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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독도령유권》주장은 군국주의적령토야망의 발현(4) [통일의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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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1-07-16 12:18 조회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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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10(2021)년 7월 17일 《통일의 메아리》

일본의 《독도령유권》주장은 군국주의적령토야망의 발현(4)

이 시간에는 전시간에 이어 일본의 독도강탈책동과 관련해서 본 방송 로지성론설원과 사회과학원 장철우연구사가 나눈 대담 《일본의 <독도령유권>주장은 군국주의적령토야망의 발현》을 계속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오늘은 네번째시간입니다.

 

본방송 론설원(1); 안녕하십니까.

사회과학원 연구사(2); 안녕하십니까.

1; 일본반동들의 강도적인 《독도령유권》주장의 허황성과 반동성을 까밝히는 시간, 전시간에 이어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2; 예, 그렇게 합시다. 우리 인민이 1 400여년이나 령유하여왔고 일본자신도 조선의 섬으로 공식 인정해온 독도는 1905년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고있던 시기에 비법적으로 시마네현에 《편입》되게 되였습니다.

《독도령유권자료의 탐구》(2권, 1999년, 283~284페지)에 의하면 일본은 1905년 1월 28일 내각회의에서 시마네현의 어업가 나까이가 제출한 《리양꼬섬(독도) 령토편입 및 임대청원》에 기초하여 독도가 《무주지》, 다시말해서 《주인이 없는 땅》이라는 전제하에 《오기도사의 관할로 한다.》는것을 결정하고 2월 22일부로 《시마네현고시》 제40호라는것을 조작하여 《북위 37°9′30″, 동경 131°55′, 오끼섬으로부터 서북 85mile에 있는 섬을 죽도(다께시마)라고 칭하고 오늘부터 본현소속 오끼도사의 관할로 정하였다.》고 공포하였습니다.

1; 예, 독도의 《시마네현편입》은 일제의 조선강점정책의 범죄적인 산물로서 명백히 불법무도한 령토강탈행위였습니다.

독도의 《시마네현편입》의 비법성은 무엇보다도 당시 일본이 독도가 조선령토라는것을 뻔히 알면서도 비렬하고 음모적인 방법으로 독도를 《무주지》로 만들어 《령토편입》한데 있다고 봅니다.

2; 옳습니다. 독도는 무인도이기는 하였지만 《무주지》는 결코 아니였으며 독도가 조선의 섬이라는데 대해서는 그 이전 시기는 물론 《편입》 당시인 20세기 초에도 일본정부와 민간인들모두가 잘 알고있었습니다.

우선 《령토편입》의 신청자인 나까이자신이 독도를 조선령토로 알고있었습니다.

독도의 《시마네현편입》은 시마네현의 어업가 나까이의 리양꼬섬(독도)임대청원에서부터 시작되였습니다.

《나까이리력서》부속문서 《사업경영개요》에 의하면 1903년부터 독도수역에서 물개잡이에 종사한 나까이는 1904년 어기를 마치고 수도에 올라오게 되였는데 그 목적에 대하여 《그 섬이 울릉도에 부속된 조선의 령유라고 생각하여 장차 통감부(조선봉건정부의 오기)에 가서 할바가 있지 않을가 하여 상경하였다.》고 진술하고있습니다. 즉 나까이는 독도가 울릉도에 속한 조선령토이므로 일본정부가 조선정부에 물개잡이독점권을 교섭해줄것을 청탁하기 위하여 수도에 왔던것이며 그의 초기계획은 명백히 령토편입이 아니라 임대청원이였습니다.

1; 뿐만아니라 일본정부도 독도가 《무주지》가 아니라 조선령토라는것을 분명히 알고있었습니다.

명치정부는 1877년 3월에 전국적인 지적조사(땅을 조사하여 등록하는것)와 관련하여 제기된 울릉도와 독도의 령토소속에 대하여 저들과 관계없다는 공식지령문을 내무성과 시마네현에 하달하였었습니다.

《나까이리력서》부속문서 《사업경영개요》에 따르면 내무성도 1904년 나까이의 령토편입청원이 제기되였을 때 초기에는 《이 시국(로일전쟁시기)에 조선령토로 의심되는 황막한 일개 불모의 암초를 거두어 주변의 다른 나라들에게 우리 나라(일본)가 조선병탄의 야심이 있다는 의문을 크게 하는것이 리익이 적다.》고 하면서 그것을 기각시키려고 하였습니다.

2; 예, 이처럼 청원자자신과 일본정부도 조선령토라는것을 잘 알고있던 독도가 하루아침에 《무주지》로 된것은 전적으로 일제의 조선강점정책과 령토야망때문이였습니다.

1407년 쯔시마도주는 조선봉건정부의 《공도정책》을 엿보고 일본인의 울릉도거주를 요청하였고 17세기말에는 《죽도령유권》을 들고나와 울릉도, 독도침략책동을 로골화하였습니다.

1; 예, 울릉도, 독도에 대한 일본의 뿌리깊은 침략책동은 명치유신이후 《정한론》이 국책화되면서 조선강점정책의 일환으로 더욱 악랄하게 감행되지 않았습니까.

2; 그렇습니다. 우선 《일본외교문서》(3권, 일본국제련합회)에 따르면 명치정부는 1869년 12월 외무성관리들인 사다, 모리야마, 사이또 등을 부산에 파견하면서 그 내탐사항중의 하나로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에 속하게 된 경위를 알아올데 대한 지령을 주었습니다. 또한 1882년 임오군인폭동이후 일본정부는 조선주재 일본공사 하나부사에게 폭동의 피해보상을 받을데 대한 《훈령》에서 울릉도의 양도를 받아낼데 대한 지시를 주었습니다.

이러한 침략시도는 1904~1905년 로일전쟁을 계기로 적극적인 단계에로 들어서게 되였습니다.

1; 예, 그럼 오늘은 여기서 이만하고 다음 시간에 계속했으면 합니다.

2; 예, 그렇게 합시다.

 

지금까지 전시간에 이어 일본의 독도강탈책동과 관련해서 본 방송 로지성론설원과 사회과학원 장철우연구사가 나눈 대담 《일본의 <독도령유권>주장은 군국주의적령토야망의 발현》을 계속해서 보내드렸습니다.

오늘은 네번째시간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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