼하였던지 그의 부하들도 전원이 단식하였다. 김산호와 김학률의 도움으로 포위에서 구출된 대원들은 자기들을 사지에서 끌어낸 생명의 은인들과 희생된 전우들을 생각하며 끝내 식사를 하지 않았다.

싸움이 끝난 다음에도 적들은 철수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분명 병력을 증강하여 포위망을 완성한 다음 우리를 소탕하골안에 몰아넣고 전멸시키려고 하는것 같았다. 자칫하다가는 그 포위망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고 녹아날수 있었다. 이런 때일수록 주동에 튼튼히 서서 적을 피동에 몰아넣는것이 유격전의 요구였다.

나는 부대를 수림속 멀리로 철수시키는척하다가 은밀히 되돌아와 우리가 싸우던 전장을 차지하고 거기서 하루밤을 숙영하게 하였다. 제자리를 뱅뱅 돌면서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우리 식의 고유한 전술이였다.

우리가 이런 눈속임을 하고있는 사이에 적들은 적들대로 우리와의 결판을 준비하느라고 병력을 계속 투입하고있었다. 아마 적들도 그 봄에는 《동기대토벌》에서 당한 참패를 만회해보려고 사생결단을 하기로 결심한것 같았다. 적들은 소탕하골안으로 끊임없이 밀려들고있었다. 마치도 만주땅에 있는 무력은 다 그 골안으로 밀려오는것만 같았다. 날이 어두워진 다음 장대에서 평지를 내려다보니 소탕하 수십리골안에 난데없는 우등불의 바다가 펼쳐져있었다. 대도시의 야경을 방불케하는 광경이였다. 우리를 겹겹이 에워싸고있는 적의 불무지들이였다. 그 많은 불무지들을 방향별로 대충 세여보게 하고 불무지당 병력수를 추산해보았더니 수천명에 달하는 놀라운 병력이 산출되였다.

불의 바다를 바라보는 대원들은 다들 표정이 굳어졌다. 이제는 소탕하의 장대에서 최후를 각오해야 한다는 비장한 생각들이 든것이 틀림없었다.

《사령관동지,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것 같습니다. 결사전을 준비하는게 어떻습니까?》

7련대장 손장상이 내곁에 다가와서 비장하게 하는 말이였다. 다른 지휘관들도 꼭같은 표정들이였다.

손장상의 《결사전》이라는 말은 어쩐지 내 귀에 공허하게만 들리였다. 500명도 못되는 적은 력량으로 수천명의 적과 결사전을 벌린다는것은 털어놓고 말해서 자포자기적인 만용이라고밖에 볼수 없었다.

결사전을 해서 우리가 다 죽더라도 그 덕으로 래일 당장 혁명이 승리하게 된다면 어찌 그것을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살아남아서 일단 시작한 혁명을 성공에로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였다.

…동무들, 살아남는다는것은 죽는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을것이 아니라 모두가 살아서 혁명을 계속해야 한다. 우리앞에는 국내진공작전이라는 큰 과제가 놓여있다. 이것은 시대와 력사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성스럽고도 영예로운 과제이다. 이런 대사를 눈앞에 두고 우리 어찌 죽음의 길을 택할수 있겠는가. 우리는 모두가 살아서 인민혁명군의 국내진출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조국으로 반드시 진출해야 한다. 그러니 난국을 타개할 길을 생각해보자.…

《사령관동지, 용수도 정도가 있지 이런 함정속에서 어떻게 솟아나겠습니까?》

손장상은 여전히 사태를 파국적인것으로만 보고있었다.

전부대가 명령을 기다리며 나를 지켜보고있었다. 사령관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가를 그때처럼 뼈에 사무치게 절감한적은 없었던것 같다.

나는 크고작은 우등불로 가득차있는 골안을 굽어보며 포위망을 뚫고나갈 묘책을 궁리하였다.

문제는 어느쪽으로 어떻게 뚫고나가 적의 포위를 멀리 벗어나겠는가 하는것이였다. 만일 소탕하골안에 널려있는 《토벌대》의 병력이 수천명으로 추산된다면 적의 후방은 지금 텅 비여있을것이다, 적들은 우리가 포위환을 벗어나는 경우 분명 더 깊은 산속으로 빠지려 할것이라고 생각할수 있다, 이런 조건에서는 적의 포위가 비교적 약한 큰길쪽에 붙어서 살짝 빠져나가는것이 상책이다, 그다음에 큰길을 따라 일행천리하자, 이러한 생각이 내머리에 떠올랐다.

나는 즉석에서 명령을 내리였다.

…동무들, 죽기를 각오하는것은 좋으나 그 누구도 죽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는 살길이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소탕하의 수림지대를 버리고 주민지구로 나가야 한다. 주민지구에 나가서 큰길을 따라 동강쪽으로 행군하자는것이 나의 결심이다.…

지휘관들은 《큰길》이라는 말에 일제히 고개를 쳐들었다. 이동할 때 은밀성을 보장하는것은 유격대의 활동에서 철칙으로 되여있었다. 그런데 적들의 대병력이 우리를 둘러싸고있는 때에 주민지대에 나가 대도로를 따라 행군하라고 하니 그들이 놀랄수밖에 없었다.

손장상이 내곁에 다가와 지나친 모험이 아닌가고 불안스럽게 말했다. 그가 나의 탈출작전을 지나친 모험이라고 우려한것은 공연한것이 아니였다. 어느 모로 보든지 그것은 모험이라고 단정할수밖에 없는 아슬아슬한 작전이였다. 왜냐하면 적들이 큰길을 지키고있을수도 있고 또 저들의 후방에 일정한 병력을 남겨놓았을수도 있기때문이였다.

나는 원래 항일무장투쟁초기부터 군사모험주의를 반대해왔었다. 우리는 이길수 있는 싸움만 하였다. 이길수 없는 싸움에는 발을 들이밀지 않았다. 우리가 모험에 매달린것은 피치 못할 경우뿐이였다. 그러나 우리가 실행한 모험은 어느것이나 다 성공을 전제로 한 모험이였으며 우리의 힘을 최대한으로 조직동원한 그런 모험이였다.

백번 하면 백번 다 과녁을 명중하는 성공적인 모험, 그것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철석같은 신념과 투지와 용기를 가져야만 단행할수 있다.

내가 소탕하의 장대우에서 결심한 주민지대에로의 탈출과 대로행군 전술은 승산이 확실한 모험이였다. 내가 그것을 승산이 확실하다고 본것은 바로 그 모험속에 역경을 순경으로 전환시키고 피동에서 주동으로 넘어가려는 우리 식의 투철한 공격정신이 깃들어있고 적의 약점을 최대한으로 리용하기 위한 과학적인 타산이 깔려있었기때문이다.

싸움이란 결국 지혜와 지혜의 대결인 동시에 신념과 신념의 대결, 의지와 의지의 대결, 용기와 용기의 대결이기도 하다.

적들이 소탕하일대에 수천명의 병력을 집결시킨것은 수적인 우세에 의한 대규모적인 인해전술로 우리를 포위섬멸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인해전술에 의한 대포위전은 그들이 혁명군을 《토벌》할 때마다 항용 쓰는 상투적인 수법이였다. 적들은 이미 세상에 수백번도 더 알려진 그 진부하고 판에 박힌 전술로 우리를 전멸시키려고 하였다. 적들이 믿는것은 오직 수천명이라는 그 방대한 수자뿐이였다. 바로 여기에 그들의 전술이 가지고있는 약점과 제한성이 있었다.

적들은 소탕하 수십리골안에 우등불의 바다를 펼쳐놓음으로써 자기들의 력량이 얼마만큼 된다는것과 어떤 전술로 인민혁명군을 섬멸하려 한다는것을 죄다 로출시키였다. 그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작전문건을 탈취당한것과 같은 실수를 한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실수로 하여 그들은 벌써 우리에게 주도권을 빼앗긴셈이였다.

나는 우리가 반드시 안전지대로 빠져나갈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였다. 그래서 손장상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에게 미소를 지어보이였다. 그리고는 지휘관들을 향해 말하였다.

…적들은 지금 이곳에 수천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것은 그들이 소탕하주변은 물론, 무송일대의 모든 주민거주지들에 널려있던 군대와 경찰들만이 아니라 자위단무력까지 깡그리 긁어모아가지고 왔다는것을 의미한다. 그런즉 이 아근의 마을과 대로들은 텅 비여있을것이다. 적들은 현재 밀림속에만 주의를 돌리고있다. 우리가 설마 대도로로 빠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것이다. 거기에 바로 적들의 빈구석이 있다. 우리는 그 빈 공간을 리용하여 동강밀영으로 신속히 이동해야 한다.…

그때 내가 한 말과 나의 행동거지가 아마도 퍽 여유작작했던것 같다.

지휘관들의 얼굴에는 비로소 화색이 돌았다. 그들은 신바람이 나서 대렬에 출발구령을 주었다. 먼저 8련대가 골짜기로 내려갔다. 그뒤를 경위중대가 따르고 7련대가 따랐다. 행군종대는 불무지들을 피해가며 큰길쪽으로 소리없이 움직이였다. 집단의 생사를 판가리하는 복잡한 정황이나 위기가 조성되였을 때 지휘관이 취하는 자세와 개개의 언행이 전대오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그때 나는 크게 절감하였다. 지휘관이 태연하면 전사들도 태연하고 지휘관이 당황해하면 전사들도 당황해하는 법이다.

예견했던바대로 신작로에는 개미 한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마을어귀에 불무지자리만 남아있을뿐이였다. 우리는 궤도우를 질주하는 급행렬차처럼 여러개의 마을들을 거침없이 통과하면서 동강으로 행군하였다.

우리는 총 한방 쏘지 않고 텅 빈 적구를 무사히 통과하였다. 우리가 총을 쏜것은 단 한번 8련대 대렬이 두 부분으로 갈라져서 서로 뿔뿔이 행군하는것을 발견했을 때였다. 두 토막으로 갈라진 앞대렬과 뒤대렬사이의 거리는 500메터도 더되였다. 마을과 대로들을 지나는 사이에 우리의 대원들은 긴장을 늦추기 시작했던것이다. 8련대 대원들중에는 졸면서 행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나는 후위에 있는 지휘관을 시켜 총을 한방 쏘게 하였다. 그 총소리가 울린 다음부터 행군속도는 곱절 빨라졌다. 걸으면서 조는 사람도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소탕하에서 실현한 대로행군전술을 우리는 후날 조국에 나와서 베개봉을 떠나 무산지구로 진출할 때에도 적용하였다. 그 전술을 일행천리전술이라고 한다.

후날 잡지 《철심》을 보고 료해한데 의하면 적들은 소탕하전투때 일본, 만주국, 독일 등 3국의 기자들로 구성된 기자단까지 끌고왔다고 한다. 기자들이 종군을 하는것은 어느 전쟁에서나 볼수 있는 례상사이지만 만주에서 수천수만리나 떨어져있는 나치스독일의 기자까지 전장에 굴러온것을 보면 일본의 《토벌》전문가들이 무송지구작전에 상당한 의의를 부여했고 또한 그들이 이 작전을 다 이긴 싸움으로 치부하고있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철심》에 실린 《동변도토비행》이라는 기사에 의하면 이 기자단은 일본의 주요신문들인 《도꾜니찌니찌신붕》, 《요미우리신붕》, 《호찌신붕》의 기자진과 함께 신경방송국 성원들과 만주국의 외교부 관리들, 나치스독일의 국가통신사 통신원인 요한 네벨로 구성되여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일, 독, 만 출판보도계와 언론계의 련합진에 외교관들까지 합세한 어마어마한 참관단이였다. 아마도 적들은 무송지구 《토벌》작전을 전세계에 자랑할만한 시범작전으로 판단하고 이 작전에서 달성하게 될 저들의 《혁혁한 전과》를 만천하에 널리 소개하고싶은 열의로 퍼그나 들떠있었던것 같다.

때를 같이하여 만주국 군정부 군사조사부 핵심간부 와시자끼와 사무관 나가시마, 안동특무기관장 다나까도 현장에 출두하였다. 그들도 그해 봄에는 무송의 험산준령과 골짜기들에서 일본군이 인민혁명군을 전멸시키고 《동양평화의 암》을 영원히 근절시키게 될것이라는 망상에 잠겨있었을것이다. 와시자끼는 만주지방의 공산주의운동 실상에 정통한 인물이였고 그것을 박멸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는데서 주동적역할을 한 간단치 않은 모사였다. 그는 《만주공산비의 연구》라는 비밀도서의 주간집필자로서 만만치 않은 필력도 가지고있었다.

조국해방전쟁(1950∼1953년) 말기 리승만이 정형고지라는 자그마한 고지에서의 싸움을 구경시키려고 숱한 외국기자들을 끌어들인 일이 있는데 그 보고를 받고 나는 무송원정시절을 새삼스럽게 회상하지 않을수 없었다. 리승만의 경망스러운 행위와 일본의 《토벌》계의 우두머리들의 허장성세에는 어딘가 모르게 일맥상통한 점이 있었다.

상대방을 깔보고 자기를 과대평가하는데서는 히틀러나 도죠나 무쏠리니나 리승만이나 매일반이였다.

기자단일행을 맞이한 《토벌》사령관은 자기 부대들이 산에서 순수한 김일성공산군과 조우했는데 김일성은 30살도 안되며 모스크바공산대학에서 훈련을 받았고 500명이 되는 병력을 가지고있는 동변도에서 첫째가는 큰 세력이지만 《지금은 자루안에 든 쥐신세》라고 뽐냈다. 그는 독일말을 아주 류창하게 했는데 나치스통신원에게도 통역을 거치지 않고 자기가 직접 설명했다고 한다. 그 당시 일본신문들은 내가 모스크바공산대학을 졸업했다고 굉장히 떠들었다. 《자루안에 든 쥐신세》라는 《토벌》사령관의 말에 기자단일행은 환성을 올리였다.

그러나 우리 주력부대가 쥐도 새도 모르게 포위망을 돌파하여 종적을 감추게 되자 《토벌》사령관은 다시 기자단앞에 나타나서 공산군은 300명 정도인데 다 도주했다고 하고는 《포로병》 한명을 궁색스럽게 보여주면서 그를 취재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기자단이 취재한바에 의하면 그《포로병》이라는 군인은 통화에서 위만군에 복무하다가 얼마전에 혁명군편으로 넘어왔다고 진술하였는데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면서 히죽히죽 웃고있더라는것이였다. 솔직히 말하건대 우리는 그때까지 통화계선에 나간 일이 없었다.

연극도 분수가 있지, 기자단이 얼마나 아연실색했겠는가 하는것은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을것이다.

소탕하의 수해속에 적들이 펼쳐놓았던 우등불의 바다는 우리에게 비단대로 행군전술만 착상할수 있게 해준것이 아니였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국경일대에 집결되여있던 적들을 무송쪽으로 끌어오자던 원정의 목적이 기본적으로 달성되였다는것을 확신할수 있게 해주었다.

인민혁명군이 수천명에 달하는 대병력의 포위를 성과적으로 돌파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는 통보를 받은 적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적들은 혁명군의 행방을 가늠하지 못하여 갈팡질팡하였다. 적 사병들속에서는 여러가지 요언들이 류포되였다. 《유격대의 전술은 귀신도 곡할 전술이다.》, 《조선빨찌산에는 제갈량을 찜쪄먹을 도사가 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수년내에 서울도 치고 도꾜도 친다더라.》, 이런 말들이 민간에까지 흘러나와 농촌마실방에 모여드는 늙은이들의 화제거리로도 되였다. 이 행군을 통하여 우리 부대에 대한 민화와 전설은 더욱 풍부해졌다.

두도령에서 동강부근까지의 행군 역시 심한 식량난을 동반하였는데 이루 형언할수 없을 정도였다.

일행천리하여 동강 가까운 밀림에 도착한 우리는 그곳에 한달쯤 머물러있을 작정을 하고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공작에 착수하였다. 수백명이 한달동안 먹을 식량을 마련한다는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였다.

그런데 예상외로 우리에게 식량문제를 풀수 있는 좋은 길이 열리게 되였다. 밤중에 보초임무를 받고 망원초로 나갔던 대원들이 우연히 초소가까이에서 강냉이밭을 발견하였던것이다. 전해에 심어놓고 수확을 하지않아 밭에는 겨울난 강냉이들이 그대로 있었다. 백두산주변의 심산들에는 그런 밭들이 적지 않았다.

며칠째 낟알구경을 하지 못하고 겨와 맹물로 연명을 해온 보초병들은 부대의 동료들을 생각하여 돌아올 때 강냉이를 따가지고왔다. 그런데 그들은 밭임자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밭임자가 나타나지 않은데다가 그가 어디에서 사는지 알수도 없었고 보초교대시간이 되여 알아볼 경황도 없었던것이다.

나의 엄한 꾸중을 듣고 주인을 찾아떠났던 보초병들은 몇시간후 머리가 하얀 중국로인 한분을 데리고 내앞에 나타났다.

나는 부대를 대표하여 그 로인에게 사죄하고 현금 30원을 내놓았다.

그러자 로인은 펄쩍 뛰면서 강냉이 몇배낭이 무엇이기에 대장이 이 하찮은 늙은이에게 그런 사죄를 다하는가, 토비들이 먹는것은 아까와도 혁명군이 먹는것은 아깝지 않다, 강냉이 얼마때문에 혁명군한테서 돈을 받는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후날 우리 마을 사람들이 이 사연을 알게 되면 나를 뭐라고 욕하겠는가, 나는 돈도 받을수 없고 이 강냉이도 가져갈수 없다고 하였다.

나는 로인에게 강냉이는 로인네 밭에서 따온것이니 응당 받아야 하는것이고 돈도 손해를 끼친 대가로 무는것이니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내가 양보를 하지 않고 완강하게 고집하는 바람에 로인은 마지못해 돈과 강냉이배낭들을 가지고 마을로 돌아갔다. 그 늙은이는 자기를 마을까지 호송해주려고 따라가는 우리 대원들에게 방금전에 자기를 만나준 대장이 누구인가고 물었다.

우리 대원들은 김일성장군이라고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그러자 로인은 자기가 오늘 평생 씻지 못할 대죄를 지었다고 하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였다. 그는 마을에 돌아가자 일가친척들을 동원하여 우리 보초병들이 강냉이를 따온 그 밭에서 강냉이를 모조리 따서 발구에 싣고 다시 나를 찾아왔다.

《내 오늘 김대장을 만나보고 몹시 감복되였습니다. 김대장이 저 같은 백성을 그렇게 중히 여겨주니 이 늙은것은 황송하기만 하외다. 인정을 인정으로 갚는것이니 저 발구의 강냉이를 사양말고 받아주시오.》

이번에는 내가 로인의 소원을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그가 가져온 강냉이덕으로 우리는 어려운 고비를 넘길수 있었다.

그 로인은 나에게 식량을 구할수 있는 통로까지 대주었다. 만강 물곬을 따라 20리쯤 내려가면 양삼포전이 있는데 그 포전주인들과 교섭을 하면 알도리가 있다고 하였다. 늙은이의 말에 의하면 그 양삼밭자리에 콩과 강냉이를 심었으나 주인들은 자기네처럼 가을을 하지 않고 곡식을 세워둔채 밭을 통채로 팔아버리려 한다는것이였다. 그는 김장군부대에서 요구한다면 자기가 직접 나서서 흥정을 해볼 용의가 있노라고 하였다.

나는 전령병을 한명 붙여 그 로인을 양삼밭이 있다는곳으로 보냈다. 전령병은 뜻대로 락착을 볼것 같다는 소식을 가지고 부대로 돌아왔다.

우리는 경위중대와 7련대에서 건장한 대원 몇사람을 골라 양삼포전으로 보냈다.

식량공작대가 식량공작을 하는동안 부대는 얼마동안 강냉이로 끼니를 이었다. 며칠후 공작대에 망라된 경위대원들이 대두박을 지고 부대에 나타났다. 그것은 양삼포전주인들이 가지고있던것들이였다. 우리는 그 대두박을 생것채로도 먹고 쪄서도 먹고 구워서도 먹었다.

대두박을 지고온 대원들의 말에 의하면 양삼포전주인들은 혁명군이 식량때문에 고생한다는 말을 듣자 심심한 동정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양삼밭자리에는 콩과 강냉이를 심었는데 아직 수확을 하지 않은 곡식들이 그대로 밭에 있더라는것이였다. 그것은 우리 부대의 한달분 식량을 대고도 남을만한 량이였다. 식량공작대원들이 그 곡식을 팔라고 하자 양삼밭주인들은 김일성장군의 부대를 돕는 일인데 어찌 돈을 받을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 콩과 강냉이가 없어도 살수 있으니 다 가져다 먹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7련대의 식량공작대원들은 그들에게 억지로 돈을 떠맡기고 밭곡식을 통채로 샀다.

우리는 저녁식사를 끝낸 다음 인차 양삼포전으로 강행군을 하였다. 포전에 도착하자 전부대가 달라붙어 강냉이도 따고 콩도 거두었다. 강냉이는 이삭채로 따서 보관하고 콩은 포기채로 거두어 마당질을 하였다. 도리깨가 없는 마당질이여서 몽둥이로 치기도 하고 발로 밟기도 하였다. 콩과 강냉이를 합쳐서 셈하니 수십섬이 되였다.

나는 양삼포전주인들을 만나 고맙다고 인사하였다.

선량한 양삼포전주인들은 우리가 한달동안 먹고도 남을만한 소금까지 져다주면서 더 잘 싸우라고 고무해주었다.

우리는 식량문제가 해결되자 부대를 이끌고 동강밀영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장백지구를 떠날 때부터 우리가 군정학습터로 내정해두었던 지점이였다.

나는 이미 그전해 봄과 여름에 허락여로인을 통하여 동강의 밀림속 어느 한 지점에 가면 옛날에 고려보자 또는 고력보자라고 부르던 마을터가 있으며 그 마을터에 우리 선조들이 무예를 익히던 보루의 주추돌이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었다. 허락여로인은 말하기를 자기가 만강의 화랍자마을에 이사짐을 풀어놓았던 10대의 소년시절에만 해도 고려보자주변에는 순 조선사람들만 사는 마을이 여러개 있었는데 그곳의 화전들은 땅이 걸어서 곡식도 아주 잘되였다고 하였다.

청일전쟁과 로일전쟁의 여파가 백두산기슭에까지 미칠 때 일본군대가 고려보자에까지 나타나 마을사람들에게 함부로 란도질을 해댄적이 있었다. 그때 격노한 마을의 청장년들은 활과 창과 석전으로 왜적을 쫓아냈다고 한다. 고려보자가 홍범도부대의 련병장으로 리용될 때에는 이 마을 청년들이 대부분 그 부대에 입대하여 교련을 받았다.

경신년 대《토벌》은 고려보자를 페허로 만들어버리였다. 마을은 모조리 불타서 재가 되고 보루는 폭파되고 주민들도 전멸되다싶이 하였다. 천행으로 살아남은 얼마 안되는 사람들마저 밀림속에 숨어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몇해전에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가다보니 옛 고려보자에는 인적이 끊어졌다는것이다.

허락여촌장한테서 이런 예비지식을 얻은 다음 지도를 펼쳐보았더니 과연 고려보자라는 지명이 있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100리 안팎에는 고려보자라는 이름을 가진 고장이 한둘만 있는것이 아니였다. 그런 이름을 가진 마을은 림강에도 있었고 장백에도 있었다. 안도현에는 고려위자라는곳이 있었다. 그것은 고려사람들의 보루가 있는 고장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지명이였다. 백두산의 동쪽과 남쪽 지대에는 요와보, 보천보, 라난보, 신무성, 창평, 창동, 혜산진, 신갈파진 등등의 이름을 가진곳들이 또한 많은데 그 지명들이 담고 있는 뜻이 말해주는것처럼 옛날에 보루나 성, 혹은 군수창고나 파수병들이 지키는 나루가 있었던 고장이였다. 이것은 고려시기나 고구려시기는 말할것도 없고 고조선시기부터 벌써 우리 조상들이 백두산주변의 여러 처소들에 성과 보루들을 쌓고 국방에 힘써왔다는것을 의미한다.

나는 허로인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애국선렬들이 축성한 옛 보루와 그들이 겪어온 고난의 자취가 어려있다는 동강밀림속의 그 지점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었다.

고려보자의 옛 마을자리를 찾아간 우리는 양삼재배자들이 사용하다가 비우고 갔다는 두채의 빈집을 발견하였다. 무송지방에는 산에 들어와서 인삼농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중에는 추운 겨울이 오면 도시근처에 있는 자기네 마을에 가서 지내다가 여름 한철만 산에 들어와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가 발견한 두채의 빈집은 과송산이라는 꼭같은 이름을 가진 두 산기슭에 있었다. 과송산이란 잣나무가 많은 산이라는 뜻이다. 잎이 5개씩 한묶음으로 달려있는 소나무라는 뜻에서 오엽송이라고도 부르는 이 잣나무를 무송사람들은 한자말로 과송이라고 불렀다. 동서량쪽에 쌍둥이처럼 사이좋게 마주 서있는 두 과송산에는 이름 그대로 잣나무가 많아 고산지대의 웅건장중한 풍치에 호방한 맛을 보태여주었다.

우리는 두채의 빈집을 수리하고 거기서 정치학습과 군사상학을 진행하였다. 련병장은 동쪽 과송산의 밀림속 공지에 꾸리였다.

한달분이상의 식량을 장만하고 밀영에 자리를 잡게 되자 적지 않은 대원들은 부대가 당분간 《장기휴식》에 들어가게 되는 모양이라고 추측하면서 기뻐하였다. 그들이 그런 추측을 하는것은 무리가 아니였다. 오랜 강행군과 격전의 후과로 하여 피로가 극한점에 달한 대원들은 누구나 다 휴식을 갈망하고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휴식을 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우리는 대원들이 피로를 풀사이도 없이 동강밀영에서 중대정치지도원급이상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무송원정을 총화하였다. 이 총화모임에서는 원정과정에서 발현된 옹간애병의 미거들이 널리 소개되고 앞으로의 활동에서 그런 미풍을 더욱 조장발전시킬데 대한 문제가 강조되였다.

이 모임에 이어 소집한 회의가 바로 항일혁명투쟁사에서 하나의 력사적분기점으로 되는 서강회의이다. 회의는 서양목정자밀영에서 사흘동안 진행되였는데 2사와 4사의 간부들과 위증민, 전광을 비롯한 군부간부들도 참가하였다. 회의에서는 국내진공작전방침이 토의되였다. 이 방침과 관련하여  내가 연설을 하였다. 회의참가자들은 모두 내가 내놓은 국내진공작전방안을 찬동하였다.

우리는 회의에서 국내진공작전과 관련된 매 부대들의 임무와 활동방향, 활동구역도 결정하였다.

그 회의후 동강밀영에서 진행된 군정훈련의 전과정은 국내진공을 위한 정치군사적준비를 갖추는데 전적으로 바쳐졌다.

정치상학과정안에서 기본을 이룬것은 조선혁명의 로선과 전략전술문제, 국제국내정세에 대한 강의였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 대한 해설강의는 조선혁명에 관한 우리의 주체적로선을 리해하는데서 큰 도움으로 되였다. 이 강의를 통하여 신입대원들은 백두산밀영에서 섭취한 지식을 더욱 심화시킬수 있었다.

우리는 이때에도 독경식학습을 반대하였다. 그대신 실천과 결부된 학습토론과 문답식학습을 적극 장려하였다.

사령부성원들과 군정간부들, 경위중대대원들에 대한 강의는 내가 직접 담당하였다. 나는 그때 혁명로선에 대한 강의와 함께 사회발전의 초보적인 원리도 강의해주고 세계적으로 이름난 혁명가들과 영웅호걸들, 파시즘의 대표자들에 대해서도 강의해주었다. 국제정세에서 우리의 초점을 끈것은 에티오피아와 이딸리아의 전쟁, 에스빠냐인민전선군의 전과, 독일, 이딸리아, 일본의 파쑈화에 대한것이였다.

그 당시 적들의 잡지에는 히틀러가 지방군시찰을 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났었는데 나는 그 사진을 보이면서 히틀러의 위험성에 대해 경종을 울리였다.

중국농민운동의 저명한 활동가의 한사람인 방지민렬사도 우리의 화제에 올랐다. 방지민의 영웅적한생에 대한 이야기는 모든 청강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동강군정훈련에서 모범으로 평가되였던 대원들가운데서 지금까지도 내 기억에 남아있는 사람은 마동희이다. 그는 열성도 높았지만 토론도 아주 잘하였다. 마동희는 이 동강군정훈련을 통하여 훌륭한 정치일군으로 성장하였다.

우리 선조들의 옛 보루가 있었던 고려보자에서 어제날의 부대기농사군들과 날품팔이군들은 광복거사의 주공전선을 담당하게 될 믿음직한 역군으로 자라나게 되였다.

후날 항간에서는 우리가 백두산의 어느 한 깊은곳에서 수많은 군사를 길러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것이 와전되여 어떤 고장에서는 우리가 백두산중의 깊은 동굴에서 훨훨 날아다니는 장수 수만명을 길러냈다는 전설까지 나돌았다. 그런 전설을 낳은 고장이 다름아닌 동강의 군정훈련터 고려보자였다.

동강군정훈련이 끝나가고있던 1937년 5월초 우리는 밀영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대내기관지인 《서광》을 창간하였다. 신문의 제호에는 해방된 새날의 조국에서 살려는 우리 민족의 절절한 숙망과 그 새날을 기어이 앞당겨 맞이하려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결의가 힘차게 고동치고있었다.

이 신문의 창간호를 세상에 낸 다음 우리는 인차 조국진군을 위해 동강밀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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